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셰임>의 주인공 브랜든은 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인물이다.

<셰임>의 주인공 브랜든은 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인물이다. ⓒ 백두대간


마음을 비워내는 일은 어렵다. 부유하는 생각을 정리하는 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이러한 행위를 정신 집중에 비유한다. 그 어려운 이유는 마음이 이상(理想)을 끊임없이 물색하고는 끝내 포획하는 데 있다.

마음은 내일의 이상을 마음에 그리기도 하고, 오늘을 이상으로 채우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은 생각하지 않으면 감각이 주는 쾌락을 선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감각적 쾌락이 이상을 구현한다. 마음의 사고, 상상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 움직인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채 원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람이 아닌 사랑 그 자체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사랑이 주는 감각적 쾌락에 도취한다. 감각이 식으면 그를 떠난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변질됐다.

사랑만이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가 비디오게임에 눈이 멀고, 어른이 술을 과음하는 순간도 그렇다.

감각적 쾌락의 유희를 탐닉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면, 감각적 유희 아래 숨은 중독성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점차 피폐해진다. 이 주제를 다룬 영화가 있다. 2011년에 영국에서 제작되고 2013년에 국내에 개봉한 영화 <셰임, Shame>(감독 스티브 맥퀸)이다. 이 작품은 런던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주연 마이클 패스벤더는 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대도시 뉴욕에 사는 젊은 남자 브랜든(마이클 패스밴더)이 등장한다. 브랜든은 잘 나가는 직장도 다니고, 적당한 아파트도 있는 유능한 여피(yuppie)다. 그런 브랜든이 성이 주는 말초적 쾌락에 중독된다.

브랜든은 말끔한 직장생활 뒤로 시간이 나면 화장실에서 자위하고, 포르노그래피로 컴퓨터가 채워지고,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원나잇스탠드를 하고, 집에서는 콜걸을 부르고, 음란 채팅을 한다.

쾌락의 탐닉을 부추기는 시대의 자화상

 쾌락에 매몰된 그의 일상은, 여자 없이는 흘러가지 않는다.

쾌락에 매몰된 그의 일상은, 여자 없이는 흘러가지 않는다. ⓒ 백두대간


<셰임>의 영상과 대사는, 감독의 눈으로 사회를 진단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연다.

브랜든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반대편에 앉은 한 여성을 본다. 치마 아래로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브랜든은 지난밤 일을 회상한다. 콜걸과 관계를 맺고 화장실에서 자위했다. 브랜든과 그 여성의 눈이 마주친다. 브랜든의 눈은 색욕에 굶주렸다. 여성은 곧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한다. 여성의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브랜든의 눈에 들어온다. 신경을 쓰지 않고 브랜든은 여성을 쫓아간다. 여성은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브랜든은 지하철로 돌아간다.

"'그건 역겹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위험한 방법이다' 냉소주의자들은 늘 그렇게 비판하지. 회사들은 한 치 앞도 못 보기 때문에, 바이러스라면 당장 없애야 하는 줄 알아.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건 계속 퍼져서 무한대로 퍼져나갈 수 있어. 요즘 애들은 옛날과 달라. 유튜브에 올려 봐. 유행어가 퍼지듯, 학생들 사이에서 히트를 치게 될 거야. 그때야 우리에게 찬사를 보내겠지."


 브랜든의 입장에서 여성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브랜든의 입장에서 여성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 백두대간


브랜든에게 여성은 성적 욕구 해소의 대상이다. 여성이 지닌 성의 가치는 감각적 쾌락의 대응물로 전락했다. 미모가 곧 여성의 권력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여성도 자기 자신의 외모가 자본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도 있다. 그러고는 이용하기도 하는데, 쾌락과 자본의 교환 성립이 일어난다. 성 산업이 대표적인 예다. 이 지점에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 탐색하고, 인내하고, 헌신하는 가치는 사라진다.

브랜든의 색욕에 굶주린 시선은 "역겹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남성의 대중적 시선으로 겹쳐지며 포르노그래피처럼 무한대로 퍼져나간다. 감각은 말초적인 감각적 쾌락 앞에 놓이고 비판적 사고는 무기력해진다. 여기에 색욕을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포르노그래피, 새미 포르노그래피 사업이 가세하여 불을 더 크게 지핀다. 히트를 치고 이목을 끄는 돈이 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포르노그래피 사업은 독버섯처럼 번성한다. 돈은 곧 찬사와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난 왜 결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평생을 한 사람과 산다는 건 부자연스럽잖아요."

브랜든은 여성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성관계를 목적으로 한 피상적 관계만 남는다. 브랜든은 포르노그래피 사진, 잡지, 책과 심지어 노트북도 검은 비닐에 담아 버린다. 그러고는 회사에서 만난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연인으로 발돋움하려 노력한다. 별거 중이라는 여자는 브랜든에게 여성과의 진지한 만남, 교감하는 법을 전하려고 한다. 그러나 브랜든은 여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호텔에서 그 여자와 성관계를 맺으려는데 불가능하다. 브랜든은 여자를 보내고 콜걸을 불러 성관계를 한다. 콜걸이 떠나고 브랜든만 호텔에 남는다. 침침한 어스름이 질 무렵까지 브랜든은 침대 위에 그대로 앉아 강가를 응시했다.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브랜든. 더는 자신의 의지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브랜든. 더는 자신의 의지로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 백두대간


브랜든은 감각적 쾌락이 주는 중독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자극적이고 강렬하고 전기적인 쾌락을 구한다. 술집에서 만난 여자에게 대담하게 농을 던진다, 동성애자 클럽에 가서 성행위를 한다. 두 명의 창녀와 동시에 성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브랜든은 그가 원하는 이상적 쾌락을 얻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공허감과 무감각만이 남는다. 이미 브랜든은 두 명의 창녀와 성관계를 맺을 때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얼굴 표정은 고통으로 기괴하게 찌그러져 있다. 몸은 동물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머리로 하는 행위가 아닌, 몸이 하는 행동의 몸부림이었다.

상처받는 불완전한 사람, 인격적 존재

 알고 보면 브랜든도 연민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알고 보면 브랜든도 연민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 백두대간


브랜든의 성적 탐닉과 일탈 이야기는 기독교적 텍스트와 음악이 중층적으로 가미된다.

브랜든의 이야기는 기독교적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성경의 신약에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구약에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이고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한다"고 적혀있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지하철 여자와 브랜든 표정의 오묘하지만, 대조적 변화다. 음욕을 품은 전과 후이다. 나아가 이야기의 주요한 장면마다 신앙심 깊은 작곡가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이 연주된다.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로 네 곡이 나오는데, 이야기도 네 번의 변곡점을 맡는다.


 스틸컷

스틸컷 ⓒ 직접 캡처


브랜든은 'Prelude'을 오래된 축음기로 재생시키고, 노트북으로 포르노그래피를 본다. 피아노 선율에 여성의 신음소리가 엉켜 든다. 브랜든의 입으로는 인스턴트 음식이 넘어간다. 클래식 음악과 포르노그래피, 인스턴트 음식이 대비를 이룬다. 'Praeludium'이 브랜든이 회사에서 만난 여자와의 데이트에 앞서 연주된다. 빌딩의 고층 창가에서 남자와 창녀로 보이는 여자가 격렬하게 성관계를 하고 있고, 1층에는 그 여자가 레스토랑에 앉아있다. 브랜든은 어디를 가나 그 이질적이고 좁은 공간 사이에 끼어있다.

브랜든의 여동생 씨씨(캐리 멀리건)가 뉴욕에 온다.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씨씨는 가수다. 씨씨가 브랜든의 직장상사와 원나잇스탠드를 한다. 브랜든의 아파트, 그의 침대에서 성관계를 맺는다. 그들이 점령한 아파트를 나와, 브랜든은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뉴욕의 밤거리를 숨차게 달리는 사이로 'Aria'가 연주된다. 직장 상사는 씨씨의 몸을 탐하고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씨씨를 버리고 떠난 예전 남자친구와 같았다. 직장 상사는 유부남이다. 씨씨는 결혼반지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씨씨는 사랑에 빠지는 낭만적인 순간을 원했고 외면한다. 그 피학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씨씨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보고 싶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사랑해, 뭐든지 할게, 뭐든지. 그런 말 하지마. 제발…. 사랑해, 사랑해. 뭐든지 할게. 데이트도 필요없어. 데이트는 바라지도 않아. 곁에만 있어줘 난 상관없어. 난 당신만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제발…. 미칠 것 같아."


 브랜든과 씨씨의 비극, 결국 이들이 목도한 허무는 누구의 탓인가. 이들의 탓인가, 이들을 이방인으로 내몬 도시의 탓인가.

브랜든과 씨씨의 비극, 결국 이들이 목도한 허무는 누구의 탓인가. 이들의 탓인가, 이들을 이방인으로 내몬 도시의 탓인가. ⓒ 백두대간


브랜든과 씨씨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다. 아일랜드는 국민의 88%가 로마 가톨릭교 신자에 3%가 개신교 신자다. 그래서 그들은 직장 상사와 창녀와 달리, 서양의 전통적 세계관을 간직하고 있기에, 대도시 뉴욕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비대해지는 광기의 끝에 다다랐고, 고통어린 허무를 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Variation 15 A 1 Clav. Canone Alla Quinta. Andante'가 연주된다. 현실감이 결여된 공허하고 창백한 눈빛의 브랜든이 지하철을 타고 있다. 브랜든은 씨씨가 떠오른다. 다투고 난 후 씨씨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아파트로 달려간다. 욕실에서 새빨간 피로 흥건한 씨씨를 발견한다. 자해하기 전, 씨씨는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우린 결코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상처받은 사람들일 뿐이야."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한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한다. ⓒ 백두대간


노면을 두드리는 차가운 빗소리만 들린다. 병원을 나온 브랜든은 광장에 서서 쏟아지는 비를 온 몸으로 맞는다. 얼굴이 내적인 고통으로 뒤틀린다. 두 손은 습하고 어지러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는 슬픔으로 숙여진다. 몸은 동물처럼 떨리고 바닥으로 하강한다. 빗소리에 외마디 비정어린 절규가 녹아든다. 그 뒤틀린 공간의 이면에서, 브랜든은 현실과 마주보고 선채로, 피로 얼룩지고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안는다.

브랜든은 지하철을 탄다. 얼굴에 지난 밤 일어났던 일로 흉터가 남았다. 반대편에 결혼반지를 낀 그 여성이 앉아있다. 이번에는 여성이 브랜든을 호기로운 눈으로 응시한다. 도발적이고 대담하다. 결혼반지가 비친다. 여성이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한다. 브랜든은 일어서지 않는다.

 브랜든은 내리지 않는다. 영화를 시작할 때의 브랜든과 끝날 때의 브랜든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브랜든은 내리지 않는다. 영화를 시작할 때의 브랜든과 끝날 때의 브랜든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 백두대간



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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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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