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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없이 이사했다던 스텔라가 전에 살던 건물, 또 다른 펜트하우스 방에 나타났다. 집을 옮긴 것은 맞다. 같은 층 반대편, 대각선 방향에 있는 다른 집으로 바꿨을 뿐이다. 다케우치와 몸을 나눴던 침대와 방을 떠나 자신만의 체취로 꾸며진 새로운 집으로 옮아갔을 뿐이다.

스텔라는 제대로 화장이 됐는지 거울을 바라보며 확인하고는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린다. 고전적이지만 향내는 현재에도 가치 있는 '샤넬 넘버 파이브 퍼퓸'이다. 이내 짙은 남색 선글라스를 쓴 스텔라는 오후 4시쯤 아직 햇볕이 따가운 아카사카 거리로 나선다. 오랜만에 집을 나선 산책이다. 왕궁에서 멀지 않은 전통찻집으로 오타니 쇼헤이 경부를 만나기 위해 가고 있다.

"스텔라, 여기야."

마지막으로 본 지가 1년이 훨씬 넘었어도 스텔라에게 언제나 친절한 오타니는 변치 않았다. 손수 차완을 덥힌다. 초록색 클로렐라 가루 같은 '말차(抹茶)'를 150본 대나무 차선으로 정성스레 우려내서 스텔라에게 내민다.

"어쩐 일이야? 한동안 연락도 없더니…."

스텔라는 말없이 배시시 오타니를 바라본다.

"무슨 일 있어? 왜 한동안 안 하던 짓을 하지?"

오타니는 진심어린 농담을 건넨다.

"……."

스텔라는 말없이 눈물을 떨군다. 오타니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다.

"왜 그래? 정말 무슨 일 있어?"

깨끗하게 날선 듯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스텔라의 눈물을 닦는다.

"예쁜 화장 번지면, 좀 그렇잖아."

더 가벼운 농담만이 스텔라 눈물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오타니는 안다.

"아니에요. 그냥 오타니씨를 만나니 좋기도 하고, 그래서요."

금세 웃지만 마음이 담긴 대답은 일부러 피한다. 어쩌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오스카 와일드 희곡 <살로메(Salome)>로부터 비롯된 갖은 영화나 연극에서 연출되는 '악녀' 모습과도 흡사하다. 살로메가 속셈을 감추고 헤롯왕 앞에서 '일곱 베일의 춤'을 춘 다음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처럼.

오스카 와일드 희곡 <살로메> 이후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서 '살로메'는 '팜므 파탈'로 묘사돼 미모와 함께 욕망, 악녀 이미지로 굳어졌다.
 오스카 와일드 희곡 <살로메> 이후 수많은 연극과 영화에서 '살로메'는 '팜므 파탈'로 묘사돼 미모와 함께 욕망, 악녀 이미지로 굳어졌다.
ⓒ 영화 <살로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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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는 경시청 형사부 소속으로 강행범, 한국으로 치면 강력범 담당이다. 스텔라와 그는 클럽 '라 스트라다'를 열 때부터 알게 됐다. 오타니 경부 관할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스텔라가 오빠처럼 여길 정도로 친하다. 한때 오타니가 술에 취해 스텔라에게 호감을 넘어선 자신의 감정을 얘기하기도 할 만큼 야릇한 관계였다. 스텔라는 만일 오타니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면, 다케우치와 악연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잠시 빠진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한 번 어긋난 인연은 추억일 뿐 현실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 만큼 현명한 스텔라다.

"좀 험한 일이 있었어요."

스텔라는 남 얘기하듯, 담담하지만 세세하게 다케우치로부터 겪은 일을 오타니에게 말해 준다. 오랜 시간 '다케우치 스토리'를 듣고 난 오타니는 잠시 자리를 비운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맨 정신에 하기도, 듣기도 어려운 사건 전말이었기 때문이다. 담배 냄새를 풍기며 오타니는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스텔라,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힘 닿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할게."
 "오타니, 고마워요.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둬야 해요. 그 사람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 핵심 권력층 사람이라고요. 잘못하면 오타니, 당신이 다쳐요."
 "아니.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어떤 일이든 얘기만 해."

그렇게 스텔라는 오타니에게 힘이 돼 준다는 말만 들어도 고맙다며, 나중에 도움을 받을 일 있으면 도와달라며 오타니를 포섭한다. 가장 든든한 우군 하나를 더 얻는다. 스텔라는 남자들 호의를, 혹은 치기 어린 객기를 이끌어낼 정도로 능숙하다.

오타니를 만난 뒤 스텔라는 신주쿠에 있는 미야자와 회장 사무실을 찾는다. 회장, 미키와 함께 K를 수용소에서 빼내올 방법과 다케우치에 관한 일을 상의하기로 해서다. 오타니와 자리가 길어져서 약속시간에 늦었다. 서둘러 걸으면서 스텔라는 생각한다.

'한 남자를 단죄해 파멸의 구렁텅이로 넣기 위해, 또 다른 남자를 간절히 구명해 사지에서 살려내기 위해 오늘 만남이 이뤄지는구나.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게 인생이고 살아가는 삶이지만….'

이미 미키와 미야자와 회장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좀 늦었네요. 회장님. 미키씨, 요즘 건강은 어때요?"
 "네, 괜찮아요. 아기도 잘 자라고 있고요."

"그나저나 아빠가 빨리 아기 발차기를 느껴봐야 하는데, 안타깝네요."

스텔라는 약간 질투어린 말과 진심어린 말로 받는다.

"스텔라, 우리가 얘기한 거 진행하기로 했어. 일단 스텔라가 미키씨에게 자세한 계획을 설명해 줘. 나는 지금 나가봐야 하니까."

미야자와 회장이 먼저 자리를 뜬다. 민주당 야마구치 곤다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잠시 어색한 적막을 먼저 깬 이는 스텔라였다.

"마음의 준비는 하셨어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위험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이가 먼저 빠져나오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금된 그이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미키는 단호했다. 어떤 위험이나 상황이 초래된다고 해도 일단 K를 꺼내오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판단이다. 그도 그럴 것이 K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자체도 오하라 검사가 귀띔해줘서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도 카페지기 김윤아와 사회과 리에 선생이 오쿠보 거리에서 사람 찾기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토 기자님, 그리고 이거…."

K 탈출계획을 알려준 다음 스텔라는 미키에게 사진과 UBS파일이 든 서류봉투를 전한다.

"이게 뭐죠?"

미키는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면서 묻는다. 하지만 답은 사진 안에 모두 있다. 알몸에 일그러진 다케우치 표정이 담긴, 스텔라를 범하는 사진이다.

"언론 쪽에 흘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괜찮겠어요? 얼굴이 너무 또렷하게 나왔는데…."
"이토 기자님, 기자님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 빼내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마음을 먹었죠? 저도 마찬가집니다. 다케우치를 압박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스텔라 표정이 착잡하다. 같은 여자지만 미키는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며, 그를 되찾기 위해 굳은 결심을 보인다. 반면 자신은 한 남자를 저주 내지는 증오하면서 그를 해코지하기 위해 창피한 것도 무릅쓴다. 스텔라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일은 윤리적인 관점과 별로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다만 다케우치가 스텔라에 대해 집중하지 않고, 배려도 적을 뿐 아니라 이제 폭력까지 쓴 것에 대한 응징 차원의 것일 수 있다. 전적으로 스텔라 감정 흐름에 따른, 지극히 개인적인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텔라는 미키가 마냥 부럽기만 하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두 개 작전이 시작됐다. 하나는 사람을 죽이는, 다른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D-day는 11월 3일로 잡았습니다. 문화의 날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문화를 향상시킨다는 날입니다. 전후 헌법에 명시된 뜻 있는 날이죠. 그전에는 '메이지(明治)' 천황 생일이기도 했고요. 메이지유신이나 문화의 날이나 요즘 같이 어두운 일본을 다시 밝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날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공휴일이라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편하고요."

전일본공동체본부 도쿄지부장 김원택의 설명이다. 미야자와 회장, 민주당 야마구치 곤다 의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엔도 아키라 전일공동체본부 명예본부장은 눈을 감고 듣고만 있다가 얘기를 꺼낸다.

"재미있네요. 혹시 '11월 3일 오후의 일[十一月三日午後の事]'이라는 단편소설 아세요?"
"예전에 제목은 들어본 것 같네만, 왜?"

친구 야마구치 의원이 되묻는다.

"아주 오래된 소설이지. 거의 100년 쯤 쓰였어. 당시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현실에 대해 비판을 한 이야기야. 행군에 지쳐 쓰러진 군인들을 보고 이처럼 군국주의로 가는 길에 대해 '모든 것은 아주 무모한 소치에서 오는 것이다'라고 꼬집어. 시가 나오야라는 작가가 썼는데, 소설이 나왔을 때 주류 군국주의 찬성파 비평가들이 졸작이라고 비판했었지. 신기하게도 소설 제목인 날짜가 11월 3일 거사일하고 같아서 재미있다는 거야."

역시 젊은 날 문학도답게 엔도 본부장이 짚어준다.

"거사일에 앞서서 11월 1일부터 학생운동단체 '실즈(SEALD's, 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가 전국적으로 바람을 잡을 계획입니다. 아무래도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게 만들려면 바람을 일으켜야 하니까요. 파워블로거 '태풍의 눈', 본명 가와사키 슈이치가 전면에 나서기로 돼 있고요."

김원택이 보고하자 야마구치 의원이 의회 쪽 상황을 전해 준다.

"10월 중순에 열릴 중의원에서 실종자 백서가 공개될 것입니다. 여당 측이 벌써부터 냄새를 맡고 백서 공개를 막기 위해 압박이 심합니다. 더 이상 끌다가는 그놈의 국가안전보장법으로 다 잡아갈 기세입니다. 그전에 발표를 해버려야 극우 보수들 전횡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는 얘기죠. 일단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에 알리고, 회기 중 필리버스터를 통해서라도 불법적으로 감금돼 있는 사람들 추정 인원과 전국에 퍼져 있는 5개 강제수용소 실체를 폭로할 계획입니다."

"둘 다 심혈을 기울여서 진행시켜야 합니다. 현재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만에 하나 기자회견 내용이 보도통제 된다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현재 중의원 본회의는 각종 매체로 생중계 되고 있으니, 기자회견은 기자회견대로 강행하고, 본회의 중에는 각 의원별로 역할을 나눠서 필리버스터 형식으로 물고 늘어져야 됩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미야자와 회장이 연륜과 경험에서 비롯된 조언을 한다. 1939년 프랭크 카프라 감독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에서 상원의원이 임기 중 사망하자 지역 정치인들은 주지사를 꼬드겨 소년단 대장 출인 얼치기 정치인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를 지명한다.

1939년 프랭크 카프라 감독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서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는 자신의 결백과 댐 건설 부당성을 알리려 23시간 넘게 필리버스터를 벌인다. 필리버스터는 예나 지금이나 의회 소수자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권리다.
 1939년 프랭크 카프라 감독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서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는 자신의 결백과 댐 건설 부당성을 알리려 23시간 넘게 필리버스터를 벌인다. 필리버스터는 예나 지금이나 의회 소수자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권리다.
ⓒ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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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쥐락펴락해가며, 큰 이권이 걸려있는 댐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허수아비로 내세운 스미스가 자신이 낸 어린이 캠프 설립 법안을 통과시켜 환경 훼손 우려가 있는 댐 건설을 막으려 한다. 지역 정치인들은 그런 스미스에게 댐 건설 지역 내에 땅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초짜 정치인 스미스는 언론의 비아냥에 크게 실망하며, 낙향하려 한다. 하지만 베테랑 여비서 클라리사 손더스(진 아서)의 설득에 따라 23시간 넘는 필리버스터를 벌인다. 진실을 알리려는 스미스 노력이 지역 명망가들 흑색선전에 의해 물거품이 되려던 순간, 지역 동료 상원의원은 마음을 바꿔 음모를 폭로한다. 결국 정의로운 스미스는 승리한다. 미야자와 회장은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서 필리버스터라는 의회 소수자들 권리를 환기시킨 것이다.


태그:#살로메, #오스카 와일드,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필리버스터, #제임스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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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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