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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외롭고 쓸쓸하다. 유독 아이의 뒷모습을 많이 비춘 그림책이다. 아이의 뒷모습을 통해 아이와 마주한 상황들은, 정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상황들보다 그림책의 주제의식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고릴라>는 소통없는 부녀의 관계를 통해, 가족간의 개별적인 고립과 소외 상태를 은유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모든 장면마다 지나친 직선들의 구획과 그림을 담고 있는 테두리(그림의 검은 틀)는 가족들의 거리감을 한층 더 심화시켜 주고 있다.

문장이 구어체 형식을 취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읽혀지지만, 굳이 문장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림이 이야기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그림과 그림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심장한 주제의식까지.

대개의 그림책이 글과 그림의 매개로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달되는 것에 호평을 하곤 한다. 헌데 이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조화에서 느껴지는 감동 이면에 깔린 통렬함이 있어 가슴이 쓰렸던 작품이다.

▲ 고릴라
ⓒ yes24
고릴라를 무척 좋아하는 한나, 실제 고릴라를 보지 못한 한나의 주변은 온통 고릴라 투성이다. 그림책, 액자, 스탠드 갓, 인형, 포스터 등등. 한나의 간절한 소망은 동물원에 가서 직접 고릴라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늘 일 때문에 바쁜 아빠는 한나의 관심에 귀 기울여 주지 못한다.

한나는 고릴라를 좋아하는 아이답게 자기가 그린 듯한 고릴라 그림을 벽에 붙이고 고릴라가 크게 그려진 그림책을 보고 있다. 그저 고릴라를 좋아하고 고릴라 보는 것을 꿈꾸는 수수한 아이. 그렇게 별스럽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 아이에게 환경은 너무도 냉소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침 식사 장면이 그려진 주방의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냉기가 서려 있다.

흑백의 큼직큼직한 바닥 타일, 모눈종이 모양의 벽면,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싱크대와 선반, 구림없는 식탁보와 같은 색 같은 무늬의 컵과 양념통 등, 이런 지나친 선들의 구획과 흠잡을 곳없는 주방의 정돈 상태, 그리고 식탁을 맴도는 정적이 아이를 위압하고 있다.

아빠의 옷차림과 표정에서까지도. 식탁 위의 줄무늬 그릇류와 같은 색으로 스트라이프 셔츠에 꽉 매인 넥타이 정장 차림의 아빠는 생기없고 냉혈적이며 무표정한 모습으로, 눈길을 신문에 떼지 않고 있다. 그와 마주한 한나는 뒷모습만 비쳐지고 있는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인가는 각자가 상상할 일이고, 시리얼 상자에 그려진 침팬지의 익살스런 표정만이 주방의 분위기를 무색케 하고 있다.

매 짝수 면에는 작은 그림에 테를 둘러 홀수 면의 그림과 연결을 자연스럽게 잇고 있다. 그러나 단조로워 보이는 이런 구조가 그림책의 전체적인 이미지와 맞물려 너무 획일적이고 갑갑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여러 차례 강조되는 부분인데, 이 그림책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직선들이다.

그림을 감싸고 있는 테를 비롯하여 액자와 집안의 가구들, 동물원 우리, 스크린과 어둔 관객석과의 경계 등등. 이런 것들이 한나와 아빠의 거리감 또는 단절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아빠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고릴라 인형이 크게 변하는 장면과 그것을 보고 놀래는 인형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작은 테 그림을 3단으로 배열한 것, 우리 안에 갇힌 침팬지의 슬픈 모습을 3단으로 잘라 배열한 것도 잠깐 시선을 상기시키고 재미를 주려 했다기보다 단절의 의미(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너무도 정교한 그림은 아이의 심리상태와 소통 없는 한나 가족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어슴푸레한 방안, 일을 하고 있는 아빠에게 한나는 무언가를 조르며 의자에 매달리듯 서 있다. 일에 파묻힌 아빠의 존재가 부재중임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아빠의 얼굴 윤곽은 희미하다.

지친 아빠는 한나와 아무 것도 함께 할 수가 없고, TV브라운관 빛만이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한나를 안고 있다. 그런 또 하나의 모습은, 동물원 우리에 갇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오랑우탄과 침팬지에게서 한나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또 다르게 중첩되고 있다. 한번 침팬지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누가 보이는지.

바람이 커서였을까, 아이들은 무언가를 얻기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한 습성이 있어서일까, 현실에서 얻어지지 않는 바람을 아이는 꿈을 통해 이룬다. 생일 선물로 고릴라 한 마리를 갖고 싶어하는 한나, 침대 발치에 놓인 고릴라 인형은 그 날 밤 진짜 고릴라로 변해 한나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다. 한나를 살짝 들어 올려 허리에 낀 채 나무를 타고. 타잔처럼. 동물원에 가는 것도 즐거운 일인데 고릴라와 나무를 타고 동물원에 가는 꿈은 이제까지의 우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키기에 충분하다. 소원했던 고릴라도 보고 또 고릴라가 나오는 영화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고, 고릴라 목에 무등도 타고, 춤도 추고….

행복했던 지난밤의 일들. 아이는 간 밤에 일어났던 일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꿈속의 세계로 인식하려 하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튿날 부리나케 그 사실을 아빠에게 알리려는 한나에게 아빠는 동물원에 가자고 한다. 아빠를 대신하여 고릴라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던 꿈속의 일들이 현실화되려는 순간이다.

한나의 반응은 어땠을까,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겠지. 아니다.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을 아이, "한나는 아빠 얼굴을 바라보았어." 이제 아빠를 대신했던 고릴라의 상상은 사라지고 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아빠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아빠가 일에서 잠시 해방되는 것에 대한 기쁨과 본인이 외로움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내쉬는 긴 숨소리인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땠든지, 아이들에게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았던 그림책이고 어른들에게는 가족의 정체성을 상기시켜 깨달음을 주었던 그림책이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먼저 보아야 할 그림책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는다. 우선 아이들에게 유익하게 읽혔을 만한 요소가 있었다면, 생활 주변의 소재거리를 가지고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간절했던 꿈이 이루어지는 것, 한나가 아빠와 함께 동물원에 갈 수 있게 되었고 고릴라와 동물원에서 보낸 일들은 아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어 감정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한나의 꿈은 경이로움으로, 기이한 꿈의 사건을 통해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곳곳에 숨어 있는 고릴라의 그림과 형체를 찾는 것에 있다. 앞표지부터 숨은 그림이 깔려 있지만 처음부터 눈에 띄지 않으리라. 본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숨은 그림, 아빠가 보고 있는 신문, 콘푸레이크 곽, 모나리자 액자, 스탠드 갓, 킹콩 브로마이드, 현관 밖 정원수, 야경 속에 그림자, 매표소 옆에 진열된 액자, 영화 속에 자유의 여신상 등을 발견한 후, 찾는다면 그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이 그림책에서 유독 눈에 띈 것은 그림의 섬세함과 정교함이다. 또한 그림 속에 나타난 모든 소재들의 정교한 묘사력뿐 아니라 그림 속에 내재된 분위기까지 미묘하게 그려 내고 있다. 고릴라의 털과 한나의 머리 결 잔 붓질, 꽃 문양 벽지, 책상과 의자의 나무 결, 카펫 문양, 소홀히 넘기지 않은 벽보나 액자 속의 그림 등이 실재보다 더 실물화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각 장의 그림에서 우러나는 분위기를 교묘하게 그려 내고 있는데,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감각적인 색상의 안배, 정교한 빛의 밝기로 잘 표현하고 있다.

침팬지와 오랑우탄의 정교한 표정 묘사는 우울함을 잘 자아내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빠의 방안이나 구석에서 홀로 TV를 보고 있는 한나 방안 등 곳곳에서 어둠과 빛의 조절을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내용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북돋는 효과를 주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한나가 고릴라와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밝은 톤의 분위기를 연출하여 환상의 세계임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또한 내용의 분위기와 변화에 무관하게 시종일관 원색적인 한나의 옷 색상이 주목시켰다. 빨간 티셔츠, 블루진, 빨갛거나 초록 또는 알록달록 양말, 빨간 줄이 있는 흰 운동화, 노랑잠옷, 빨간 가운, 빨간 장화, 초록의 더플코트 등 원색적인 옷차림은 아이다움 또는 '나(한나) 혼자와 다른 여러 것(어른들 또는 주변의 상황들)' 을 구분하고자 표현 한 작위적인 색상의 안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빠가 동물원에 가자고 한 화해의 그 날, 그제야 아빠의 옷차림도 원색적으로 그려졌던가. 청바지 뒷주머니에 삐죽 나온 노란 바나나로 유머스러움을 함께 하고.

한나와 고릴라는 나무와 나무가 이어진 가지에 즐겁게 매달려 있다. 두 나무를 이어 주는 가지는 한나와 아빠와의 강한 유대감과 따뜻함을 유지 바라는 상징물일까. 모자를 쓰고 리본을 맨 고릴라의 모습은 한나가 바라는 아빠의 모습일 것이다. 고릴라처럼 나무 가지에 매달려 항상 웃는 얼굴로 놀아줄 수 있는 아빠, 한나의 얼굴에서 신뢰감과 안정감이 비친다.

덧붙이는 글 |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의 베스트리뷰로 뽑힌 양동림(tain) 님의 글입니다.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은수 옮김, 비룡소(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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