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표지 홍순한 네트워킹. 공갈만 그림
▲ 표지 홍순한 네트워킹. 공갈만 그림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7화 "민주노동당 출신의 농협 조합장 당선, 이 '묘안' 덕분"에서 이어집니다)

전라도 장흥 남포갯벌은 자연산 굴로 유명하다. 아침이면 굴을 채취하고자 장비를 챙겨 바지선을 타고 남포 갯벌로 향하는 아낙네로 붐빈다. 바닷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면 본격적인 굴 따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갯벌에 발이 빠지고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험한 날씨를 감내해야 한다.

황 대표는 몇 해 전 겨울 남포갯벌을 찾았다. 매서운 칼바람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한구석에 앉아 바닷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황 대표는 할머니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추운데 뭐하러 나오셨어요! 이걸 해서 얼마나 번다고."
"난 이거밖에 없승게."


이곳 어머니들은 굴을 캐서 자식을 먹이고 입혔다. 굴을 따고 까서 그 알맹이를 추려내는 작업은 지난하다. 장성한 자식들은 고향을 떠나 각자 자기 앞가림을 하며 살 것이다. 어느덧 어머니는 노인이 됐다. 그 할머니가 지금 자식을 위하는 방법은 이렇게 굴을 보내주는 일이다. 아득한 시절부터 어머니들은 그랬다.

남포갯벌 아낙네 황풍년 강의. 공갈만 그림
▲ 남포갯벌 아낙네 황풍년 강의. 공갈만 그림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황풍년 대표는 지금 사는 사람이 자존감을 세우려면 그런 어머니들 이름과 삶을 기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억의 중요성을 영화 <더 기버-기억전달자>에 나오는 기억전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기억들은 과거로 치부할 게 아니라 미래를 결정짓지."
"과거 기억을 이용해 현재를 조언하는 거야. 모든 게 연결되어 균형을 이루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는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한다. '늘 같은 상태'로 기억을 통일했기 때문이다. 서로 사는 공간과 환경이 다른데 같은 기억만 존재한다는 것은 기억이 지워지고 조작됐다는 뜻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선, 그렇게 빼앗겼던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 흑백이었던 배경이 모두 천연색으로 바뀐다.

사람에게 없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나는 스스로 기억전달자가 되기로 했다. 경남 진주시 명석면에 살았던 홍순한(1921-2000년초)씨 인생을 그 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하나뿐인 면 단위 역사서 <명석면사> 덕이다. <명석명사> 근현대사 편을 보면 이 지역에서 좌익운동을 했던 홍순한씨를 비중 있게 다룬다. <진주신문> 기자였던 김경현씨가 1998년 취재와 집필을 맡아 완성했다.

명석면사 명석면사 2장에 비중있게 다루는 홍순한 씨 삶
▲ 명석면사 명석면사 2장에 비중있게 다루는 홍순한 씨 삶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 좌익운동'을 흔히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저항운동이라 일컫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를 할 것이다. 이는 1917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됐다. '사람 사이의 평등'과 '외세에 대한 해방'은 조선인들을 사로잡았고, 1920년대는 지역 곳곳에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이 생겨났다.

바로 이 시점인 1921년 홍순한은 진주군 명석면 계원리 홍지동에서 태어났다. 명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942년 일본 대판공과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42년 조선인 고학생 비밀결사이던 '통나무회'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학을 중퇴하고 1945년 9월 일본 도근현 재일본조선인연맹 사회부장을 지내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공부하던 자본주의 관련 일본어 책에는 '자본주의 모순이 뭘까?'라는 낙서가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홍순한 청년 시절 자본주의 모순을 고민하는 홍순한
▲ 홍순한 청년 시절 자본주의 모순을 고민하는 홍순한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1946년 귀국 후, 명석면 홍지동 애향청년회를 조직했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결성된 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로 전환됐다. 나름 해방 공간에서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되는 등 혁명적 분위기를 낳았다. 그러나 해방 후 미 군정 통치가 시작됐고, 행정과 치안에 친일파를 재등용했다.

그러자 그해 10월 미 군정에 반대하는 인민항쟁이 전국 곳곳에 터지기 시작했다. 홍순한씨는 명석면에 있는 경찰서를 습격했고 이로 인해 진주형무소에서 1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후에는 명석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듬해 6월 5일부터는 좌익 세력에게 전향 기회를 준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찰을 시켜 좌익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키도록 했다. 당시 각 지역에 인원을 할당하여 좌익이 아닌 사람까지 강제적으로 가입시키는 분위기였지만 경찰은 홍순한씨를 보도연맹 가입대상에서 제외했다. 홍순한씨도 '경찰에게 뻔한 반공 교육을 받기 싫다'며 가입을 거절했지만 경찰도 홍씨를 가입시켜봤자 전향할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 오히려 반공교육을 받고 전향해야 할 보도연맹회원을 다시 좌익 쪽으로 전향시킬 사람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여름 난리'로 불리는 전쟁이 터졌다. 국군과 경찰은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며 전국 각지 국민보도연맹 회원들을 소집시켜 어디론가 데려가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북한 인민군은 물밀 듯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인민군과 북한 노동당은 각 지역에서 다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우익인사들에 대한 숙청을 자행했다. 진양군 16개 면 중 하나인 명석면 또한 1950년 8월에 인민군이 점령한다. 이 지역 또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했고 명석면 행정권과 치안권을 행사할 새로운 면서기장으로 홍순한씨를 추대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고, 다시 국군이 반격하면서 빨치산을 모두 정리하려는 작전을 펼쳤다. 당시 국군 시각에서 홍순한씨는 부역자였고 총살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순한씨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홍순한씨가 마을을 너무나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대신 홍순한씨는 도민증을 빼앗기고 거주지가 제한됐다.

그 후 3.15부정선거는 4·19혁명을 낳았고, 자유당 몰락과 함께 반공 정권에서 통제를 받던 좌익 세력도 한층 너그러워진 사회 분위기를 타고 선거에 출마를 하였다. 홍순한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홍순한씨는 5.16이 터지면서 공민권이 박탈됐다. 요시찰 인물로 거주지가 제한됐다. 2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사면장을 받은 후에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홍순한 사면장 홍순한 사면장 내용
▲ 홍순한 사면장 홍순한 사면장 내용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홍순한은 사면되자, 바로 지역 사업에 착수했다. 어릴 적 일본 학교에서 배운 측량기술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근처 하천공사에 나선 것이다.

홍순한씨의 아들은 아버지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60대 중반인 큰아들(52년생)에게 없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전해주기로 했다. 이 기억은 아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우선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시점으로 정리한 것이다.

1. 출생 전

우리 아버지 삶에 대해서 전체적으로는 모르지만 단편적인 이야기는 순간순간 들었지요. 집에는 일본 책이 많았어요. 책 속에 일본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본 적도 있고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해방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소위 좋은데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 말하는 '좌파 물'이 들어서 고생 많이 했지요.

한국전쟁 전에 사람들 불러 들어서 오라 할 때 가면 총살시켰다 아입니까.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보도연맹 가지 말라 했는데, 아버지 말 들은 사람은 살았고. '오라 캐라' 해서 간 사람은 죽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좌익들 다 죽일 때인데 외가 시골집 보면 지붕 아래 비었거든요. 아버지는 경찰이 잡으러 올까 봐 천장 위에서 약 3년간 살았대요.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용공분자 찍혀서 고생 몇 년 하다가 잡으려고 더는 안 오고. 명예도 회복시켜줬어요. 내는 아버지가 존경스러운 것이 어쨌든 간에 시대를 살다 보면 그 당시 좌익공산주의 거기에 물든 사람은 거기가 좋으면 지리산 골짝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가는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계속 빠져서 그런 길로 간 게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와서 생활하셨지요. 1952년에 제가 태어났어요.

2. 출생 후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기억이 많이 나요. 그때 우리 집은 농사짓고 살았는데 아버지는 몇 달씩 나가서 측량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배운 측량기술로 갱남 지적도 도면 그리는 일을 했지요. 아버지는 갱남 안 돌아다닌 데가 없어요. 중학교 방학 때는 제가 아버지 따라다니면서 지적도 도면에 번지를 쓰곤 했지요. 그때 마산도 가보고 거제도 와보고.

부친이 사면장을 받을 때는 제가 객지생활을 했어요. 당시 <경남일보> 신문을 누가 갖다 주더군요. 사면됐다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 후에 아버지는 지역사회 일을 많이 하셨어요. 계원초등학교 앞에 개울이 있는데, 개울이 3개로 분리돼 물이 차면 차도 못 오고 아무것도 못 와요. 비가 오면 사람이 죽기도 해서 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빨갱이 아들' 손가락질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자) 그런 적 한번 없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주시내로 다녔는데, 버스 타고 동네를 수십 개 거쳐 가거든요. 내가 기억하기에는 "누구 아들이냐?" 물어봐서 답하면, 다들 "아 그렇습니까?" 하고.

그런데 ○씨라고 있었어요. 사사건건 부딪혔어요. 부모님은 이야기 안 하는데, 살다 보면 혹시 적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들지요. ○씨 아들은 저보다 한 살 많은데 학교도 같이 다니고, 마주쳐도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서로 인사하지요. 사실 그 아들도 자기 아버지가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르겠지요.

우리 부친은 그 지역에서 가장 똑똑하다 해서, 다들 물어보러 왔어요. 선거에 나가고 싶은 사람도 와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물어봤고, 예전에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될 때도, 평화통일자문회의. 그거 할 사람도 와서 "내가 하면 되겠느냐?" 물어보러 오고, 옛날에는 촌에 차가 안 다녔을 때라 집 앞에 지프 차가 오면 누가 인사하러 온 거죠. 경찰 서장이나 진양군수가 바뀌면 인사하러 왔어요.

홍순한  홍순한에게 자문을 구하는 지역사람들
▲ 홍순한 홍순한에게 자문을 구하는 지역사람들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3. 사회주의와 진주 서부경남 정서의 만남

(부모님 금슬은 어땠는지?) 옛날에는 금슬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사는 거지요. 예전에 어머니가 마루에 아버지 밥상을 갖다 줬는데 밥이 설익어서, 아버지가 조그만 나무 상을 들어서 마당으로 던져버렸어요. 밥상과 그릇이 다 깨졌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밥상을 다시 차려서 갖다 줘야 했어요. 아버지가 일본 유학을 갔다 왔다 해도 유교사상은 안 바뀐 거죠. 내가 고등학교 될 때까지 엄마와 밥상을 같이 안 썼어요. 동네에 부부가 겸상하는 집 없었어요. 아버지와 저만 따로 밥 먹었어요. 나머지는 상 없이 먹었고요.

우리 마누라가 시집을 왔을 때, 동네에 아버지 4형제가 살았다는 거 아입니까. 새 애기가 시집오면 아침마다 큰 백부 둘째 백부 순으로 문안인사를 하거든요. 내가 1월 4일 결혼했으니 한겨울인데. 얼마나 춥겠습니까. 3일간 가니까 큰 백부가 "애야 됐다. 고만 와라" 하니까 그만했지요. 결혼해서 3년까지는 집에 가서 아버지를 보게 되면 마당이면 마당, 바로 그 자리에서 큰절을 해야 해요. 서부경남이 심하지요. 억수로 많이 예의 따지고요. 아버지는 큰아들인 제게는 억수로 엄했는데, 제가 군대 갔다 오니까 어른 대우를 해주더군요 같이 술 한 잔도 하시고.

아버지 환갑잔치를 제가 해 드렸어요. 시골집에서 동네 사람들 다 오게 해서. 아버지는 농사철 외에는 집안에 매이지 않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셨어요. 그 당시 향교, 종친회도 가고, 진주문인들 모임에도 간 모양이에요. 돌아가시기 전에 나 보고 그러더라고. "비석문은 누구누구에게 부탁하면 써줄 것이다"라고.

90년 초에 아래채를 수리하시다가 낙상해서 골반을 다치셨어요. 진주의료원에서 응급조치했는데, 그 후로 10년 있다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아침까지 말씀하시다가 낮 12시쯤 돼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라고 부르면 고개 끄덕끄덕하고.

(부친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묻자) 아버지가 나이가 들었을 때 또래들 모이면 서로 안 된 이야기를 한다 아입니까.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제일 행복하다. 내 앞에 먼저 자식이 죽었나, 마누라가 죽었나. 땅이 없어서 빌어먹으러 가나. 내는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내가 제일 행복하다."

아래는 홍씨 아들에게 <명석면사> 기록을 전해준 것이다.

홍순한 이력 명석면사에 다룬 홍순한 이력
▲ 홍순한 이력 명석면사에 다룬 홍순한 이력
ⓒ 김민정

관련사진보기


- 부친이 4.19 후, 해방공간에서 선거에 출마한 적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버지는 나간 적 없는 걸로 아는데요. 뭘 했습니까? 아버지 정치 이야기 거의 안 하셨는데… (기록을 보여주니까) 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선거운동을 어떻게 하면 이긴다. 이런 말을 해줬구나."

-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조직 활동을 하신 것은 아는지요? 일본 유학생 시절에 통나무회.
"아, 그때부터 했구나."

-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혹시 아세요?
"음…"

- 6.25 시절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면서기장 경력은?
"모르는데… 그런 경력들은 잘 모르는데…"

- 거주지 제한은?
"몇 년 제한됐습니까?"

아들은 <명석면사>에 적힌 아버지 기록을 읽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지금 보니까 이렇게 아버지 스펙이 화려한지도 몰랐지만 이렇게 고생한 지도 몰랐어요." (끝)

덧붙이는 글 | 그간 글을 읽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분들께 감사합니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