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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화파의 본산 '아카데미아 미술관'. 또다시 틴토레토를 만납니다.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입니다. 한 눈에 봐도 대단한 그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으로 순례 여행을 다녀온 노예. 화면 오른쪽 제일 위에 붉은 옷을 입은 주인은 화가 단단히 나서 노예의 눈을 뽑고 사지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순간 형을 집행하려던 도구들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눈을 찌르려던 꼬챙이도, 사지를 자르려던 망치와 도끼도 부서져 버리죠. 놀란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 공중에 성 마르코가 그의 복음서를 들고 나타나 기적을 행사한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 마르코의 시선은 벌거벗겨진 채 누워있는 노예에게 향하고 있죠.

극적인 상황, 이토록 실감나게 묘사한 화가가 또 있을까

틴토레토,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역동적인 묘사에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 표현까지, 극적인 상황을 담대하고 실감나게 묘사한 틴토레토의 대표작입니다.
▲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 틴토레토,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역동적인 묘사에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 표현까지, 극적인 상황을 담대하고 실감나게 묘사한 틴토레토의 대표작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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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성 마르코와 누워있는 노예는 단축법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여지껏 본 적 없는 특이한 구도입니다. 노예는 관람객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있고, 성 마르코는 관람객 쪽 하늘에서 날아간 듯한 각도로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리고 기적에 놀란 왼쪽의 인물들(베네치아인, 아랍인, 무어인 등 그 구성도 매우 다양합니다)은 쓰러질 듯 앞쪽으로 상체를 숙인 채 노예를 바라보고 있죠.

그런데 이런 구도는 투시원근법으로 묘사된 건물들과 어울려 화면에 더할 수 없는 입체감을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관람객도 저들과 같은 공간에서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미켈란젤로 풍의 근육질 몸매를 보여주는 인물들은 묘하게 뒤틀리고 과장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틀림과 과장이 다른 매너리즘 작가들의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피렌체에서 만났던 로소 피오렌티노나 브론치노 같은 작가들에게는 인위적인 뒤틀림이 그 자체로 미학적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틴토레토에게 있어서 그것은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유려한 색채와 어울려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일조합니다.

베네치아 화파 최후의 거장이자 매너리즘의 대가로 알려진 틴토레토. 그는, 스승인 티치아노의 범접할 수 없는 명성에 비해, 약간은 가벼운 듯한 처신과 테크닉만 뽐낸다는 인상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을 보니, 역동적인 묘사에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 표현까지, 극적인 상황을 이토록 담대하고 실감나게 묘사한 화가가 또 있던가 싶습니다. 그러면서 그간에 매너리즘과 틴토레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어떤 편견같은 것이 상당 부분 해소되는 느낌입니다. 며칠 후 만나게 될, 틴토레토의 기념비적 업적, '산 로코 대 신도 회당'이 기대됩니다.

틴토레토, '동물 창조',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활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창조주의 손끝에서 탄생한 새와 물고기들이 하늘과 대지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 속도감이 아찔합니다.
▲ 동물 창조 틴토레토, '동물 창조',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활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창조주의 손끝에서 탄생한 새와 물고기들이 하늘과 대지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 속도감이 아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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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코 연작' 외에도 구약성서 창세기 연작 즉, 동물들을 창조해 내는 창조주의 모습을 묘사한 '동물 창조', 신에 대한 질투심으로 동생 아벨을 죽이려 하는 카인을 묘사한 '카인과 아벨', '아담과 이브의 유혹',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 '경배를 받는 성 모자와 성인들' 등 놓칠 수 없는 틴토레토의 명작들이 이어집니다. 특히 '동물 창조'는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인데, 활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창조주의 손끝에서 탄생한 새와 물고기들이 하늘과 대지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 속도감이 아찔할 정도입니다. 소재도 그렇고 구도, 형상 등 틴토레토 특유의 참신함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제 고개를 돌려 일부러 외면하려 해도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작품을 만납니다. 베로네세의 작품, '레위가의 만찬'입니다. 가로 너비만 13미터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그 크기만으로도 눈에 확 띌 수 밖에 없죠.

이 작품은 원래 화재로 소실된 티치아노의 '최후의 만찬'을 대체하기 위해 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의 제목도 당연히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베로네세는 수난을 겪게 되는데, 그림을 주문한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이 그림의 내용이 지극히 이단적이라며 베로네세를 종교 재판에 회부한 것입니다.

외면하려 해도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작품

베로네세, '레위가의 만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관습적인 도상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된 베로네세의 대표작으로 가로 13미터가 넘는 대작입니다.
▲ 레위가의 만찬 베로네세, '레위가의 만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관습적인 도상을 따르지 않았다 하여 종교재판에 회부된 베로네세의 대표작으로 가로 13미터가 넘는 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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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기에도 기존에 봐왔던 다른 '최후의 만찬'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다빈치의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장식적인 성격이 강한 기를란다요의 작품과 비교해 봐도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죠. 세계 각국에서 모인 듯, 갖가지 전통 의복을 입고 있는 등장인물도 너무 많습니다.

그뿐입니까? 코피를 흘리는 하인, 어릿광대, 난쟁이, 강아지, 고양이, 원숭이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림만 보면, '최후의 만찬'이 아니라 베네치아의 한 귀족 집안에 벌어지는 잔치같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자신들의 풍습대로 묘사하는 것이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이라 하더라도 분명 베로네세의 이 그림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에서 벗어난 묘사도 그렇지만, 도미니크회에서 특히 문제 삼은 것은 예수 주위에 있는 독일인들입니다. 당시 북유럽을 휩쓸고 있던 루터교의 신자들을 묘사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죠. 베로네세는 결국 신성모독과 불경죄라는 명목으로 종교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베로네세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창작자의 자유 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비로 작품을 수정하라는 명령도 거부하고, 제목만 '레위가의 만찬'으로 바꿔버리죠.

르네상스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베로네세. 귀족 취향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그의 화풍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의로 엄숙주의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던 그 시기,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한 그의 정신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이제 작품을 좀더 찬찬히 봅니다. 고전 건축에 적용된 투시원근법,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화려하고 자연스러운 색채 감각 등 곳곳에 베로네세의 솜씨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마어마한 크기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번 이탈리아 미술 기행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작품의 '크기'가 가진 의미입니다. 물론, 화집이나 모니터를 통해서 작품을 보는 것과 실물 크기로 작품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20여 일 가까이 작품들을 만나다 보니 생각했던 것과 크기가 다른 작품들이 많더군요. 어떤 것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또 어떤 것은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그런데 그 실제 작품의 크기가 작품들 하나하나에 꼭 맞는 옷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생각보다 작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나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 그리고 브뤼헬의 세밀화들도 그렇고, 반대로 이 작품, '레위가의 만찬'이나 앞서의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작품들처럼 생각보다 훨씬 컸던 작품들도 모두 지금 현재의 그 '크기'가 가장 적당한 크기로 보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동안 구도나 색채, 주제 등에 비해 아예 관심 밖에 밀려나 있었던 '작품의 크기'도 사실은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작가들이 그 크기를 선택한 이유를 느끼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진품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림 속에 있다는 느낌

베로네세, 틴토레토, 티치아노의 대작들과 감상자들을 비교해 보면, 구도나 색채, 주제 등에 비해 아예 관심 밖에 밀려나 있었던 ‘작품의 크기’도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작품의 크기(아카데미아 미술관 전시실) 베로네세, 틴토레토, 티치아노의 대작들과 감상자들을 비교해 보면, 구도나 색채, 주제 등에 비해 아예 관심 밖에 밀려나 있었던 ‘작품의 크기’도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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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로네세의 '레위가의 만찬'을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본다'라는 개념을 넘어, 엄청난 크기의 화려한 색채와 구도 속에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앞서 틴토레토의 '노예를 구출하는 성 마르코의 기적'이 입체적 구도로 작품 속에 함께 하는 느낌을 준다면, 이 작품은 그 크기로 감상자를 흡수하는 느낌, 내가 그림 속에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베로네세의 그림 이후 연대 순으로 전시된 수많은 베네치아 화파의 명작들을 훑어가듯 감상합니다. 우리의 '정조 대왕 능행도' 같이 수많은 인물들의 행렬을 묘사한 젠틸레 벨리니의 대작, '산 마르코 행렬'을 비롯하여, 가로 13미터, 세로 1.5미터라는 특이한 사이즈에 놀라고, 활동 사진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장면 구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지암바티스타 티에폴로의 '뱀의 형벌', 섬세한 빛 표현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풍경화, 마르코 리치의 '빨래하는 여인이 있는 풍경',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만났던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파괴' 등은 놓칠 수 없는 명작들입니다.

프란체스코 하예즈,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만났던 신고전주의 작가, 프란체스코 하예즈. 그도 이곳 베네치아 출신입니다.
▲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 프란체스코 하예즈,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만났던 신고전주의 작가, 프란체스코 하예즈. 그도 이곳 베네치아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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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첫날,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의 황홀한 색채와 빛의 향연을 감상하고 나오니 해는 이미 졌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베네치아는 화려한 불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 앞에서 '대운하(Grande Canal)' 건너 '산 마르코 광장' 쪽을 바라봅니다. 베네치아의 상징 '대종루'가 손에 잡힐 듯 신비한 자태로 서 있습니다.

로마에서의 첫날처럼 다시 한 번, 봄 신령 아니 겨울 베네치아의 신령이 지폈나 봅니다.  나는 베네치아의 밤거리를 정신없이 헤맵니다. 아직 길도 모르고 저녁도 굶은 상태인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집니다. 그러다 우연히, 며칠 후 만날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정문도 지나고, 밤의 '리알토 다리'를 건너며 황홀경에 빠집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밤의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서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나오니 이미 해는 졌고 베네치아는 밤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 밤의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나오니 이미 해는 졌고 베네치아는 밤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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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걸음은 어느새,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불렀던 '산 마르코 광장'까지 이어집니다. 생각보단 많지 않은 관광객들이 광장 여기 저기에서 사진을 찍으며 자기들만의 추억만들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 틈에 끼어 그 넓은 광장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오래된 가로등만 광장을 밝힐 뿐,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전' 등 역사적 건물들에는 거의 조명을 비추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 흔한 자동차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밤의 '산 마르코 광장'은 마치 19세기 같습니다.    

그런데 광장을 걷는데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웃음이 나옵니다. 베네치아의 상징인 성 마르코의 사자상을 볼 때도, 바다 건너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과 좀전에 만난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과 마주할 때도, 며칠 후 건너게 될 '탄식의 다리'를 바라볼 때도 알 수 없는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너무 늦게 이곳에 온 후회일까요? 아니면 이제라도 찾아온 행복일까요?

자동차도 없고 관광객들도 드문 겨울밤의 '산 마르코 광장' 가로등과 옅은 조명으로 밤을 밝힌 광장은 마치 19세기 같습니다.
▲ 밤의 산마르코 광장 자동차도 없고 관광객들도 드문 겨울밤의 '산 마르코 광장' 가로등과 옅은 조명으로 밤을 밝힌 광장은 마치 19세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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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떠난다는 유럽 여행, 하지만 누구도 쉽게 떠나기 힘들다는 유럽 여행.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꿈을 위해, 몇 년에 걸쳐 어렵게, 정말 어렵게 돈을 모으고, 또 몇 달 동안 말 그대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공부하고, 직장을 비롯한 여러 난제들을 억지로 풀어내고, 홀로 떠나온 이 한 달 간의 이탈리아 미술 기행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관심을 두기 싫습니다. 이기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12월 24일, 밤의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 서 있는 나는 이 자체로 그냥 행복할 뿐입니다. 다만, 할 수 있다면,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나눠드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주제넘은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기는데 문득 어디선가 본듯한 낯익은 광경이 나타납니다. 반짝이는 인공의 별빛 아래 캐노피를 치고 손님을 맞고 있는 거리의 카페. 순간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그리고 이미지에 옐로우 필터를 적용합니다.

그랬더니, 그렇습니다. 그것은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의 포룸 광장에 있는 한 카페를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과 비슷한 구도입니다. 고흐가 카페 테라스가 보이는 곳에 이젤을 놓고 며칠이고 앉아서 그렸다는 그림. 고흐는 그 그림을 통해 비로소 푸른 밤하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흐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나도 무언가를 찾은 것 같습니다. 후반부를 향해 가는 이 부족한 '이탈리아 미술 기행'이 당신에게도 '밤의 카페 테라스'처럼 소박하고 편안한 빛으로 다가섰으면 좋겠습니다.     

반짝이는 인공의 별빛 아래 캐노피를 치고 손님을 맞고 있는 베네치아 거리의 카페. 아를의 포룸 광장에 있는 한 카페를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와 비슷한 구도입니다.
▲ 밤의 카페 테라스 반짝이는 인공의 별빛 아래 캐노피를 치고 손님을 맞고 있는 베네치아 거리의 카페. 아를의 포룸 광장에 있는 한 카페를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와 비슷한 구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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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은 20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비록 홀로 이 먼 나라를 헤매고 다니지만 인사는 해야 겠지요.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 인사를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부온 나탈레(Buon Natale)!"

(17편으로 이어집니다.)


태그:#틴토레토, #베로네세, #아카데미아미술관, #베네치아,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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