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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두 얼굴을 지녔었다. 청년 시절에는 인류의 꾸준한 진보를 믿었다. 그러나 노년에는 '국가 이념'을 강조하며, 당시 독일이 역사의 절정에 이른 '살만한 곳'이라고 착각했다. 요즘 유행어로는 '국뽕'을 빤 것이다. 그래서 후대 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1831년 그가 죽은 뒤에도 역사는 계속 움직였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도 '국가이념'보다는 '시민들의 폭력'으로 자주 실현됐다.

'청년 헤겔'과 '노년 헤겔' 중, 어느 쪽 관점이 우리 삶을 더 잘 설명해줄까.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다. '시민'기자인지 시민'기자'인지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가 많지만, 덕분에 자유로이 움직이고 다양하게 바라볼 때도 많다. 나는 지난 14일, 세종로 네거리와 광화문 일대 민중총궐기 현장 '차벽의 이편과 저편'을 폭 넓게 취재하기로 했다.

"이번 역은 광화문, 광화문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열차 내 방송이 울렸다. 세상이 온통 편향적으로 보일 이들에게는, '좌편향' 됐을 수도 있는 출구로 벗어나 역사의 바닥을 밟는 순간. 심장이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쿵쾅거렸다. 집회참가자와 경찰 모두에 대한 과몰입된 선입견 없이 보도할 수 있기를 바랄 뿐.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최대 규모로 예상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앞두고 14일 오후 서울 도심 곳곳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기로 한 광화문 광장로 통하는 세종로네거리에 경찰이 이중차벽을 설치하고 있다.
▲ '민중총궐기' 광화문 통하는 길목 '이중차벽'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최대 규모로 예상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앞두고 14일 오후 서울 도심 곳곳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기로 한 광화문 광장로 통하는 세종로네거리에 경찰이 이중차벽을 설치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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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의 저편] 경찰 '콩기름'.. 인도에도 범벅, 보행자 뇌진탕 위험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1인 시위 중인 한 여고생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켓 뒤로 (채증을 피하려고) 살짝 얼굴을 가려 긴장한 눈망울로 기자를 쳐다봤다. 인사와 함께 명함을 주자 그제야 해맑게 웃으며 반겼다. 친구들과 개인적으로 나왔다는 고1 고사리 손에 들린 피켓 내용은 이랬다.

2005년 신년 기자회견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어떤 경우든 역사에 관해서 정권이 재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대통령 스스로의 말과도 모순되는  '국정교과서' 문제를 학생들도 잘 알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은 남단인 세종로 네거리부터 북쪽으로 '이순신 장군상-세종대왕상-광화문'(뒤편 경복궁)이라는 주요 지점들이 있다. 경찰은 이번에도 지점마다, 꾸준히 위헌 논란이 있는 차벽 여러겹을 사전에 설치했다. 세종로 네거리 남단에서 한 번, 광장 초입에서 또 한 번, 세종대왕상 뒤에서 한 번 차단해 구역을 크게 넷으로 분할한 것으로 보였다.

또 인근 사이 길목마다 병력과 차량을 배치해, '교통 병목 현상'을 조성하며 집회참가자들을 분산시킨다. 참가자들과 직접 맞닥뜨리는 세종로 네거리 남단 차벽 뒤로는, 살수차들이 수시로 오가며 물대포를 대기했다.

주황색이 '콩기름 존'이다. 세종대왕상 뒤 차벽 앞부터 수십 미터 전방이 미끌미끌하다. 시민들이 통행에 불편을 겪었으며, 다칠 위험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진기자가 높은 데서 찍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해봤다.
 주황색이 '콩기름 존'이다. 세종대왕상 뒤 차벽 앞부터 수십 미터 전방이 미끌미끌하다. 시민들이 통행에 불편을 겪었으며, 다칠 위험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진기자가 높은 데서 찍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해봤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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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세종대왕상 인근 차벽부터 살폈다. 경찰이 차벽에 콩기름을 발라뒀다는 소식은 사전에 접했다. 그러나 바쁘게 뛰어다니던 기자의 신체 무게중심이 위태위태했다. 아뿔사, '인도'에도 기름이 범벅된 상태였던 것이다. 인도를 걷던 50대 남성 한 명은 "아이 길바닥에다가 기름을 처 발라놨어"라며 불편해 했다.

확인 결과, 차벽 앞 최소 50여 미터가 미끌미끌 했다. 경찰이 인도에도 직접 기름을 살포했는 지는 불분명하다. 비가 와서 씻겨 내렸을 수도 있다. 다만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아, 비가 오면 물만 '튕겨 낼' 가능성이 높고 차벽에만 발라둔 양이라기에는 광범위했다.

정말 비에 씻겼거나 차벽 주변에 흐른 기름이 보행자들의 신발에 묻어, 인도에 퍼졌을 수 있더라도 안전 의식 없는 '콩기름'이라는 수단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노약자, 임산부, 어린이들처럼 운동 신경이 약한 통행자들은 뇌진탕 위험도 더 크다.

물이라면 손락으로 찍은 뒤 뒤집으면, 방울방울 지며 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기름은 뭉치며 특유의 빛깔과 퀘퀘한 냄새가 난다.
 물이라면 손락으로 찍은 뒤 뒤집으면, 방울방울 지며 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기름은 뭉치며 특유의 빛깔과 퀘퀘한 냄새가 난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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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벽] 기자에게 훈계한 경찰... 왜?

세종로 네거리 남단 차벽 근처였다. 날이 어두워졌고 주변은 점점 복잡해지며, 장비는 슬슬 한계를 드러냈다. 시민기자로서 오직 낙후된 '스마트폰 카메라'에 의존해, 한 순간이라도 더 담으려 했다. 장비의 질이 떨어지면 부지런히 뛰어다녀, 그 중 하나라도 얻어 걸려야 독자들에게 생생한 순간을 전할 수 있을 테니까.

차벽 뒤에서 살수차가 물을 분사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뒤에 또 다른 살수차가 다가왔다. '공무집행방해'라는 명목으로 행여나 연행되지 않으려고, '충분히' 신경쓰며 거리를 둔 상태였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경관이 다가왔다.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이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민중총궐기 대회'는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언론장악, 철도-의료-교육민영화, 노동개악 등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며 개최한 대회다.
▲ '민중총궐기 대회', 경찰의 마구잡이 물대포!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이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민중총궐기 대회'는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언론장악, 철도-의료-교육민영화, 노동개악 등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며 개최한 대회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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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 뭐 하십니까? 위험하니까 비키세요!
나: 아.. 충분히 떨어져 있고요, 지금 취재중입니다. (명함 주섬주섬)
경관: 기자면 (팔뚝을 가리키며) 이거, 이거(완장) 하셔야 할 거 아녜요?
나: 바로 와서 그렇고요. 기자라고 말씀드렸으면 됐죠. (다시 명함 주섬주섬)
경관: (버럭) 비키세요! 지금 경찰 말 안 듣는 거예요?

기자의 판단 영역까지 월권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충분히 거리를 둔 상태였음에도 자꾸 위험하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진을 찍어서 위험해지는 건, 기자가 아니라 현 정권에 대한 평가 밖에 없다. '물대포 분사 장면'은 사진 기자들이 전문 자료를 공유하므로, 취재 입장에서는 보조 수준에 그친다.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아, 안 그래도 철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육성으로 들은 "지금 경찰 말 안 드는 거예요?"의 뉘앙스가 너무 '훈계적'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훈육할 때 흔히 듣는 그것이었다. 물론 그도 상부에서 명령받은 대로 행동했을 거다. 그러나 개인의 자존심 문제를 넘어, 최소한의 취재 자유가 문제였다. 공권력과 기싸움에서 한 번 밀리면, 앞으로도 다른 기자들에게도 막 대할 수 있다. 압축적으로 불만을 전달해야 했다.

"경찰도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연결고리] 열심히 교통 병목현상 조장하는, '경찰'

주변에 경찰 생활을 하거나 했던 지인들에게 가끔 묻는다. 경찰들이 너무 쉽게 중립(?)이라는 편한 선택에 머무르는 건 아닌지. 시민들이 저항권을 행사할 때 '뒤로 돌아 함께 걷는' 그림까지는 안 나올 망정, 정치를 발목잡는 건 아닌지. 이들 중에는 경찰에 '종북좌파 세력'을 때려잡고 싶어서 자원했다는 이도 있고, 사회비판적임에도 자원한 이도 있다.

답은 늘 정해지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히 생각할 줄 알며, 단순히 '명령'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을 뿐이다. 다만 이들이 지닌 정보가 많이 '제한'돼 있다고는 항상 느낀다. 경찰 생활을 하면서 어떤 미디어들로부터 어떤 콘텐츠를 접하는지, '제복입은 시민'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논의도 시급해 보인다.

경찰들은 매우 전술적으로 행동한다.
 경찰들은 매우 전술적으로 행동한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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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제한된 탓일까? 경찰이 접하는 집회참가자들은 그저 '열심히' 막아야할 대상이다. 병력들은 적재적소에 투입과 철수를 반복하고, 차벽은 물 셀 틈이 없다. 저녁 퇴근길과 지하철역 출입구 곳곳에 차량과 병력을 배치해, 시민들은 같은 자리를 뱅뱅 돌며 헤매거나 화를 낸다. 물론 집회참가자들보다는 '경찰'을 향한 불만이다.

취재를 하는 입장에서, '공정하게' 써도 경찰에게 우호적인 기사가 나오기 힘든 이유다. 조중동·방송3사·종편 채널 등으로 접하는 경찰의 모습과, 실제 집회 현장에서 보는 모습과 엄연히 다르다. 경찰은 훈련받은 대로 매우 전술적으로 행동한다. 그 결과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한 교통 통제와 집회참가자들의 병목 현상이다.

흘러야 강이듯, 길을 뚫어야 교통인데. 신고된 집회의 참가자들이 무리를 이루지 못하게 했고, 무리를 이루기 위해 도로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도로교통법> 위반이 된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미리 세워둔' 차벽이 기다리며,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사정없이 쏴댄다. 그럼 시위대에게 남은 선택은 대체 무엇일까, 집에 가는 것?

기성언론들은 아랑곳 않고 '시위로 교통 불편 초래' '발 동동구르는 논술 수험생' '폭력·불법 시위로 변질돼' '시위대 사다리로 경찰 공격' 등의 프레임으로 기사들을 생산한다. 시위는 '항상' 순수하지 않은 것이 되며, 누리꾼들은 탈맥락적이고 불충분한 정보를 받아든다. 한 쪽은 시위대의 폭력성을, 또 반대 쪽은 경찰의 폭력성을 극대화한다.

양쪽 모두 폭력을 쓴다면, '누구를 위한 폭력인가' '무엇을 얻을 수 있나'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사람들의 뇌리에는 '변질'로 각인돼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얼마 뒤 대통령의 지지율은 회복되며, 또 다른 이슈가 이슈를 덮어버린다. 살림살이는 나빠지며, '국가가 허락한 평화시위'의 존재 여부는 보수단체 정도만 자신있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차벽과 마주한 이들] 물대포 '살인미수'.. 뚜껑 열려버린 순간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강력한 수압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쓰러진 농민에게 한동안 계속 물대포를 쐈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이 농민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린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69세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이 쏜 강력한 수압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경찰은 쓰러진 농민에게 한동안 계속 물대포를 쐈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이 농민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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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법치주의'란 게 있다. 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는 와중에 선택한 방법이다. 히틀러의 악명에 걸맞게 그가 독일 민족을 공포로 굴복시켰을 것 같지만, 그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된 건 '법치주의'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분명 법은 법인데, 히틀러의 독재 체제를 강화해주는 그런 사법체계 말이다. 그 와중에 '괴벨스'와 같은 악명높은 언론인이, 히틀러의 입을 대신하며 나치 독일 국민들을 현혹했다. 그들은 매우 '자발적으로' 협조했다. 적극적으로 혹은 "아, 그래도 법은 지켜져야죠"라는 정도의 생각으로. 한국은 과연 '형식적' 법치주의일까, '내용적' 법치주의일까. 그 가운데 어디 쯤 있을까.

저녁 시간 쯤 나는 차벽과 마주한 이들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 많은 기자들이 와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오마이뉴스> 조아무개 기자와 박아무개 기자도 각각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맞았다고 한다. 나도 시위대 근처에서 물대포를 덩달아 맞았다. 스마트폰은 작동을 멈췄다. 여기까진 참을 만 했지만, 사이렌을 울리며 급하게 달려가는 구급차를 봤다.

그 안에 백만기씨가(69)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머리를 향해 정조준한 물대포를 맞았고, 쓰러지고 한 동안 계속 맞았으며,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맞았다. 사람들이 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지, '격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여기서부터 뚜껑이 열렸고, 취재는 종료되어야 했다. 과연 누가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만들까.

"20여 명의 학생들이 컴퓨터 게임에 몰입해 있는 피시방. 곳곳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한 뒤 게임이 한창 진행 중인 컴퓨터의 전원을 순간적으로 모두 꺼 봤습니다." (2011년 2월 13일 <MBC> 뉴스데스크 '잔인한 게임 남폭해진 아이들' 기자 멘트)


태그:#시민 불복종, #국정교과서, #민중총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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