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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는 일주일에 두 번 일기를 쓴다. 선생님이 시켜서. 하루는 아이가 쓴 일기를 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이의 일기장 속에 가끔씩 등장하곤 했던 내가 최근에는 아예 없던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아이는 대부분 아빠와 함께 게임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요리를 하고, 만들기를 했다. 놀이터에도 가고. 일기 내용을 보면 딱히 내가 외출을 했던 날도 아닌데, '엄마'는 없었다. 왜지? 그즈음이었던 듯하다. 남편이 이런 말을 꺼낸 건.

"텔레비전 보기 싫어도 혼자 방에 들어가지는 마."
"왜?"
"애들과 그냥 같이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텔레비전을 사랑하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남편과 나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만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싫었다. 그 핑계로 나는 방에서 내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나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 좋은 날이 더 많았다. 서로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거실에 나와 있으라니. "시간이 아깝잖아"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깝다니, 어쩐지 해서는 안 될 말 같아서. 그 후로는 의도적으로 거실에 나와 있으려 했다. 안 하던 걸 하려니 불편했다. 방으로 들어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그래봐야 내가 방에서 하는 일이라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뭘하든 나 혼자만의 시간 아닌가.

남편 말대로 나 혼자만의 시간, 그걸 포기하길 몇 번. 그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남편이 텔레비전만 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이들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아빠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함께 웃었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그게 무슨 말이냐고도 물었다.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성향인지 잘 모르겠어"라는 그동안의 내 하소연은 당연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데 평일엔 '직장에 가고 늦게 오니까', 주말에는 '평일에 못한 각종 집안 일 등등을 해야 하니까' 바빴으므로. 게다가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그 시간마저 내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그럴 밖에. 일기장에 나보다 아빠가 자주 등장하는 게 당연했다. 앤서니 브라운이 쓰고 그린 <고릴라> 속 아빠가 꼭 나 같았다.

동물원에 가고 싶었던 아이의 속마음은...

<고릴라> 표지
 <고릴라> 표지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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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고릴라를 무척 좋아하지만, 고릴라를 직접 본 적은 없었어. 한나 아빠는 무척 바쁘셨거든. 아빠는 한나가 학교에 가기 전에 출근하고, 퇴근해서도 일만 했어.

한나가 말을 걸려고 하면 아빠는 "나중에, 지금 아빠는 바빠, 내일 얘기하자"고 말했어. 일만 하는 아빠는 주말에도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그런데 말야, 신기한 일이 벌어졌지 뭐야. 글쎄 꿈에 그리던 고릴라가 한나에게 온 거야. 동물원에 가자면서. 고릴라와 동물원에 간 한나는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행복했어. 이게 다 꿈이라고 해도. 근데 말야. 잠에서 깨어보니 더 굉장한 일이 일어났어. 그게 뭐냐면...

그림책을 여러 번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고릴라>가 그랬다. 아빠와 동물원에 가게 되어 행복한 한나, 그 급격한 해피엔딩에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럴 땐 큰아이에게 물어보는 게 최선.

"그러니까 <고릴라> 이게 뭔 내용인 거야? 엄마는 잘 모르겠네."
"한나가 고릴라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만큼 아빠도 좋아한다는 거 같은데?"
"!!!(진정한 깨우침의 느낌표)."

그래 그런 거구나. 이제 이해가 가네. '고릴라'는 그저 핑계였을 뿐. 한나의 진심은 아빠랑 함께 있고 싶은 거였어. 아빠랑 동물원에 가서 고릴라도 보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은 거였구나.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런 꿈까지 꾸었을까. 바라던 일이 이뤄져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어른의 눈높이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림책 <고릴라>. 최근 들어 부쩍 "놀이동산에 가고 싶어", "불꽃축제가 보고 싶어" 하는 아이도 혹시 그런 마음이었을까. 굳이 묻지 않았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나도 같으니까. 그런데 어쩌지? 엄마도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덧붙이는 글 | - 베이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은수 옮김, 비룡소(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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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다다, #그림책, #고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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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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