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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스스로 별칭을 '빅풋(BigFoot) 부부'라고 붙였습니다. 실제 두 사람 모두 '큰 발'은 아니지만, 동네 골목부터 세상 곳곳을 걸어 다니며 여행하기를 좋아해 그리 이름을 붙였지요. 내 작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새로움을 발견하는 거대한 발자국이 된다고 믿으며 우리 부부는 세상 곳곳을 우리만의 걸음으로 여행합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만든 여행 영상도 즐겨 보시길 바랍니다. - 기자 말
산 중턱에 자리한 미하스 전경 흰 쌀 더미를 쌓아놓은 모양이라는 티벳의 드레풍 사원이 떠올랐다. ⓒ 박성경
우리 부부는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Malaga)에 머물며 인근의 하얗고 예쁜 도시, 미하스(Mijas)를 다녀왔습니다. 미하스로 바로 가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푸엔히롤라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어요. 말라가에서 푸엔히롤라(Fuengirola)까지는 45분 정도, 푸엔히롤라에서 미하스까지는 버스로 25분 정도가 걸렸으니 말라가에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로 적당한 곳입니다.

산 중턱에 있는 미하스를 향해 버스를 타고 오르면서 참 희한하게도 티벳 여행 때 들렀던 드레풍 사원이 떠올랐어요. 드레풍이란 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쌀더미 모양'이란 뜻인데, 뒷산을 배경으로 지어진 여러 채의 흰색 사원 건물들이 그렇게 보여서 이름 붙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흰색 건물들이 산 중턱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미하스가 딱 그 모습처럼 보였던 거지요.

우리의 걸음에 쉼표를 찍어준 미하스
자신을 저널리스트라 소개한 노신사가 미하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 박성경
티벳의 드레풍 사원에 첫 발을 들였을 때는 어린 라마들이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환대를 해줬는데, 이곳 미하스에선 멋지게 차려입은 노신사 한 분이 우리에게 먼저 반가운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자신을 저널리스트라고 소개하고는 신분증까지 보여주며 우리에게도 저널리스트냐고 묻습니다. 아마도 남편이 든 캠코더와 제가 든 DSLR 카메라 때문이었겠죠. 우린 그냥 여행자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르신은 미하스에 대한 긍지를 확신에 찬 음성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미하스는 그저 건물만 아름다운 마을이 아니라 역사 깊은 곳이라는 것, 경찰이 필요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라는 것, 스페인에 오는 여행자라면 주요 도시들만 돌지 말고 한번은 꼭 들렀다 가야 하는 곳이라는 것 등 자랑에 자랑을 늘어놓으셨어요.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실 때까지 우리도 진지하게 고개 끄덕이며 들어드렸습니다. 영어 실력이 짧아 충분한 응대는 못 했지만, 아쉬움이 없도록 시간만큼은 충분히 내어드렸어요. 다음에 내가 사는 곳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열정적으로 자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바쁘게 움직일 필요 없이 여유를 갖고 여행하라며, 미하스는 그렇게 처음부터 우리의 걸음에 쉼표를 찍어줬습니다.
미하스의 명물 나귀 택시 관광객 가족이 나귀 택시를 타고 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 박성경
미하스의 명물 나귀 택시 비수기 1월이라 '주차'되어 있는 나귀들이 많다. ⓒ 박성경
여행자가 거의 없는 1월이라 그런지 미하스의 명물 나귀 택시도 한두 대만 운행을 할 뿐, '주차'돼 있는 나귀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나귀를 멋지게 잡아타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배낭 여행자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네요. 우리 부부는 걸어서 골목골목 돌아다니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며 바위를 파서 지은 비르헨 데 라 페냐(Virgen de la Pena)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마을의 수호 성녀가 모셔져 있다는 설명을 책에서 봤는데, 처음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예배소 제단 위에 모셔져 있는 바비 인형 같은 여인이 수호 성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거지요. 우리는 이후에 스페인을 한참 더 여행하면서 알았습니다. 그런 인형 같은 성인 조각상과 과도한 표정들이 스페인 바로크의 극한 감정을 보여주는 표현이란 걸요. 성당 안 바위 홈에는 간절한 기도 쪽지들이 곳곳에 꽂혀있었습니다. 독특한 바위 성당에서 올리는 기도는 더 잘 이뤄지는가 싶어 우리 부부도 잠시 마음 속 기도문을 써봤네요.
비르헨 데 라 페냐(Virgen de la Pena) 성당 바위를 파서 만든 성당인데, 바비인형 같은 수호성녀상이 독특하다. ⓒ 박성경
성당을 나서니 허름한 기타를 든 거리 예술가가 비수기에 만난 두 동양인 여행자를 위해 혼신을 다해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너무 미안한 상황. 잠시 서서 감상을 하고 앞에 있는 통에 동전을 넣고 돌아서는데, 그가 "아리가토"라고 인사하는 게 아니겠어요. 순간 기분이 살짝 상하면서 이걸 바로잡아줘야 하나, 아님 본인도 민망할 테니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 하나, 갈등이 일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 사람임을 분명히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면 이후에 다른 한국 사람에게도 똑같이 일본말로 인사하고, 그 한국인도 똑같이 기분이 상하게 될 테니까요.

우리 부부는 비수기라 문을 닫은 미니어처 박물관을 지나 본격적으로 미하스의 하얀 집들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집 주인의 재치가 돋보이는 타일 문패도 예쁘고, 갖가지 화분과 꽃으로 장식한 벽들이 골목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특히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거리 주변은 하얀 골목들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양쪽으로 예쁜 도자기나 가죽 제품, 여러 소품들을 파는 가게가 이어져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마음에 드는 가게들을 들락날락하며 느린 걸음으로 미하스의 골목골목을 즐기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나는 천연 재료로 만든 목욕 용품을 파는 곳에서 지인들 줄 선물을 몇 가지 골랐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차도 한 잔 마셨습니다. 1월에도 반팔이나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날씨 따뜻하고 햇살 좋은 곳이라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 커피 한 잔 마시며 지나는 동네 사람들과 자연스레 눈인사를 나누기에 그만입니다.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하며 눈인사 나누기에 그만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 거리 다양한 소품과 도자기를 파는 희고 예쁜 가게가 늘어서 있다. ⓒ 박성경
노천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지중해와 접한 마을이라 1월에도 햇살이 따스하다. ⓒ 박성경
성수기엔 또 다른 풍경일지 모르지만, 1월 비수기에 여행하기에 미하스는 사실 여유가 너무 넘쳐 지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루를 투자하기엔 별 볼 게 없다, 밋밋하다.' 박물관 미술관에 여러 유적들이 즐비한 스페인의 대도시를 보다가 미하스에 들르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느린 걸음으로 마을을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반나절이면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미하스의 꼭대기 광장에 있는 앙증맞은 투우장을 보고 나면 그 마음이 좀 달라질지도 모르겠어요. 약간 아쉬웠던 부분, 뭔가 모자란다는 느낌이 나도 모르게 번지는 입가의 웃음 뒤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는 그랬거든요.
미하스 투우장 작고 예쁘고 독특해 입장료를 내고서라고 꼭 들어가 볼만 하다. ⓒ 박성경
미하스의 투우장은 사각형 투우장으로 유명합니다. 실제 보면 사각형 보다는 타원형에 가깝지만, 흔히 떠올리는 투우장 모양과 달라 독특합니다. 그런데 투우장 안에 들어서면 모양 때문이 아니라 그 앙증맞은 크기에 먼저 마음을 홀딱 뺏기게 됩니다. 투우가 열려 열기가 넘치는 것도 아니고 건물이 웅장하거나 멋져 환호를 내지를 일도 없지만, 자꾸만 입가로 웃음이 새어나오게 만드는 뭔가가 이 작고 독특한 투우장 안에 있는 것 같았어요.

투우가 열리는 날이면 남녀노소 불문 온 마을 사람들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 한목소리가 되고 한마음이 되어 열정과 흥겨움을 나눴을 자리. 텅 빈 투우장 안에는 그때의 즐거운 기운들이 남아 여행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소소한 웃음들을 만들어내는 듯했습니다. 그냥 자리에 앉아보고 투우장을 걸어보고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그러다 비둘기 한 마리를 만나고. 그게 다였는데, 그러는 내내 우리 얼굴에선 웃음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물론 소들의 사투가 벌어지는 곳이니 폭력적인 모습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겠지만, 우린 그저 눈 앞에 보이는 평온한 풍경만을 기억하기로 합니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의 그런 마음이 또 폭력적인 건 아닌지, 마음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미하스 투우장 독특한 사각형 투우장으로 유명하다. ⓒ 박성경
푸엔히롤라 해변 길이 7km로 스페인에서 가장 긴 해변이라고 한다. ⓒ 박성경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산 중턱에 자리한 하얀 마을, 미하스. 우리는 투우장 앞 공원에 서서 지중해의 바람과 햇살과 푸른 빛깔을 만끽하며 미하스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오전에 올 때처럼 말라가로 돌아가는 길에도 직통 버스는 시간이 맞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푸엔히롤라(Fuengirola)에서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지중해를 휘돌아 뻗은 바닷가를 걷게 됐습니다.

그런데 직통 버스가 없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할까요. 스페인 최대의 길이를 자랑하는 7km의 푸엔히롤라의 해안을 걸으며 우리는 선물처럼 주어진 여유와 평화와 안정과 겨울이라 더 감사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미하스 여정을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태그:#스페인 여행, #미하스, #푸엔히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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