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리환(이동욱 분)과 김행아(정려원 분)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된 드라마 <풍선껌>. 하지만 12회를 마친 이 드라마의 굵직한 줄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박리환의 엄마 박선영(배종옥 분)의 이야기이다. 늦가을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줄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풍선껌>을 봤던 혹자는,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혈육의 끈끈하고 지긋지긋한 관계에 지레 질려버리고 이 드라마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 어떤 드라마이든 '쾌(快)'이거나 '락(樂)'이 아닌, 보는 것 자체가 '인(忍)'이 필요한 드라마들은, 마치 멸종 위기의 동물과도 같은 존재일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조차도 편집본이나 팟캐스트를 이용해 소비하는 세상 아닌가. <풍선껌>의 1.705%(닐슨 코리아 기준 케이블 기준)의 쉽지 않은 시청률은 많은 것을 내포한다. 하지만 드라마 <풍선껌>은 그 수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알츠하이머, 천형의 징벌 혹은 회자정리

 <풍선껌>의 한 장면. 리환은 자신에게도 알츠하이머가 발병하여 행아를 힘들게 할까 봐 헤어지자고 얘기한다. 그런 리환에게, 행아는 자신이 혹여 짐이 될까 봐 붙잡지 못한다.

<풍선껌>의 한 장면. 리환은 자신에게도 알츠하이머가 발병하여 행아를 힘들게 할까 봐 헤어지자고 얘기한다. 그런 리환에게, 행아는 자신이 혹여 짐이 될까 봐 붙잡지 못한다. ⓒ tvN


알츠하이머에 걸린 이후 친정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아들마저 기억에서 잠시 지우는 등 급격한 악화 증세를 보였던 선영. 그는 이후 아들 리환과 주변 친지들의 따스한 도움으로 회복세를 보인다. 이제 아들 리환을 기억하고, 종종 이전의 선영이 가졌던 똑 부러진 판단력도 보인다. 하지만 그 이외의 시간 선영은 여전히 자신이 몸담았던 병원을 좋은 냄새로 기억한다. 좋았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차츰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놓쳐간다.

선영은 자신이 행아의 아버지와 함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마저 잃으면 어떡하느냐며 불안해한다. 그런 엄마에게 리환은 이를 '아이로' 돌아가는 삶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물론 선영의 질병으로 인해 리환은 고통받는다. 엄마가 잠시 보였던 행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리고 비슷하게 발현될지 모르는 자신의 유전적 결과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리환은 행아와 이별을 선택한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견디어 간다. 하지만 선영은 그런 리환과 달랐다. 11회를 통해 장황하게 설명했던 선영의 지난날처럼, 이제 풍성했던 잎을 거두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삶의 집착을 조금씩 거두어 가는 선영은 그녀의 해설처럼 '현명'해지고 '편안'해진다.

선영에게 행아는 애증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딸, 하지만 동시에 자기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 자신이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사랑을 이루어 주지도 않고, 행아만 남긴 채 떠난 행아 아버지의 죽음을 선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내내 행아를 불편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이었던 아들의 마음마저 가져간 행아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선영은 이제 그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지난날의 모든 것을 거두기 시작했다.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에의 집착도 거두고, 그래서 행아 아버지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대신 찰나와도 같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만을 기억 저편에 남긴다. 선영은 그녀를 버틸 수 있게 했던 자존심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한다. 용서하라고. 엄마의 이기심으로 너를 불행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백한다. 친정 쪽 식구들에게 보란 듯이 아들을 의대에 보내고, 친정에 금의환향하겠다는 욕심으로 아들을 외롭게 자라게 했다고. 거기에 친정 식구들마저 쉽게 하지 못할 집안에 리환을 보내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는 걸 사과한다.

선영의 사과는 아마도 그녀가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루어 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리고 선영의 사과는 그저 선영의 사과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모든 부모 자식의 질곡과 속내를 토로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말한다. 어디 내가 내 욕심 때문에 그러느냐고, 그저 너 잘 되기만을 바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선영의 고백처럼, 기실 그 부모들의 '자식 잘 되라고'의 기원은 그 시초가 부모들의 '자존심'이다. 이는 선영의 고백을 통해 드러내고야 만다.

회개, 반성 혹은 머뭇거림의 치유

 <풍선껌> 속 장면. 혈연 관계는 자칫 짐이 될 수 있다. 서로의 기대와 욕망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이를 보듬는 방법은 무엇일까. <풍선껌>은 그 화법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풍선껌> 속 장면. 혈연 관계는 자칫 짐이 될 수 있다. 서로의 기대와 욕망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이를 보듬는 방법은 무엇일까. <풍선껌>은 그 화법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 tvN


그래서 1.705%의 시청자들은 부모의 전횡으로 인해 상처받았을지 모르는 현실을 알츠하이머에 걸린 선영을 통해 치유 받는다. 동시에,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렀던 이기적인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신의 삶처럼 아들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던 선영이, 그녀의 앙칼지고 상처투성이였던 사랑도 놓아둔다. 그리고 그 사랑의 떨거지인 아들도 받아들이며 인생을 정리한다. <풍선껌>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린다. 리환은 혹시나 자신을 찾아올 유전병 알츠하이머로 인해 사랑하는 행아가 불행해 질까 봐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런 리환의 이별 선언에 행아는 지금 자신이 리환의 어깨에 얹힌 또 다른 짐이 될까 봐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리환과 행아만이 아니다. 여전히 행아를 사랑하는 강석준(이종혁 분)도 리환 앞에서는 패기를 부리지만 막상 행아 앞에선 기다리겠다는 말 밖에는 할 줄 모른다. 여느 드라마라면 돈과 권력으로 사랑을 밀어붙였을 재벌 집 딸 홍이슬(박희본 분)도 리환의 불행 앞에 눈물을 보일 뿐이다. 연적인 권지훈(이승준 분)도, 조동일(박원상 분)도 서로 멱살잡이를 하는 대신 조심스레 상대방의 장점을 짚어본다.

덕분에 <풍선껌>의 최고 악역은 두 어머니였다. 이슬을 재벌 집 딸내미답게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이슬모의 무지막지한 모성과 사실은 그 모성과 별반 다를 거 없던 선영의 속물적인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처지만 다를 뿐,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혈육이라는 이름의 딜레마들이다. 이를 치유해 가는 건, 그 혈육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기억의 순간들이었다. 견뎌낼 수 없었던 행아 아버지의 죽음은 그와의 찰나와도 같았던 행복했던 시간 때문에 견딜 수 있다. 상처받은 채 스스로 자신을 지우려 했던 선영을 보듬었던 공주 이모 등의 친지들 그리고 아들 리환이 있었다.

종종 자신을 놓아버리려 하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 살아왔던 리환. 그를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혈육과도 같은 행아, 지훈, 그리고 시크릿 가든의 식구들이다. 그물망처럼 엮인 그들은 조심하고, 머뭇거리며 서로의 주변에서 서성인다. 그리고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이제 리환과 행아의 이별도, 권지훈과 조동일의 어긋난 사랑도, 막장 대신 '사랑'에 대한 반추로 이어진다.

엄마 선영은 병을 통해 속물적인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얻는다. 이기심으로서의 사랑 대신, 배려로서의 사랑으로 마음 졸인다. 덕분에 드라마는 화끈한 사건 없이도 매회, 시청자 마음을 덥힌다. 가족의 이름으로, 모성의 이름으로 아들을 몰아붙였던 엄마가 맨정신으로 아들에게 전한 마지막 이야기는, "너의 행복을 찾으라"였다.

똑같이 알츠하이머를 앓아도 도시의 알츠하이머 환자와 농촌의 알츠하이머 환자 예후가 다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도시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고립된 공간에서 급격하게 악화하는 징후를 보이지만, 삶의 근거지를 놓치지 않는 농촌의 환자들은 그저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는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고 한다. 선영의 알츠하이머는, 인간에게 닥치고야 말 질병에 대해, 개인과 그 주변 사람들이 선택한 또 다른 화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풍선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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