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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어제 잠들기 전까진 피곤했는데 일찍 눈이 떠진다. 그래도 선명하게 소파 자국이 얼굴에 묻어난 걸 보아 하니 잠은 푹 잘잤나 보네. 곤히 자고 있는 두 사람이 깰까 봐 화장실 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처음에는 들어가기도 겁이 났던 곳이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물을 받아서 샤워도 하고 양치를 마쳤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더 친숙해진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공간이든 사람이든 어느 것과 가까워지는 데 꼭 시간이 비례하진 않는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일어났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면서 챠란은 "친구들이 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편히 더 쉬다 가, 하루 더 있다 가도 돼. 부담 갖지마"라며 웃으며 말해준다.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곧 떠나야 할 내 마음은 무거워진다. 굳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참 발걸음 떼기가 아쉬운 아침이다.

마지막이란 생각에 집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그동안 그의 집을 머물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특히 속이 텅 비어 있는 통나무 좌탁 안에는 방문자들이 남겨둔 선물과 나라별 화폐들로 가득했다. 나도 무언가 남기고 싶은 마음에 지갑을 뒤져 보았지만 고작 한국 돈 1800원이 전부였다. 내가 좌탁 유리를 빼내어 그 안에 돈을 집어넣자 그는 100원을 꺼내들고서 루피 환율로 얼마인지 물었다.

"진짜 얼마 안 되는 돈이니까 전혀 부담 갖지 마."

그는 100원만 받겠다고 한사코 난리를 쳤지만, 나는 정말 큰 돈 아니라며 더 난리를 쳤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서 다부는 웃기만 한다. 마지막으로 숙소를 나서기 전 다부에게는 마스크 팩, 챠란에게는 한국 과자를 건네주었다. 선물이라고 하기에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받고서 고맙다고 나를 꼭 안아주는 두 사람. 순간 이들에게 더 줄 것이 없나 머릿 속으로 더 좋은 걸 주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나에게 꼭 다시 연락하라며 머리에 뽀뽀를 해주는 챠란의 손길을 마지막으로 그의 집을 나섰다.

이제는 릭샤를 타도 흥정이 자연스럽고 혼자서도 무섭지가 않다. 참 일주일 같은 이틀을 보내고 이제는 긴 여정을 함께 하게 될 친구들을 만나러 뉴델리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역에서 표 끊는 사람들을 보니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마침 안토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가 보내준 사진이 이상해. 공항에서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

나는 공항이 아니라 뉴델리 역안에 있는 편의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이제서야 알아들은 듯, 공항에서 출발을 하겠다고 말했다. 시간을 보아 하니 얼추 맞을 것 같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델핀과 안토니가 보였다.

1년 만에 만나게 된 그들과 반가움에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결혼식에 초대받은 이들은 예비신랑과 함께 한국에서 친했던, 프랑스 친구들이다. 한국에서 친구로 만났던 두 사람은 어느새 어엿한 커플이 되어 있었는데, 나로서는 그 모습이 사뭇 어색하기도 정말 보기 좋아 흐뭇하기도 했다.

 오늘의 첫 물음표. 왜 저 여인은 신발을 신지 않고 있을까?
 오늘의 첫 물음표. 왜 저 여인은 신발을 신지 않고 있을까?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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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이 예약한 숙소로 가야 했는데  "나도 어떻게 가는지 몰라"라고 해 처음부터 헛웃음이 나왔다. 주소만 달랑 들고서 어떻게 숙소까지 가는지 막막했던 우리는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동을 하면서 둘 다 인도의 첫인상이 안좋다며 눈쌀을 찌푸리고 있다.

"내가 처음에 한국 왔을 때 정신도 하나도 없고 어지러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놓여진 것 같았어. 하지만 인도에 비하면 한국은 정말 천국이네."

지하철표를 끊다가 정말 지친 표정으로 델핀이 말했다. 아직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은 적응을 못한 듯했다. 둘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고있는 나는 그나마 적응을 한 것인가? 그래봐야 고작 이틀인데 말이다.

 한국사람 만나면 조금 부끄러워진다는 델핀의 타투. 내가 보기에 멋지기만 하다.
 한국사람 만나면 조금 부끄러워진다는 델핀의 타투. 내가 보기에 멋지기만 하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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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의 말대로 그린 파크(Green Park) 역에서 하차해 릭샤 흥정을 했지만 짐이 많아 좀처럼 먹히질 않았다. 두 대로 나눠 타야겠다며 각자 릭샤를 잡던 중 경찰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디로 가시나요?"

우리가 호스트의 집주소를 보여주자 건너편에 있던 릭샤 한 대를 불러준다. 가격까지 흥정해준 그 경찰 덕분에 셋이서 함께 갈 수 있었지만 뒷자석 공간이 부족하여 덩치가 제일 작았던 나는 운전자 옆에 대롱대롱 매달려 타야 했다. 정말 떨어질 듯 매달려서 내가 비명을 질러가는 와중에 운전수는 계속 길을 헤매고 델핀과 안토니는 웃겨 죽겠다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 상황에서도 허리를 꺽어가며 포즈를 취하고 급기야 스릴까지 느껴가며 10여분 만에 숙소에 다다랐다.

도착한 숙소는 경비초소가 따로 있는 고급 빌라촌이었다. 게다가 가정부가 두 명씩이나 있는 상류층 집이었는데 집 내부 장식은 호화롭고 정말 고급스러웠다. 우리 방도 크고 깨끗해서 정말 귀한 손님이 초대 받은 느낌이었다. 집주인이 제공해준 '웰컴 짜이'를 한 잔 하고서 곧장 점심식사를 위해 다시 숙소를 나섰다.

집주인은 '호스 카스 빌리지(hauz khaz village)'라는 곳을 추천해 주었다. 그곳 분위기는, 정말 내가 인도에서 처음 느끼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상점이 즐비한 젊은의 거리였다. 가로수길 같기도하고 삼청동 뒷골목 같기도 한 동네. 우리는 골목길에서 마주친 손가락 벽화가 가리키는 방향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이탈리안과 인도식 퓨전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일인당 500루피로(한화 약 구천원 정도) 정말 근사한 점심식사를 배불리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호스 카스 빌리지 주위를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아그라행 표를 끊기 위해 서둘러 뉴델리 역으로 이동했다.

 친절한 안내와의 조우
 친절한 안내와의 조우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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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에서는 조금 민망한 일도 있었다. "여기 남자들 진짜 수지만 쳐다보는 것 같아" 안토니가 말할 정도로 남자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델핀을 보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리산 산골마을에 나타난 금발의 백인여자를 쳐다보는 기분이랄까? 그냥 내가 자신들과 다르게 생겨서 그런가? 내가 입고 있는 나시티가 많이 야하게 느껴지나?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한 남자가 나를 좀 지나치게 쳐다봐서 급기야 자리까지 옆칸으로 옮기고 말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짙은 눈빛은 공포와 관심이 기묘하게 혼합된 느낌이었다.

 편리해 보이지만 앉을 수 없는 좌석
 편리해 보이지만 앉을 수 없는 좌석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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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역에 도착해서 챠란이 가르쳐준 매표소를 찾아갔지만, 직원은 다시 빠하르간지 쪽 반대편 역에 있는 외국인 관광객 티켓 판매소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인도에서 그것도 하루 전날 좋은 티켓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델핀과 안토니는 에어컨 없이는 절대 열차를 못 탄다며 못을 박았고, 나는 이동 시간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사항들을 말해도 소용 없었던 것은 셋다 여권을 가져오지 않아 티켓을 끊을 수 없었던 것. 급하게 티켓을 구해서 그런지 일반 좌석이 아닌 침대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다시 숙소까지 돌아가야 하는 바보짓을 반복하며 우리는 거의 실신 상태가 되었다. 릭샤를 타면서 도로 전체를 에워싼 매연을 그대로 들이마신 탓인지 목이 너무도 아팠다. 대형버스가 시동을 걸면서 뿜어내는 배기통 앞에서 숨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단거리는 괜찮았지만 장거리 릭샤는 40도를 넘나드는 더운날씨와 살인적인 교통체중이 더해져 가만히 앉아있는 일마저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오후에 티켓을 끊고 낮잠을 한숨 자고 챠란이 초대해준 파티에 가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왔다갔다 도로에서만 총 3시간 넘게 허비하며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종일 릭샤를 타면서 바라보았던 델리의 모습.

어째 몸을 돌아서 있는 사내는 전부 노상방뇨를 하고 있고, 시도 떼도 없이 울려대는 경적 덕분에 귀는 아직도 얼얼하다. 갑자기 운전 중 자리를 비우더니 다른 릭샤를 타라고 가리키는 운전수. 졸지에 도로 한 가운데서 차들을 세워가며 릭샤를 바꿔타기도 했다. 백발노인이 어기적거리며 4차선 도로를 건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짐에도 다들 표정하나 변함없다. 서로 끼여들다가 크게 부딪혀 한 릭샤는 크게 엎어졌는데 아무말 없이 그대로 운전해서 가버린다.

경적소리 때문에 릭샤를 뚝뚝이라 부르는 줄 알았더니 저렇게 툭툭 아무 일 없이 털고 일어나서 툭툭이인가 보다. 게다가 정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사내 한 명을 보자 우리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것은 정말 문화 충격이었다. 말리는 사람도 그를 잡아가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 사내의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이내 시선을 회피했다. 

 갑자기 운전 중에 사라진 릭샤기사.
 갑자기 운전 중에 사라진 릭샤기사.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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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릭샤만 8번을 탔던 오늘을 '릭샤의 날' 이라고 명했다. 셋 다 허기져 음식을 사기 위해 근처에 있는 슈퍼를 물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배달 음식 책자를 건네주는 집주인. 정말 인도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초고속 배달 탄두리 치킨을 마구 뜯어가며 주인집 옥상에서 꿀같은 휴식을 취했다. 다들 정신없이 음식을 먹는 와중에 하루종일 릭샤밖에 탄 기억이 없었던 나는 오늘 처음 인도에 도착한 친구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오늘 인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뭐야?"

델핀은 "릭샤 타고 있을 때 길가에서 알몸으로 도로를 질주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나와 안토니도 맞장구를 치며 같은 장면을 떠올렸다. 사실 멍하니 도로 밖을 쳐다보다가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던 순간이기도 했다. 보기 거북했다는(disgusting) 내 표현과는 다르게 전례없는 상황이(unprecedented)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며 델핀이 말했다.

혹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닐까? 단순한 거지처럼은 보이진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게 정말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안토니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인도 음식이 정말 맛있다며 난(둥글고 평평하게 생긴 인도식 빵)에다 탄두리 치킨 소스를 듬뿍 찍어먹으며 극찬을 하고 있다.

예상과는 전혀 달랐던 하루. 그래도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며 우리 셋은 각자 편한 포즈로 옥상 잔디밭 위에 누워 있었다. 정말 물음표 투성이었던 하루. 전례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곳. 그러게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길가에서 오늘 인도를 전부 여행한 느낌마저 드는구나. 전례없는 일을 눈 앞에서 겪게 해준 그 대단한 인도를.

 인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배달 치킨의 감격
 인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배달 치킨의 감격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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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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