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를 헝그리(Hungry)하게 키우지 못한 50대 학부모입니다.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해 표류하는 아이와 은퇴 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가 현실적인 문제가 된 저의 처지는 일응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난 2012년 지구 반대편 먼 이국 땅으로 가 요리학교를 다니면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아이(닉네임 빅맥)의 모습을 글로 담아봅니다. 이 글을 통해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문제와 베이비 부머들의 2막 인생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기자말

나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예전에는 386세대로 불렸고, 지금은 은퇴를 준비하는 또는 이미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이다. 살아 온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업보'니 '회한'이니 하는 말의 의미가 와 닿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살아 갈 날도 만만찮은 그런 어정쩡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정상적인 생활궤도로 진입하기 힘든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에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세대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세대는 적어도 취업이라는 측면에서는, 지금의 젊은 세대보다 훨씬 쉬웠던 것 같다. 지금은 그렇게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규직 진입이 그때는 당연시 되었다. 정규직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내가 그런 분위기를 몰랐던가. 요즘은 자녀가 정규직으로 취업하면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자녀가 정규직으로 취직하자 주변 친지들을 초대해서 잔치까지 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닐 때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친구들에게서 쌍권총을 찼네, 발칸포를 맞았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쌍권총은 F학점이 2개이고, 발칸포는 F학점이 수두룩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다시 기억을 떠올려 보니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울하거나 뭐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다.

1학년 때 발칸포를 맞은 친구는 군대 갔다 와서 열심히 공부해서 모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고, 쌍권총을 찼다가 취업의 길로 들어 선 친구도 일자리 구하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당시 사회, 정치적인 상황은 엄혹했지만, 그 시기의 일자리는 거의 정규직이었다.

고도성장기에 급성장하던 기업들로 인해 왠만하면 취업이 되었고, 그 취업은 지금과 같은 불안정한 비정규직이 아니었다. 월급은 적었지만, 일단 취업이 되면 그럭저럭 다른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나 보다 더 나이 드신 분들이 그 당시를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지금은 한번 밀려나면, 또는 제때 취업하지 못하면, 참혹할 정도로 수준을 낮추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 이런 면에서 우리 부모 세대도 행복했던 것 같다. 자녀들을 방목 수준으로 키워도, 키워 놓기만 하면 자기 밥벌이는 알아서 했으니까.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구조화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지난 2014년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4 코트라 글로벌 취업 상담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지난 2014년 10월 3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4 코트라 글로벌 취업 상담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정상적인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정규직으로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예전에는 너무나 당연시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상당수 젊은이들에게는 '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아이도 그런 젊은이에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걱정하고 있다.

큰애가 고등학생이 된 무렵부터 이런 불안감을 현실로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마음 속으로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내가 뱉어 내는 언어들은 그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대부분 부모님들의 바람이 모든 학생들에게 가능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강요한 것이다.

가끔씩 터져 나오는 큰애의 속마음을 보면서 다른 길을 찾으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내 사고의 범위에서는,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동시에 나도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는 대다수 젊은이들에게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구조이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지독한 불평등 사회에서 일정 이상의 삶의 질을 담보하는 자리는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특권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젊은이들을 도저히 지속 가능하지 않은 열악한 일자리로 내모는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구조화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우리 세대의 어떤 잘못된 선택이, 어떠한 무지함이 우리 사회를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삶이 허용되지 않는 구조로 만든 것인가?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

나의 강요를 견디지 못한 큰애는 군대를 제대하고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 인천공항에서 브리즈번행 비행기를 타고 떠나던 날의 착잡함과 불안감은 지금까지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내 아이를 가지고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는 방황의 시간을 가지는 아이가 마음을 잡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시간이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넓은 세상을 다니다 보면 열정을 바치고 싶은 대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떠나는 아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워킹 홀리데이를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브리즈번 공항으로 마중 나오기로 한 사람이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온다고 한 것이다. 하늘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큰애는 비행기를 탔고, 무사히 브리즈번에 도착해서 시내 백팩커(Backpacker)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호주에 가기 전, 거금을 들여 테헤란로에 있는 영어학원에 등록을 해주었다. 그러나 거의(?) 공부하러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던 큰애가 외국 공항에서 차를 잡아타고 브리즈번 시내로 가서 숙소까지 얻었다니... 나로서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마중 나오기로 한 그 친구가 어디에서 어떻게 차를 타라고 하는 등 문자로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보기에는 영어가 영 아닌 것으로 보였던 큰애가 얘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나도 자신이 없는데.

물론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다고 한다. 브리즈번행 비행기를 시드니에서 갈아 타면서 한국과 시드니 사이에 한 시간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깜박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졸고 있는데 경비원이 와서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는 당신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 못하고 있으니까 빨리 가라고 했을 때는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고 큰애는 말했다.

그렇게 혼자 호주까지 가서 일자리를 구한 큰애는 3년을 버텼다. 많지는 않지만 돈을 벌어서 송금까지 해왔다. 살면서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어찌어찌 버티면 해결 방안이 있을 것 같고, 너무 미리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큰애가 호주에서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면서.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워킹홀리데이, #워홇러, #청년실업, #호주, #맬버른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