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대한배구협회 국가대표팀 경기력향상회의

지난 2일, 대한배구협회 국가대표팀 경기력향상회의 ⓒ 박진철


한국 배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들이 쏟아질 전망이다.

대한배구협회(아래 협회)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고교·대학에 재학 중인 남자배구 선수 14명을 성인 국가대표로 전격 발탁하고, 올 겨울부터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에 돌입한다. 협회는 2일 회의를 바탕으로 오는 16일 오후 상임이사회에 제출할 이 같은 혁신안을 13일 결정했다. 해당 안건은 16일 상임이사회에서 최종 확정된다.

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는 이미 14명의 국가대표 명단을 상임이사회에 제출했다. 고등학교 선수 5명, 대학교 선수 9명이 포함됐다. 당초 12명이었으나 한국민(송산고), 김인혁(경남과기대)이 추가됐다.

협회 관계자는 이번 안이 확정될 경우, "배구 역사상 초유의 기록들이 탄생한다"며 '사상 초유'인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성인 국가대표에 고등학교 선수가 5명이 발탁된 건 프로배구 출범 이후 처음이다. 대학 선수를 9명이나 발탁한 것 역시 전례가 없다. 특히 고교 1학년으로 16살인 임동혁(1999년생·제천산업고·라이트·199cm)은 한국 배구 역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린다.

김광태 제천산업고 감독은 지난 13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임동혁 선수는 신발을 신으면 200cm가 넘는다, 성장판이 열려 있어 더 클 가능성이 있다"며 "키가 큰데도 기본기가 좋아서 공격·블로킹·수비 등 3박자가 잘 갖춰졌다, 장래가 상당히 기대되는 선수"라고 평했다.

고교·대학 14명, '2진' 아니다... 프로 선수와 동등한 국가대표

혁신안을 주도하고 있는 김찬호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을 지난 2일 직접 만났다. 이날 강남구 도곡동 배구회관에서는 김 위원장의 주재로 국가대표팀 경기력향상회의가 열렸다. 회의 직후 김 위원장으로부터 자세한 설명과 향후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는 김찬호 위원장이 직접 브리핑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 남자배구 국가대표는 이번에 선발되는 고교·대학 선수 14명에 V리그가 끝난 후 선발될 프로 선수 21명을 포함해 총 35명 체제로 구성된다. 상비군 제도와 비슷해 보이지만, 이번에 선발되는 고교·대학 선수는 2진 개념이 아니다. 프로 선수와 동등한 국가대표 자격을 갖고 언제든지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협회는 이 35명을 가지고 국제대회 참가 선수 구성을 다양하게 운용할 방침이다. 세계랭킹이 부여되거나 비중이 높은 국제대회는 최정예 멤버가 출전한다. 비중이 낮은 대회에는 고교·대학 선수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한다.

다만, 중요한 국제대회라 할지라도 고교·대학 선수 중에 실력이 어느 정도 검증된 몇 명은 반드시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켜 큰 무대 경험을 쌓게 할 방침이다. 올해 월드리그, 아시아선수권 대회처럼 프로 선수로만 구성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35명 모두가 계속 경쟁하는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번 혁신안의 골자이다.

특히 획기적인 부분은 고교·대학 선수 14명을 따로 소집해서 2016년 1·2월 중 40일간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을 실시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초유의 시도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의미가 담겨 있다. 김찬호 위원장은 이번 특별 훈련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다섯가지로 꼽았다.

첫째, 한국 배구가 세계무대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인 '스피드 배구'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스피드 배구는 철저한 시스템 배구이자 토털 배구이기 때문에 국제대회를 앞두고 1·2개월 연습해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기간의 체계적인 특별훈련이 필요하다.

둘째, 장신화와 스피드 배구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서다. 이번에 장신의 유망주들이 대거 발탁됐다. 아시아권 배구의 한계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장신화와 스피드 배구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

셋째, 프로 선수와 경쟁 체제를 만들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고교·대학 선수를 따로 모으고, 집중 훈련을 통해 프로 선수와 실력 격차를 줄인다. 이는 상호 경쟁을 유도한다. 프로 선수가 국가대표 차출을 꺼리거나 부상으로 공백이 생길 때 대체할 수 있는 선수층을 미리 확보해놓는 의미도 있다.

넷째, 스타 선수 발굴과 2020년 도쿄올림픽을 겨냥한 세대교체를 위한 훈련이다. 어리지만 유망한 신예들이 국가대표에서 맹활약할 경우 국제경쟁력 향상은 물론, 새로운 스타의 발굴로 프로 배구 발전과 흥행에도 기여할 수 있다.

또한 2020년 도쿄올림픽을 겨냥해서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9월 남자배구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한 미국 국가대표의 주전 세터 마이카 크리스텐슨은 22살이다. 준우승한 이탈리아 주전 세터 시모네 지아넬리는 19살에 불과하다. 세계 배구 흐름으로 보나 국내 현실로 보나 세대교체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다섯째, 프로배구 제8구단 창단에 큰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프로에 진입하기 전에 국가대표에서 함께 훈련하고 손발을 맞춘 선수들이 대거 신인 드래프트에 나올 경우 배구계의 염원인 제8구단 창단을 조기에 실현시킬 수 있다. 프로배구 발전은 물론, 배구를 시작하는 어린 선수들에게도 희망을 안겨주는 일이다.

신만근·김찬호 "반드시 실천하고 성공하겠다"

 신만근 전무-김찬호 경기력향상위원장(오른쪽)

신만근 전무-김찬호 경기력향상위원장(오른쪽) ⓒ 박진철


대한배구협회 신만근 전무와 김찬호 경기력향상위원장은 지난 13일 전화 통화에서 이번 프로젝트 추진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차 밝혔다.

신 전무는 "이번 스피드 배구 특별훈련 프로젝트는 반드시 실천하고 성공하겠다"며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도 "특별훈련을 거치고 나면, 공격수들이 '공격과 수비력을 모두 갖추지 않으면 국가대표가 안 되겠구나'하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라며 "소속 팀에 가서도 반쪽 선수가 안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다른 선수들에게도 파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가대표가 계속 보장된 건 아니다, 스피드 배구에 적응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다른 유망주와 교체될 수 있다"라며 "유망주를 계속 발굴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배구협회 방안에 대해 프로팀 감독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남자부 7개 구단 감독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들어봤다. 대부분 적극 찬성과 환영 의사를 표시했다.

특히 김세진(OK저축은행), 최태웅(현대캐피탈), 임도헌(삼성화재), 김종민(대한항공), 강성형(KB손해보험) 감독은 한 목소리로 "이번만큼은 한국배구연맹(KOVO)과 프로 구단들도 관심을 가지고, 예산 문제 등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신영철(한국전력)·김상우(우리카드) 감독도 원칙적으로 찬성했다. 다만 감독 선임, 예산 확보, 학교 측과 협조 문제 등을 협회가 잘 풀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교 3학년 때 국가대표에 발탁돼 '월드스타' 반열에 오른 김세진 감독은 "이번 시도는 아주 좋은 방향"이라며 "미리미리 준비하고 서둘러서 한 번 해본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해보지도 않고 선수 수급이 안 되느니 똑같은 얘기만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도 처음엔 가능성을 보고 뽑혔다"며 "국가대표에 들어와서 뛰어본 것과 계속 평범한 고등학교·대학교 선수로 생활하는 것과는 성장 속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광인 선수도 대학 2학년 때 성인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현재는 국내 최고의 공격수이자 국가대표 에이스로 우뚝 섰다. 연봉도 프로 입단 첫해 3000만 원(2013-14)에서 1억7000만 원(2014-15), 2억7000만 원(2015-16)으로 파격 상승했다. 현재 프로배구 최고 연봉자는 한선수(대한항공)다. 군 입대 전 체결한 연봉 5억 원이 올 시즌부터 지급된다.

'감독 선임-예산 확보' 화룡정점 잘 찍어야

마지막 관건은 어리고 유망한 선수들을 스피드 배구의 보석으로 다듬어줄 국가대표 감독 선임이다.

김찬호 위원장은 "감독의 제1 기준은 스피드 배구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고, 완성시키겠다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갖고 있느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감독이냐 외국인 감독이냐, 예산 문제 등 깊이 고민해야 할 점들이 많다. 현재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지만 그래도 나은 선택지를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예산 확보도 숙제다. 김 위원장은 "이번 혁신안은 한국 배구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KOVO 측과도 충분히 설명을 하고 협조관계를 구축하겠다"며 "문체부 등 정부 측에도 협조를 구할 생각"이라고 했다.

사실 이번 혁신안이 성공하면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곳은 바로 KOVO다. 어린 선수들을 조기에 국가대표로 발탁해 잘 훈련시키고 스타로 성장시키면 결국 프로배구의 큰 자산이 된다. 스타 계보가 끊어지고, 남자배구의 올림픽 진출 좌절에서 보듯 국제경쟁력이 계속 추락하면 지금 같은 흥행을 유지하기 어렵다.

"욕만 먹던 협회가 지난 10년 동안 시도한 일 중에 가장 훌륭한 결정이다."

한 배구인의 목소리다. 팬들도 어느 때보다 관심과 기대가 높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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