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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법원은 인권과 정의의 최후 보루라고 불린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의 사법부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다. 지난해 실시한 조사를 보면 국민들의 사법제도 신뢰도는 OECD 34개국 중 33위로 나타났다. '사법제도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은 단 27%에 불과했다.

법관은 판결을 통해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좌우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하지만 법관도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지라, 착각과 실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설령 법관이 오판했다 해도 사실상 그러한 오판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법관의 오판과 관련해 민사책임이 면책된다는 근거는 헌법이나 법률 그 어디에도 없다. 이와 관련한 대법원 판례는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을 갖고 재판을 했거나 직무 수행상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기준을 현저히 위반한 경우'에만 법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재판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이런 사유를 밝혀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대법원 판례는 사실상 '법관의 면책특권'으로 불린다.

사용자에게 통신사용 내역 입증 책임이 있다고?

김창식씨는 지난 2011년 7월경 자신이 사용하는 이동통신회사로부터 8만5000여 원의 납부요금 통지서를 받았다. 평소보다 통신요금이 많이 나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김씨는 이 회사의 지점을 찾아가 세부내역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회사는 연예인 화보 12건을 본 데이터 통화료와 정보 이용료라고 설명했지만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즉 자신은 핸드폰을 이용해서 연예인 화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데이터 통화료와 정보 이용료 4만3000여 원은 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김씨는 자신이 사용하지도 않은 서비스 요금을 부과한 것은 부당하다고 통신요금 납부를 거부하는 한편, 통신사 대표이사를 수신인으로 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데이터를 사용한 내역을 '시분초' 단위로 밝히지 않으면 요금을 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이 통신사는 요금 연체를 이유로 김씨의 휴대폰을 사용 정지했다. 김씨가 요구한 '시분초' 단위의 내역은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그해 12월 김씨는 통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했다.

1심재판부는 데이터 통화 및 정보 이용을 하지 않았다는 입증 책임이 김씨에게 있다고 봤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이와 정반대였다.
▲ 김씨가 패소한 1심 판결문 중 일부 1심재판부는 데이터 통화 및 정보 이용을 하지 않았다는 입증 책임이 김씨에게 있다고 봤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이와 정반대였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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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여러 달을 끌었고, 그 사이 통신사는 김씨의 휴대폰을 아예 해지했다. 1심 재판부는 통신사의 손을 들어줬다. 1심 판결문에는 "(김씨가) 연예인 화보(12건)는 자신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뿐 별다른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김씨에게 있다고 봤다.

항소심, 1심 판결 뒤집어... "입증 책임은 통신사에 있다"

하지만 김씨는 이 판결을 수긍할 수 없었다.

"사용내역을 밝혀 달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던 통신사가 재판에서는 데이터 통화기록은 7개월이 지나면 회사의 전산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삭제된다면서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용자가 데이터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무슨 수로 입증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요금을 청구한 통신사가 요금 내역에 대한 입증책임을 지고 그 근거를 밝혔어야지요."

1심 판결에 불복한 김씨는 항소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1심 때와는 달랐다. 통신사용 내역을 입증할 책임은 통신사 측에 있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가 요금고지서를 받고서 바로 이의를 제기했고, 두 차례에 걸쳐 내용증명을 보내 이용요금과 관련된 자료를 요구한 점, 통신사가 김씨의 휴대폰 사용내역 등의 자료를 보관기간 만료 전에 보존할 시간 여유가 충분했는데도 보존하지 않은 과실이 있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데이터 통화료 및 정보아용료의 입증 책임이 통신회사측에 있다고 판시했다.
▲ 2심 판결문 중 일부 항소심 재판부는 데이터 통화료 및 정보아용료의 입증 책임이 통신회사측에 있다고 판시했다.
ⓒ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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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회사는 대법원에 상고를 하지 않았고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은 확정되었다. 김씨는 승소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2심 판결은 김씨가 통신회사에 데이터 및 정보사용료 4만3000여원을 지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미 김씨의 휴대폰은 요금 체납을 이유로 해지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2심 판결이 확정된 후 통신회사는 김씨에게 부과되었던 데이터 및 정보이용료 4만3000여원을 감면 처리하는 한편, 김씨가 휴대폰 번호를 포기하는 대가로 200만 원을 제시했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이 20년을 사용해오던 휴대폰 번호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하며, 휴대폰 해지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통신사가 입증해야 할 책임을 사용자에게 있다고 본 1심 재판부의 판단 잘못 이외에 통신사가 법원에 제출한 증거 이외의 내용이 판결문에 들어가 있다며 이를 근거로 1심재판부가 '부정판결'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드시 재판은 법정에 제시된 증거에 의해서만 하도록 되어 있는 공판중심주의를 위배했다는 것이다.

잘못된 1심 판결, 법적 책임 물을 방법이 없다

김씨는 2심 판단을 근거로 1심 재판장과 배석 판사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기각당했다. 이어 김씨는 검찰에 1심 재판을 담당했던 법관들을 형사 고소했지만 이 역시 각하당했다. 당초 4만3000여 원의 통신요금을 가지고 시작된 재판은 판사들 고소와 항고, 재정 신청으로 얼룩지면서 5년 넘게 진행되고 있다. 

김씨는 1심 법관들에 대해 자신이 제기한 민사소송이 기각당한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기각 사유를 설명하는데 '법관의 판결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요지였어요. 아니, 이게 말이됩니까? 법관은 인간이 아닌가요? 법관의 판결은 완전무결합니까? 아무리 터무니 없는 판결을 내려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1심 판결이 '부정판결'이라고 확신하고 담당 법관들에게 법률적 책임을 물으려는 김씨의 행위에는 분명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내린 판결에 사실상 무제한적인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는 판사의 사법적 권한 행사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영미법 판례는 판사의 권한 행사와 관련해 민사상 면책특권을 인정하고 있다"라며 "우리 사법체계에서 법관들의 판결과 관련해 배상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이런 영미법 판례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최근 잘못된 판결을 한 판사들에게 배상책임을 지워야한다는 주장이 영미법 국가에서도 나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태그:#통신요금, #민사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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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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