메뉴 건너뛰기

close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이하 '학종')이 지금껏 천편일률적이었던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혁신해내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이하 '학생부')를 보면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활동 중심으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한 명문대의 입학사정 담당자가 고등학교 진학 담당 교사들 앞에서 뿌듯해하며 건넸다는 이야기다. 대학마다 학종이 보편화된 이후 훨씬 다채롭고 풍부해진 아이들의 학생부 기록 내용을 보면 확연하다는 것이다. 학종이 아니었으면 어떤 학교와 교사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겠느냐는 의미다.

그의 확신에 일리가 없진 않다. 오로지 수능 점수 하나로 서열을 매겨 합격을 결정하는 방식에 견줘, 아이들의 다양한 재능과 적성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으니 나름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됐지만, 소수점 이하까지 따지며 애면글면해야했던 과거를 떠올린다면 더욱 공감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반색하며 '혁신'이라 단어를 붙이는 건 솔직히 낯 뜨거운 짓이다. 이는 대학이 지금 일반계 고등학교의 피폐한 현실을 아직 잘 모르거나, 부러 눈 감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학종이 학교 교육 전반에 끼칠 장기적인 전망을 그렇게 장밋빛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회비용'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선, 학종이 자사고와 특목고에 유리하고, 일반계 고등학교에 불리하다는 건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가 됐다. 이러한 '상식'은 불가피한 현실로 치부되어 서열화의 바람 속에 '삼류 학교'로 전락한 일반계 고등학교 내에서도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학종의 '장점'이 오롯이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적용될 뿐, 대다수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남의 집 잔치'고 '그림의 떡'이다.

'성적은 기본'이란 걸, 아이들은 너무 잘 알았다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 12일 오전 서울 청운동 경복고에 마련된 시험장에서 수험생들이 책을 펴놓고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 12일 오전 서울 청운동 경복고에 마련된 시험장에서 수험생들이 책을 펴놓고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대학에서는 모든 아이들의 흥미와 적성, 재능과 잠재력을 파악해서 학생부에 자세하게 기록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럼 그들이 보게 될까? 천만에. 그들의 눈앞에 학생부가 놓이려면, '1차 관문'으로 그들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내신 성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원자들 중 내신 1등급이 즐비한 명문대의 경우에는 학종은 '2차 관문', 거칠게 말해서, 또 하나의 옥상옥일 뿐이다.

곧, 교사들이 학교마다 극소수인 그들의 학생부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학급당 40명에 이르는 아이들의 수많은 항목의 학생부를 두루 상세히 기록할 여력도 없지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하는 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의 학생부를 하나라도 더 채워주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잠재력'이란 것도 상위권 학생에게만 의미 있는 단어다.

처음 학종이 도입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철부지처럼 정책 입안자들의 '선의'를 믿고 '효과'를 내심 기대했다. 시큰둥해 하는 아이들 앞에서 성적은 나빠도 다양한 적성과 재능을 살린다면 원하는 대학과 학과 진학하는 길이 시나브로 열리게 될 것이라 섣부르게 장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학종이든 뭐든 '성적은 기본'이라는 걸 아이들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선지 내신 성적이 안 되는 아이들은 자신의 학생부 기록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다. 그것이 자신들의 대학 진학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학생부의 '양'과 '질'이 성적에 따라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건, 학교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돼버렸다. A4 출력물을 기준으로, 학생부의 매수가 적게는 서너 장에서 많게는 십여 장 차이가 나기도 한다.

신입생 유치 '영업 사원' 된 지방대 교수들

하긴 그들이 주로 가게 될 지방대는 일부 국립대학을 제외하곤 학종이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정원 미달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학종이든 정시든 지원만이라도 해달라는 게 지방대 측의 간절한 바람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상당수 지방대 교수들은 강의와 연구보다 당장 신입생 유치에 매달려야 하는 '영업 사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또, 학종이 보편화되면서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활동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분석도 섣부르긴 마찬가지다. 학종에서 교사 추천서나 자기소개서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교과세부능력특기사항을 기록하기 위한 '꺼리'를 만들자면 기존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으로는 어림없다는 인식에서다. 학종을 통해 자연스럽게 교사들의 수업 개선을 유도하고 있다는 그 자신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학종이 수업 결과물로 소논문의 가치를 인정하니, 학교에선 앞 다퉈 그걸 만들기 위해 프로젝트 수업 등이 속속 등장하게 된 것 아니냐며 반문하는 셈이다. 비교과 영역인 동아리 활동과 봉사 활동도 그 성과를 입시에 반영한다고 하니, 아이들이 더 열심히 참여하게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어릴 적 독후감 숙제 때문에 책을 읽어야 하는 고통과 온갖 짜깁기 편법의 '추억'을 그들은 이미 까맣게 잊은 것일까.

미안하지만, 학종으로 인해 학생부에 기록된 내용은 훨씬 다채로워졌을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신산한 학교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단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종 때문에 업무가 배가됐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학생부의 내용을 대학의 입맛에 맞도록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자신의 모습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며 괴로워하는 교사도 적지 않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은데, 아이들이 행복할 리 없다.

기존 '교사상' 급격히 왜곡시키는 학종

아이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개중에는 학생부를 두고 '소설책'이라며 조롱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이게 어디 우리 학교만의 문제냐"며, "따라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라며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공범'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학년말이면 자신의 학생부를 이렇게 써달라고 직접 작성한 걸 담임교사에게 건네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엇보다도 학종은 학생과 학부모가 지녀온 기존의 '교사상'을 급격히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에게 '유능한' 교사란 잘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부의 '질'과 '양'을 높여주는 교사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지원하는 대학이 요구하는 학종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간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이가 단연 최고의 교사다. 단언컨대, 이것이야말로 학종이 일선 고등학교에 몰고 온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다.

정원 미달에 노심초사하는 지방대 앞에서야 고등학교가 '갑'이라지만, 여전히 서울과 수도권 대학 앞에서 고등학교는 '을'이라고 명명하기에도 참담한, 차라리 '노예'다. 구체적인 학생부 작성 요령을 '컨설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고, 고등학교에선 하나라도 놓칠세라 굽실거리며 받아쓰기에 바쁘다. 듣자니까, 심지어 일부 명문대에서는 "교육부에서 하달한 지침대로 학생부를 기록하면 불합격된다"며 호기롭게 말했다고도 한다.

사교육비 부담으로 가계가 휘청거릴 만큼 뜨거운 교육열에 견줘,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대학들의 학문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전문가입네 하는 사람들의 분석들이 차고도 넘치지만, 그 이유를 나는 이렇게 본다. 서열화한 학벌 구조의 '꽃방석' 위에 앉아 전국의 수천 고등학교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 앞에서 '갑질'하는 재미에 푹 빠진 탓이라고.

학종이든 뭐든 대학 입시로 국가가 학생들의 발달 단계에 따라 만든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좌지우지해서는 곤란하다. 고등학교가 애먼 중학교의 교육과정에 간섭해서는 안 되듯 말이다.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답게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면 되고, 대학은 그들 나름대로 건학 이념에 따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키면 된다. 잘 가르치는 일에는 뒷전인 채, 잘 뽑는 일에만 혈안이 된 대학이라면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요컨대, 앞서 말한 대학 입학사정 담당자의 확신은 틀렸다. 학종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혁신'시킬 수는 없다. 풍성해진 학생부는 그저 '착시 현상'일 뿐, 교육과정 혁신의 근거는 될 수 없다. 부디 '컨설팅' 등 신입생 선발에 쏟는 노력과 정성의 반의반만이라도, 재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아 달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비 효과'가 되어 고등학교를 진정 '혁신'시키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태그:#학교생활기록부종합전형
댓글1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