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총궐기' 광화문 통하는 길목마다 '차벽'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최대 규모로 예상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앞두고 14일 오후 서울 도심 곳곳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기로 한 광화문 광장로 통하는 세종로네거리에 경찰이 이중차벽을 설치하고 있다.

▲ '민중총궐기' 광화문 통하는 길목마다 '차벽'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최대 규모로 예상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앞두고 지난 11월 14일 오후 서울 도심 곳곳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기로 한 광화문 광장로 통하는 세종로네거리에 경찰이 이중차벽을 설치하고 있다. ⓒ 남소연


과연 국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국가가 국민에게 행하는 국가폭력이 정당한 것일까. 지난 민중총궐기를 보면서 문득 든 의문이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얼마 전 시리즈가 종결된 영화 <헝거 게임 : 더 파이널>과 톨스토이의 책 <국가란 폭력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판엠이 제시하는 게임의 규칙, 그 자체를 깨야 한다

캣니스의 마지막 화살 '진짜 적'은 경기장 밖에 있다.

▲ 캣니스의 마지막 화살 '진짜 적'은 경기장 밖에 있다. ⓒ (주)누리픽쳐스


<헝거 게임>의 배경은 가상의 독재국가 판엠이다. 판엠은 부와 권력이 집중된 수도 캐피톨과 여기에 자원을 공급하는 나머지 12구역으로 구성된다. 과거에 다른 구역들은 캐피톨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그 후 판엠의 대통령 스노우는 공포정치의 목적으로 매년 헝거 게임을 개최한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우선 반란을 일으켰던 12구역에서 10대 남녀 1명씩을 추첨하여 총 24명을 선발한다. 그중 최후의 생존자 한 명만이 승자가 됨과 동시에 부와 명예를 가진다. 그리고 게임은 모든 구역 사람들에게 TV로 생중계된다.

하지만 74회 헝거 게임에서 역사는 다시 쓰인다. 동생 대신 자원한 캣니스가 피타와 함께 12구역 대표로 게임에 참가한 후 시종 저항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캣니스는 자신과 피타만 생존했을 때도 싸움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 선택은 오히려 캣니스와 피타를 살리는 계기가 된다.

그동안 억압받던 사람들은 캣니스에게서 사랑, 희생, 연대를 발견하고, 저항의 싹을 틔운다. 이를 감지한 스노우 대통령은 캣니스를 제거하기 위해 75회 헝거 게임에 다시 그녀를 출전시키지만 캣니스의 마지막 화살은 게임 밖에 있는 '진짜 적'을 향한다.

룰 자체를 깨라 캣니스의 봉기. 결국 중요한 건 국가가 제시한 룰 안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 자체를 깨부수는 것이었다.

▲ 룰 자체를 깨라 캣니스의 봉기. 결국 중요한 건 국가가 제시한 룰 안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 자체를 깨부수는 것이었다. ⓒ (주)누리픽쳐스


그 후 캣니스는 13구역의 반란 세력에 의해 혁명의 아이콘으로 거듭난다. 다른 구역들과도 연대하여 반란은 계속되고, 캣니스가 스노우 대통령 궁에 잠입하기 직전 의문의 폭발로 반란은 성공한다.

하지만 캣니스는 붙잡힌 스노우 대통령을 통해 자신의 동생까지 죽게 한 의문의 폭발이 13구역의 대통령 코인에 의한 것임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코인 대통령은 캐피톨 시민을 참가자로 한 새로운 헝거 게임을 제안하고 캣니스는 자신이 스노우 대통령을 죽이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캣니스의 화살은 스노우 대통령이 아닌 코인 대통령을 향한다. 그 후 판엠은 선거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고 캣니스와 피타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이 영화는 판타지를 통해 국가와 국가폭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화 속 캐피톨은 소수의 권력자와 그들에게 기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징이고, 나머지 12구역은 캐피톨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대다수 노동자의 상징이다. 스노우 대통령이 독재를 위해 대중매체를 통한 세뇌, 상징적 게임, 평화유지군을 이용하는 모습은 역사 속 실제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스노우 대통령과 게임메이커가 기획한 가상세계에서 참가자들이 생존경쟁을 벌이듯 우리도 누가 '진짜 적'인지를 망각하고 이웃과 생존 경쟁을 벌인다. 게임의 규칙은 기획자의 이익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 국민은 언제나 그 룰에 따른다. 룰을 어긴 자는 평화유지군에게 제압된다.

이 과정에서 권력자를 향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 반란이 일어난다. 성공한 반란은 새로운 정권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권력자는 다시 자신의 집권과 이익을 위해 국가폭력을 동원한다.

이 악순환에서 캣니스만은 희망을 보여준다. 그녀는 오직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기로 게임과 반란에 참가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생존보다 우정과 연대를 더 중시했다.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던 그녀의 마지막 화살은 혁명을 완수한 코인 대통령을 향했다.

이 영화가 해피엔딩인지는 알 수 없다. 판엠은 선거를 통해 또 다른 대통령을 뽑았지만 그가 기존 권력자들과 다를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진짜 적'을 알아보는 국민의 인식이다.

톨스토이가 지적한 국가의 폭력성

<국가는 폭력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조윤정 옮김 / 달팽이 펴냄 / 2008.07 / 1만2000원)

▲ <국가는 폭력이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조윤정 옮김 / 달팽이 펴냄 / 2008.07 / 1만2000원) ⓒ 달팽이

영화 속 국가폭력의 부당성을 톨스토이의 <국가란 폭력이다>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국가가 테러리즘(처벌), 강탈(세금), 세뇌(교육), 군대로 이루어진 국가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다수가 생산한 노동의 결과를 소수가 가져가는 현상은 대다수 국민에게 반감을 일으킨다. 국가는 이 반감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찰, 경찰, 군대 등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주로 노동자 출신일 군인들은 권력자들을 위해 군중을 해산하는 일에 참여한다.

정부관계자는 노동자들의 세금에 의존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세금은 자발적 동의가 아닌 정복이나 공물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다. 군대는 세금 징수를 위해서도 존재하며, 세금 일부가 공공을 위해 사용되더라도 대부분은 부정한 곳에 쓰인다.

한편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교육 제도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국가 폭력의 정당성과 애국심을 내면화시키기 위해 '학교 역사 수업에서 그들 민족이 최상의 민족이며 언제나 옳다고 가르치면서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이식한다.'

그는 국민의 노예화가 참정권과 대의제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선거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국가 권력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기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간접 민주주의를 통해 사람들이 국가 폭력을 인정하고 자발적 노예가 된다.

즉 국가의 형태와 상관없이 권력자들은 권력을 소유함으로써 타락한다. 정부는 폭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고, 점점 법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국민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법에 호소하는 일도 어리석은 행위다. 왜냐하면, 법은 조직화한 폭력으로 통치하는 사람들이 만든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다수의 사람이 삶의 지속 가능성을 찾지 못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혁명의 방식이 폭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폭력으로 혁명을 쟁취한 세력은 이전 권력과 같아지거나 혹은 더 부당해진다는 것이다.

폭력의 대안으로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인류를 변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정작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소한 물질적 만족 때문에 자유와 명예를 파는 우리들의 이기심과 정신적 마비'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정부에 세금을 내서도, 세금으로 주는 돈을 받아서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폭력에 호소하거나 다른 사람의 토지나 재산권을 침해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국가폭력에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국가 없는 삶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국가가 부재함으로써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고 예상한다.

폭력적인 정부 조직은 폐지되고 정당하고 합리적인 조직만이 남을 것이다. 불평등과 억압도 많이 해소되고, 국가의 허락이 필요 없는 진정한 자유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들은 피해자와의 싸움이나 여론을 통해 제지되고, 우리는 권력을 쥔 범죄자들에게 지배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사회적 모순의 누적으로 혁명을 목전에 둔 1900년대 전후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도덕성과 비폭력에 의한 국가 부재라는 그의 바람과는 달리 폭력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했으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의 예상이 맞은 셈이다.

20세기 초입에 그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위대를 복면 쓴 IS에 비교하며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는 정부의 행태가 이것을 증명한다.

우리 시대의 '진짜 적'은 누구일까.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국가는 폭력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 조윤정 옮김 / 달팽이 펴냄 / 2008.07 /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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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아, 하지만 그냥 있을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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