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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를 만난 감동을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곧이어 라파엘로의 환생이라 불렸던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신기할 정도로 과장되고 상하로 길게 왜곡된 인체, 아래로 떨어질 듯 위태로운 아기 예수, 불안정할 정도로 측면에만 몰려있는 천사들, 성화임에도 불구하고 에로틱하게 노출된 천사의 다리 등 가히 매너리즘 양식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매너리즘'이지만, 이처럼 불안한 인체 표현과 신비한 상징들은 르네상스가 추구한 조화와 균형의 원리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매너리즘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베네치아 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세로로 긴 성모 상. 불안한 아기 예수의 자세, 에로틱한 천사의 다리. 비현실적인 구도와 묘사를 추구했던 매너리즘 양식의 대표작입니다.
▲ 목이 긴 성모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세로로 긴 성모 상. 불안한 아기 예수의 자세, 에로틱한 천사의 다리. 비현실적인 구도와 묘사를 추구했던 매너리즘 양식의 대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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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숨쉴틈 없이' 거장들의 명작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거장 중의 거장 티치아노를 만납니다. 먼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상 '플로라'를 만납니다.

보티첼리의 그림, '비너스의 탄생'과 '봄'에서 먼저 만난 적이 있는 꽃과 풍요의 여신 플로라. 하지만 티치아노의 '플로라'는 보티첼리의 플로라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맑고 투명한 피부, 만지면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질 것 같은 살결,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금발과 옷자락. 어떤 사내가 이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잘 알다시피 티치아노는 16세기 중반, 베네치아 화파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15세기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회화의 흐름이 16세기 초반의 로마를 거쳐 16세기 중반의 베네치아에서 끝난다고 했을 때, 티치아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최후의 거장인 셈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방식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피렌체 화파가 정확한 선으로 대상의 형태를 완벽하게 그려내는 드로잉을 회화의 기본으로 삼았다면, 베네치아 화파는 상대적으로 외면받았던 색과 빛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심지어 기본적인 스케치도 없이 물감을 묻힌 붓으로 쓱쓱 형태를 완성시켜 나갔죠.

그런 베네치아 회화의 정점에 티치아노가 있습니다.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화면 구성에 과감한 붓터치로 살아있는 색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캔버스 위에 유화'라는 서양 회화의 기본 매커니즘을 완성한 작가가 바로 티치아노죠. 그래서 티치아노를 '회화의 군주'라 칭하기도 합니다(티치아노 역시 베네치아 편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티치아노, '플로라',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회화의 군주로 평가받는 꽃과 풍요의 여신인 플로라. 자연스러운 색채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플로라 티치아노, '플로라',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회화의 군주로 평가받는 꽃과 풍요의 여신인 플로라. 자연스러운 색채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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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만난 '도발적' 누드

그 티치아노의 또 다른 명작이 눈앞에 황홀한 누드로 펼쳐집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입니다.

'베누스 푸디카(정숙한 비너스)' 자세를 취하려다 만 것 같은 포즈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그녀. 그녀는 보티첼리가 그린 관념 속 여인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여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녀들로 보이는 여인들은 그녀가 입을 옷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보는 이가 부끄러울 정도로 관람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죠. 그녀의 발 아래 졸고 있는 사랑스러운 강아지는 그림을 주문한 부부의 사랑과 신뢰를 상징합니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베누스 푸디카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도발적인 티치아노의 비너스. 서양 누드화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 우르비노의 비너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베누스 푸디카 자세를 취하고 있음에도 도발적인 티치아노의 비너스. 서양 누드화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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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부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비너스의 발 아래에서 포근히 졸고 있는 강아지는 부부간의 애정을 상징합니다. 드로잉보다 붓터치로 색채를 입혀가며 형상을 완성한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표현법이 보입니다.
▲ 강아지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부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비너스의 발 아래에서 포근히 졸고 있는 강아지는 부부간의 애정을 상징합니다. 드로잉보다 붓터치로 색채를 입혀가며 형상을 완성한 베네치아 화파 특유의 표현법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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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도발적인 누드는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 봅니다. 행여 다른 관람객이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그림 앞에 오래 있기가 민망합니다. 하지만 놓칠 수 없는 것은 역시 티치아노의 자연스러운 터치입니다. 비너스가 누워 있는 침대보의 촉감도, 그 위에 포근히 엎드려 있는 강아지의 부드러운 털도, 그리고 불경스럽게도 만지면 탄력이 느껴질 것 같은 그녀의 살결까지, 티치아노는 무슨 마법이라도 부려놓은 것일까요?

나뿐만 아니라 '우르비노 비너스' 앞에서는 누구랄 것 없이 넋을 잃은 것처럼 서 있습니다. 당연하겠지요. 누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이후 고야, 모네의 누드와 함께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누드화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비너스의 눈길을 뒤로 하고 다시 '우피치' 속을 걷습니다. 이제 또 '그'를 만날 시간입니다. 로마에서의 첫 날부터 이 미술 기행의 가장 핵심적 인물이었던 그, 카라바조입니다. 전시실 입구부터 '메두사'의 잘린 목이 공중에 뜬 상태로 관람자를 맞이합니다. 섬뜩하게 피를 흘리는 메두사의 얼굴은 이제는 익숙해진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입니다. 자기 혐오일까요? 아니면 자기 연민일까요? 카라바조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카라바조, '메두사',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목이 잘린 메두사의 모습을 묘사한 카라바조. 자기 혐오일까요? 자기 연민일까요?
▲ 메두사 카라바조, '메두사',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목이 잘린 메두사의 모습을 묘사한 카라바조. 자기 혐오일까요? 자기 연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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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포도 잎과 덩굴로 장식한 주신(酒神), '바쿠스'는 아름다운 와인잔을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라바조'답게 전혀 미화되지 않은 현실적인 주신의 얼굴이죠. 카라바조의 친구였던, 화가 마리오 몬니티의 얼굴을 묘사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술이 좀 약했던 모양입니다. 불콰하게 온통 취기가 오른 얼굴, 거기다가 이전까지 본 적 없는 평범한 남성의 적나라한 맨살은 앞서 본 티치아노의 '비너스'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어 정신이 번쩍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바쿠스가 걸치고 있는 하얀 천과 군데군데 썩은 곳이 보이는 과일 바구니의 묘사는 역시 사진을 능가하는 자연주의 회화의 진수라 할 수 있죠. 가히 명불허전, 카라바조입니다.

카라바조, '바쿠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주홍이 돋는 불콰한 얼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남자의 적나라한 맨살. 곳곳이 썩은 과일. 카라바조의 손을 거치면 신화의 신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이 됩니다.
▲ 바쿠스 카라바조, '바쿠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주홍이 돋는 불콰한 얼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남자의 적나라한 맨살. 곳곳이 썩은 과일. 카라바조의 손을 거치면 신화의 신도 이처럼 '현실적인'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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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카라바조의 그림에 넋을 잃고 있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무엇에 씌었는지 하마터면 그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놓칠 뻔한 것입니다. 그것도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 바로 옆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그녀의 명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만납니다. 로마 '바르베리니 국립 미술관'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만났고, 이곳 '우피치'에서도 보티첼리와 루벤스 등을 통해 몇 번이나 만난 '유디트'. 하지만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그 어떤 그림보다 강렬합니다.

화가였던 아버지의 부드러운 색채보다 카라바조의 강렬한 키아로스쿠로(명암 대비법) 화법에 감명을 받은 젠틸레스키. 그녀는 아버지의 동료 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그림을 배우는 도중 성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의 과정에서 여성으로 감내하기 힘든 모욕과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 그녀 스스로 성폭행 당했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었지요. 결국 타시는 8개월간의 짧은 감옥살이 끝에 풀려나고, 젠틸레스키는 그 과정에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인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 그녀가 존경했던 카라바조의 유디트보다 훨씬 더 강렬합니다.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인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 그녀가 존경했던 카라바조의 유디트보다 훨씬 더 강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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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의 용기'를 가진 여자의 영혼

그런데 그런 잊기 힘든 상처가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성장시켰나 봅니다. 이후 그녀의 그림은 강한 자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그녀의 명암과 음영은 카라바조보다 오히려 더 드라마틱합니다. 이 그림,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만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에서 만났던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면서도 스스로 섬뜩함을 느꼈는지 몸서리를 칩니다.

하지만 젠틸레스키의 유디트에게는 그런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소매까지 걷어붙인 건장한 팔뚝으로 조금의 망설임 없이 온 힘을 다해 유디트의 목을 베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기껏해야 오뉴월에 서리 정도만 내리는 우리네 인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강렬한 저항 의지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젠틸레스키는 자신의 그림을 주문한 한 남성에게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400년 전인 17세기. '남성'에 대응하는 '여성'이라는 기본적 인식 자체가 없었던 그 시절, 치열하게 '여성 자신의 삶'을 살다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이후 왠지 모를 묵직함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보다 벌써 오후 3시가 다 되어 갑니다. 오전 7시 무렵, 호텔에서 빵 몇 조각과 사과 한 개를 먹은 후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우피치'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말 그대로 발바닥에 불이 나고, 정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합니다. 단 한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경험을 도대체 몇 번이나 느꼈을까요?

'우피치 미술관'을 나오기 전 조금이라도 그 여운을 간직하고 싶어 미술관 2층 테라스에 마련된 작은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보니 '베키오 궁전'이 손에 닿을 듯 다가서고 저 넘어 '두오모'의 쿠폴라도 눈에 들어옵니다.

잠시 요기를 하려고 우피치의 테라스에 앉았더니 저처럼 참새가 내 옆자리로 옵니다.
▲ 우피치의 방울새? 아니 참새 잠시 요기를 하려고 우피치의 테라스에 앉았더니 저처럼 참새가 내 옆자리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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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파이와 탄산수를 주문해 놓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문한 음식보다 뜻밖의 귀여운 손님들이 먼저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참새들이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저 작고 앙증맞은 참새가 내 옆 자리 의자에 떡 하니 앉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노리는 것은 늦은 내 점심 식사겠지요. 인간에게 거의 길들여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우피치'의 참새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반갑고 사랑스럽습니다.

이곳이 아니면 참새들을 이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 그들이 라파엘로의 방울새와 닮아서 그런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기꺼이 내 소중한 점심을 그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애플파이 몇 조각을 던져주니 순식간에 낚아채 갑니다. 파이를 못 받은 몇 녀석은 또 다시 배고픈 병아리마냥 깡총거리며 나에게 다가 옵니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다른 손님들도 녀석들에게 자기들의 식사를 조금씩 나누어 줍니다. 정말, '우피치 미술관'은 반드시 다시 와야 할 곳입니다. 

(8-7. 피티궁전 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티치아노, #카라바노, #젠틸레스키, #우피치미술관,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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