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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09년 7월 6일 전남 황전면에서 일어난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검찰은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로 어머니를 죽인 범인으로 남편과 딸을 지목했다. 그 후 부녀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고, 각각 무기징역과 실형 2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부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검찰 수사 결과를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독자 대다수와 인연이 없는 이 부녀의 인생살이를 이 연재물에 담았다... -기자 말



(15화 : 살인계획 떠올리며 게임한 딸 편에서 이어집니다)



7월 4일 토요일 아침이 됐다. 백희정이 일어났을 때는 아버지 백경환씨는 곡성으로 일을 떠난 후였을 것이다. 어머니 최명숙씨에게는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막내딸과 세 살짜리 외손자에게 아침밥을 차려줬다.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외손자에게 건넸다. 백희정은 오전에 조카와 놀았다.



오후가 됐다.



백희정은 인터넷 채팅으로 부산에 사는 어느 남자와 약속을 잡는다. 부산 남자는 백희정에게 '부산으로 올 수 없느냐'고 물었고 백희정은 '차비 2만 원을 통장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이제부터 검찰의 주장을 들어보자. 백희정은 폰뱅킹을 확인하고 나서 옥상에 올라가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고 한다.
검찰이 밝힌 7월 4일 상황
 검찰이 밝힌 7월 4일 상황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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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희정은 7월 4일 오후 8시경 면장갑과 일회용 플라스틱 수저, 막걸리, 청산가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면장갑을 양손에 끼고 캄캄한 옥상에서 막걸리에 청산가리를 탔다. 어두운 데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막걸리를 흔들어댔다.



백희정은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를 포함해 총 2병을 부엌 냉장고 채소 칸에 비스듬히 눕혀서 넣었다. 이 막걸리는 앞으로 이틀 동안 이 상태로 냉장고 안에 있었을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백희정은 당시 "아빠는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백희정은 안방에서 잠을 자던 백경환에게 "막걸리를 넣어놨다"고 말했다. 백경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희정은 부산으로 떠났다. 백희정이 부산 남자를 만난 때는 7월 5일 오전 1시 30분경이라고 한다.



검찰 주장대로라면 백희정은 옥상에서 처음으로 청산가리를 보았다. 백희정은 청산가리가 "흰색 분말이 깨알만 한 동그란 알갱이로 만들어졌다"고 표현했다. 이를 두고 검찰은 '백희정이 청산가리를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백희정이 표현한 청산가리 모양은 진술의 임의성을 뒷받침한다고 했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검찰 주장에 문제점이 있다.



바로 백희정이 자백한 2009년 8월 25일은 벌써 사건이 발생한 지 50일이 훨씬 지난 후였다.



그 50일 사이에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8월 1일 내보낸 '두 마을의 끝없는 공포-청산가리 살해 미스터리' 프로그램에서도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타는 재연 장면이 나온다. 이 방송에 나온 청산가리가 '흰색 분말'이었다.



막내딸의 '청산가리' 묘사, 결정적 증언이라기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캡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캡쳐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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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8월 20일과 24일 사이에 경찰 부탁으로 이모는 백희정과 함께 이웃집 아주머니를 찾아가 청산가리에 관해 들었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건 이후 유가족 중에는 '청산가리'가 궁금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는 이도 있었다. 이처럼 백희정이 한 진술은 이미 오염 가능성이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청산가리를 검색하는 유가족
 사건 발생 후 청산가리를 검색하는 유가족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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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백희정을 '치밀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백희정이 책을 자주 보고 이야기를 연구했으며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를 즐겨보는 것도 근거로 내세웠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캡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캡쳐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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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백희정이 부산으로 떠난 이유가 알리바이 조작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같은 해에 일어났던 보령 청산가리 독극물 사건 예를 들었다. 2009년 4월에 일어난 보령 청산가리 사건은 죽은 정씨 할머니 남편이 범인이었다.



남편은 부인이 쓰려졌다며 112에 신고했는데, 신고 시점이 4월 29일 밤 11시 39분이었다. 남편은 외출했다가 밤늦게 돌아와 보니 부인이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남편에게 그 사이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남편은 알 낳는 닭을 구경했고 개와 장난치다가 왔다고 진술했다. 형사는 4월 29일 밤은 쌀쌀했다고 기억했다. 그런 날씨에 73세 노인이 3시간 반 동안, 개와 놀았다는 게 경찰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됐다고 했다.



검찰은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 보여준 백희정씨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7월 4일 부산으로 간 이유가 데이트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부산 남자는 백희정을 숙소로 데려갔다. 그는 "숙소에서 옷을 벗겼더니 팬티가 남루하고 생리를 하고 있어 (성관계를) 그만뒀다"고 했다.



검찰은 26세 젊은 여성이 남루한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게 증거라고 했다. 젊은 여성이면 남자를 만날 때 속옷도 신경써서 입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속옷에 신경쓰지 않았던 걸 보면, 부산 방문은 데이트가 아니라 알리바이 조작'이라고 본 셈이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변호인은 백희정이 치밀한 편이라는 검찰 주장에 반박했다. 백희정은 사건 발생 전까지 마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변호인은 백희정이 읽은 책이 있었다면 검찰이 증거로 제출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다못해 백희정이 작성한 도서관 대출목록이라도 제출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희정은 마을 도서관 컴퓨터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수사 과정에서 백희정이 한 인터넷 채팅 내용이 밝혀졌을 때 가족과 주변 사람이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백희정씨가 채팅으로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밥집 사장 김미순씨도 당시 충격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건 전 백희정이 '오빠 만나러 다녀왔다'고 말할 때마다 김미순씨는 '만났다는 오빠'를 '모두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고 했다. 김씨는 인터넷 채팅으로 백희정이 남자를 만나는 것이 상상이 안 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희정이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희정은 세수하거나 머리 감는 것을 귀찮아 했다. 김밥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여름철에 백희정의 냄새에 못 견뎌서 가게 뒤편 수돗가에 샴푸를 갖다 놓기도 하고, 속옷을 사서 백희정에게 갈아입으라고 성화를 냈던 적도 있었다.



김미순씨는 백희정을 자기가 목욕시킨 것이 여러 번이라며 백희정을 만나는 남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채팅하는 남자들 또한 여성을 만나보기 전까지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7월 4일 백희정은 검찰 주장처럼 오후 8시경 집 옥상에서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탔던 것일까? 그런데 이 사건 1심 10회 공판에서 백희정은 검찰 공소사실을 모두 뒤집을 수 있는 증언을 한다.



부산으로 '채팅남' 만나러 갔다는 용의자


 
검찰 공소장과는 다른 백희정 증언
 검찰 공소장과는 다른 백희정 증언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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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문  : 피고인(백희정)이 폰뱅킹을 한 시간대에 비추어 청산가리를 막걸리에 희석한 시간은 2009.7.4.19:30경에서 20:00경 사이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백희정 답 : 아닙니다. 저는 그 시간대에 버스 안에 있었고, 버스 안에서 계속 전화를 하면서 갔는데, 버스 안에 있는 CCTV에 찍혔을 것입니다.



즉 백희정이 검찰에서는 "구례역에서 출발했고, 오후 8시 45분에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갔다"고 진술했지만, 법정에서는 "구례역에서 출발했고, 오후 7시 20분에 버스를 타고 갔다"고 증언한 것이다. 만약 백희정의 법정 진술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공소사실'은 무너지게 돼 있다.


 
순천행 버스 구례구역 출발 시간표
 순천행 버스 구례구역 출발 시간표
ⓒ 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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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발생 후 경찰은 백경환만 의심한 게 아니었다. 막내딸 백희정 역시 유력한 용의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경찰이 드라마 CSI처럼 현장 증거를 분석해 백희정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형사는 사건 현장에서 어떤 '감'을 따라 스토리를 연상한다. 이후 나오는 증거를 보고 감으로 연상한 스토리를 확인하게 된다. 이 과정이 일반적인 강력 사건 수사 방법이다.



백경환을 용의자로 보는 형사는 7월 3일 백씨가 일하다 점심때를 틈타 순천에서 막걸리를 사 올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하지만 곡성 일터에는 당시 백경환씨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목격자가 10명이 넘었다.



이렇게 막히면 형사는 다른 스토리를 연상했다. 백희정을 용의자로 넣은 '감'은 어떻게 나왔을까. 한 형사는 '둘째 언니 진술에서 감이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둘째 언니가 진술한 내용은 뭐였을까.


 
사건 당일 보인 태연한 백희정 태도
 사건 당일 보인 태연한 백희정 태도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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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집에 오면 엄마와 희정이가 여러 번 다퉜거든요. 서로 악을 쓰면서 싸웁니다. 그러면 옆에서 제가 희정이를 혼냅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에 제가 희정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해서 엄마가 막걸리를 마시고 돌아가셨다고 구례병원으로 막내조카 데리고 가보라고 하니까, 희정이가 자고 일어난 목소리로 알았다고 했고 제가 조금 후에 전화를 하니까,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009.7.23. 2회 진술조서)



게다가 둘째 언니는 사건 전날, 길목에서 마주친 동생이 '어떤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형사들은 그 가방에 막걸리가 들었던 게 아닌지 의심했다. 


 
백희정 둘째 언니 진술
 백희정 둘째 언니 진술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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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형사들은 백희정씨의 당시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만약 백희정씨가 버스를 타거나 편의점에 들렀다면 형사는 해당 장소에 설치된 CCTV를 모두 확인했다. 한 형사는 '백희정이 채팅에서 만난 남자를 부추겨 엄마를 죽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고 했다.



형사들은 백희정이 만난 '채팅남'을 찾으러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렇다면, 검찰로 송치한 경찰 수사기록에 '7월 4일 백희정이 탔던 버스 CCTV'에 대한 보고는 없던 것일까?



하지만 검찰은 백희정씨의 주장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제17화 – 나흘간의 기억 중 '넷째 날' 재구성 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나흘간의 기억 , #서형 , #검찰 , #구겨진 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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