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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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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시간만 자습하지 말입니다."
"청소시간 5분만 일찍 끝내주시지 말입니다."

요즘 학교에서도 '~말입니다'는 뜨는 유행어다. 태어나 처음 들어본 낯선 표현일 텐데도 아이들의 말투에는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학교 안팎에서 바르고 고운 말을 쓰자는 캠페인을 수년째 벌여도 콧방귀만 뀌더니만, 한 드라마 주인공의 말투를 흉내 내느라 여념이 없다. 반짝 유행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시들 테지만, 그런 아이들을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작년 영화 <국제시장>에 이어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성은'을 입으며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관을 확립하는 데에 교육적 효과가 있다"며 찬사를 보냈고, 드라마 속 군복 입은 배우는 일약 '애국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말입니다'라는 어이없는 군대식 말투가 아이들에게까지 스스럼없이 회자되는 데에는 꽃미남 배우의 연기에다 대통령의 칭찬까지 더해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입대 후 훈련소에서 군대식 말투가 입에 붙지 않아 무던히도 고생했다. 이른바 사제 말 '요'자 한 번에 열 대씩 두들겨 맞곤 했다. 한번은 주눅이 든 채 아무 때나 '~말입니다'를 붙이는 동기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피식 웃었다가 치약 뚜껑을 머리에 대고 '원산폭격'을 당했던 기억도 있다. 25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추억'이 됐지만, 그땐 정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이었고 어이없는 고통이었다.

이름 하여 '다나까'체. 오로지 대한민국 군대에만 존재하는 언어 문법이다.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관습일 뿐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작동하던 무소불위의 규율이었다. 자대 배치 후 이등병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담아야 할 게 선임들의 이름과 내무반 내 서열이었다면, 맨 먼저 입으로 익혀야 할 게 바로 '~말입니다'였다. 신병들이 지녀야 할 '군기의 표상'이었다고나 할까.

바짝 군기가 든 신병들은 모든 문장이 '~말입니다'로 끝났다. "훈련을 가야합니다"가 아니라 "훈련을 가야지 말입니다"였고, "밥을 먹었습니다"는 "밥을 먹었지 말입니다"였다. 어법과 문맥을 따져 묻는 건 있을 수 없었고, 마치 본능처럼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군 생활 하는 동안 누구 하나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시나브로 입에 뱄다. 외려 외출이나 휴가 때 듣게 되는 민간인들의 말투가 귀에 거슬릴 정도였다.

그렇듯 30개월 동안 길들여진 '다나까'체를 제대 후 입에서 떨쳐내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군기의 표상'은 복학생의 판별 기준이 되어 후배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수업 중이나 길을 가다가 이름이 불릴 때 '네'라는 짧은 대답 대신 이따금 관등성명이 튀어나올 때조차 있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듣자니까 조롱거리였던 군대 말투가 요즘 들어서 남자다움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니, 참 얄궂기도 하다. TV 드라마 한 편이 바꾼 풍경이다.

장래희망이 '군인'? TV가 변화시킨 아이들 

아이들은 말투에서 그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장래희망에 군인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한때 군인은 '신랑감 2위'라며 비아냥거리던 때가 엊그젠데, 버젓이 직업으로서 근사해 보인다며 선호하고 있는 거다. 꽤나 오래된 유머지만, '신랑감 1위'는 바로 민간인이다. 과거 가뭄에 콩 나듯 군인이 되겠다는 아이는 대개 직업 안정성을 이유로 들었지만, 요즘 들어 '멋있다'는 이유가 하나 덧붙여졌다.

여전히 의사나 공무원, 교사를 선호하는 비율이 높긴 하지만, 얼마 전부터 방송계의 대세로 자리 잡은 '먹방'의 힘으로 요리사 붐이 불었고 이제 그 불이 군인으로까지 옮겨 붙은 것이다. 벌써부터 학교에선 사관학교나 대학의 ROTC 경쟁률이 높아지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오갈 정도다. 제복을 입고 학교 홍보 차 모교를 찾아오는 선배 사관생도들의 어깨가 으쓱해질 판이다.

학교마다 강조되는 진로탐색 교육과정이 무색할 지경이다. 진로에 관한 흥미 적성 검사나 각종 성격 검사도 TV의 영향력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 같다. 아무리 조변석개하는 게 아이들의 꿈이라지만, 장래희망이 TV 드라마를 따라 춤추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학교를 대신해 진로탐색 교육을 시켜준 셈이니 작가와 배우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뿐 아니다. 외국이라곤 기껏해야 미국, 중국, 일본 등이 전부라 열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하는 아이들의 입에서 언제부턴가 아이슬란드와 나미비아, 가나 등 생소한 나라의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 위치가 어딘지, 인구는 얼마이고 경제 규모는 어떤지, 심지어 찾아가는 항공편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 나라들은 몇몇 TV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곳들이다.

역사나 지리 수업시간에 사회과부도를 펴놓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딴청을 피우거나 하품만 하던 아이들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교육 효과로만 따진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관련 예능 프로그램을 녹화해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닌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 호기심이 생겨 값비싼 지구본을 구입했다는 아이도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교사들은 수능과 직접적으로 연계돼 있는 EBS와 인터넷 강의에 이미 수업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다. 이러한 현실에서 다양한 소재를 다룬 TV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몰이는, 의도한 바는 아닐지라도, 기존의 학교교육을 빠른 속도로 형해화시키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에 반영되는 학교 시험 등이 없다면 과연 교실이 무사할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수업시간 아예 엎드려 자고 있는 한 아이를 부러 깨웠더니, 피곤해서라기보다 수업이 지루해서 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옛 선현들은 배우고 익히는 일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라 설파했건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공자 왈 맹자 왈'일 뿐이다. 재미없는 수업에 잠으로 '보답'하는 셈이라고 대꾸하면서, 예능 프로그램처럼 재미있는 수업을 만들어달라고 덧붙였다. 그의 되바라진 넉살에 불쾌하거나 서운하기보단 그냥 슬펐다.

최고의 교사는 유재석과 강호동?

아이들이 바라는 최고의 교사상은 '유재석'과 '강호동'이다. 몇몇 아이들은 걸그룹이 와서 가르친다면 그 어려운 수학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교사는 아이들이 선망하는 안정적인 직업일 뿐, 더 이상 아이들의 롤 모델이 아니다. 교사의 훈화에 감동을 받고 깨우침을 얻는 아이는 드라마에서라면 모를까 현실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요즘 아이들은 '잘 가르치는' 교사보다 '연예인 같은' 교사를 선호한다. 경륜 있는 베테랑 교사보다 젊고 유머러스한 교사를 담임으로 만나기를 바란다. 이에 발맞추려는 듯 교사들도 새로운 교과 지식과 교수법에 대해 배우기보다 외모 가꾸기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는 씁쓸한 이야기마저 들린다. 그렇듯 교사로서의 자존감은 TV 프로그램 앞에서 위태롭게 떨고 있다.

아이들은 더 이상 학교를 통해 지식을 쌓고 사회성을 기르며 세상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학교에 남는 건 '탁아'의 기능뿐이다. 흔히들 온존한 학벌구조 속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거쳐 가는 과정일 뿐, 학교는 아이들에게 그 어떤 의미도 던져주지 못한다며 통탄하곤 한다. 그러나 그마저 없다면 '탁아'조차 힘들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자괴감마저 든다. TV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경험하는 아이들에게 과연 학교가 필요하기는 할까.


태그:#태양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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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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