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3월의 한가운데인데도 나는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한 개구리처럼 지난 겨울의 그림자에 갇혀 운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가슴 속에 잔영처럼 남은 겨울의 흔적들이 그리움이 되어 나풀거립니다. 이제는 지워도 좋을 아픈 기억들마저 산기슭에 남은 잔설처럼 또렷한 부표가 되어 떠오릅니다.

점심시간에 잠깐 들렀던 청사 주변의 공원에서는 어느덧 매화와 산수유가 가쁜 호흡으로 수줍게 꽃잎을 틔우며 아련한 겨울의 잔해를 밀쳐내고 있습니다. 건조하고 까칠하던 숲도 긴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켜며, 아직은 차가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바람을 끌어안고 날숨과 들숨을 깊게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영철 그림 '이만큼 너를 사랑해' 노란 꽃술을 품고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이 마음을 평화롭힌다.
▲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영철 그림 '이만큼 너를 사랑해' 노란 꽃술을 품고 흐드러지게 핀 망초꽃이 마음을 평화롭힌다.
ⓒ 임경욱

관련사진보기

계절의 변화도 감지하지 못한 채 나침반의 자침처럼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내게 힘들면 멈춰서 쉬었다 가라는 당신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살이의 신산함이 나를 한곳에 멈춰있게 하질 않습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일상과  일상 속에 펼쳐진 잡다한 일들도 일들이지만,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사는 일이 이 나이에도 버겁습니다.

워커홀릭에 빠져 능력 밖의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밤낮 없이 몸부림치다 보니 몸 속 이것저것이 망가지고 마음은 피폐해 갑니다.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아이들 가르치고 도시의 빈한한 살림을 꾸려가는 것도 서러운데 국가는 공복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시도 때도 없이 옥죕니다.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허망하여 심신이 지쳐있을 때 당신은 내게 다가와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잠언과도 같은 말을 들려주더이다.

우리 잠시 멈춰보자고, 과거를 반추하거나 불안한 미래를 상상하는 마음을 현재에 잠시 정지해놓고 숨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그렇게 항상 급하게 어디론가 가다보면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고, 잠시 마음을 현재에 두고 쉬다 보면 내 안팎의 모습이 드러나니, 우리 함께 조용히 바라보자고.

당신의 말을 듣고 조용히 정좌한 채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지금 내가 바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바쁜 것인가. 내가 이렇게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좇아 이렇게 안달하는가. 결국은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쉬면 세상이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합니다. 주변과 세상을 탓하기 전에 멈춰서 내 마음의 렌즈에 낀 먼지를 닦아내고 그 안에 세상을 투영해 보니 비로소 안절부절 못하는 내 마음이 보입니다.

당신의 말마따나 이제부터 내게 좀 더 솔직해져 보려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세상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이 아닌 내 안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정말로 행복한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눈먼 올빼미처럼 의식 없이 찾아 헤맸던 미망과 허상을 씻어내고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온전히 내 안의 나를 살아내려 합니다.

노란 꽃술을 안고 하얗게 흐드러진 망초꽃 무더기에 담겨진 당신의 주옥같은 메시지는 황량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소시민들에게 청량제이자 감로수가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닦아 얻은 소소하지만 가슴 깊숙이 와 닿는 진리를 탁마하는 당신 같은 이가 있어 세상은 살맛나고 다시 용기를 얻어 살고 싶고,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삶은 무언가를 많이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편안한 멈춤 속에서 느끼며 깨닫는 것이라는 당신이 말이 사뭇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봄에는 계절의 한가운데에 나를 담그고 꽃이 피고 지는 소박한 아름다움과 계절이 변해가는 잔잔한 평화를 마음껏 느껴보겠습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내 마음 다시보기, 개정판

혜민 지음, 이영철 그림, 수오서재(2017)


태그:#혜민, #망초꽃, #멈춤, #이영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