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갑 감독                 화성 히어로즈 김성갑 감독이 감독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김성갑 감독 화성 히어로즈 김성갑 감독이 감독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강윤기


처음이라는 말처럼 설레는 단어가 있을까? 첫눈, 첫 만남, 첫 키스 등 '처음'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으로 이끈다. KBO리그의 미래 '퓨처스리그'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첫발을 내딛는 사회인으로서의 첫 마음가짐, 첫 직장. 부모들에게는 아직 사회에 내보내기에 걱정되는, 덩치만 큰 아이가 처음으로 경쟁하는 곳이다.

2군 감독은 수많은 야구 선수를 둔 부모들에게는 자기 아이의 첫 양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거기에 자신이 조금만 낮추어 마음을 열고 선수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감독이 있다. 20년 넘게 한 직장에서 묵묵히 달려온 그는 바로 걸그룹 아이돌 유이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진 김성갑(53) 화성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2군) 감독이다.

선수 시절의 김성갑은 어땠을까?

김성갑은 어릴 때부터 몸도 약하고 말랐다. 그렇지만 하늘은 그에게 재능을 주었다. 그것은 타고난 운동신경이었다. 날렵함을 바탕으로 학창시절 내내 뛰어난 운동 능력을 보였다.

100kg가 넘는 거구들이 즐비한 프로 무대에서 57~58kg에 불과한 선수가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김성갑은 1987년 빙그레에서 전게임 출장을 하는 등 투철한 자기관리와 성실함을 무기삼아 프로 통산 942경기를 출전했다. 조금만 운이 따랐다면 1000게임을 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 감독은 그 부분에 관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 했다.

한창 혈기 왕성했던 건국대학교 시절에는 1학년 때부터 4년 내내 주전으로 전 게임에 나서며 활약했다. 대학 시절 그의 몸무게는 52kg에 불과 했다. 주변 사람들은 몸무게도 적고 힘도 없어 보이는 그가 어떻게 야구 선수생활을 건강히 할 수 있는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4년 내내 주전으로 활약하며 건국대학교 4번 타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에이스 투수를 상대할 때도 절대 주눅들지 않고 매섭게 방망이를 돌렸다.

대학 시절 이름을 날린 그를 삼성에서 눈여겨 보았고 1985년 삼성에 입단했다. 그러나 삼성에서는 11게임만을 출전하고 곧바로 군 입대를 했다. 체구가 작았던 김성갑의 성장 가능성을 구단이 낮게 평가한 것이다. 결국 군 생활 도중에 신생팀 빙그레로 트레이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런 우역곡절을 겪다보니 김 감독은 일찍 결혼한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됐다. 그는 아내와 함께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야구 생각이 더 간절했다. 빙그레에서는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갑 감독은 결혼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빨리 하면 할수록 좋다며 기자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84년 대학교 4학년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했다. 남들과 달리 빨리 결혼한 편이다. 저는 선수들에게 결혼을 빨리 하라고 장려한다. 집사람이 '내조의 여왕'이다. 체력관리를 쉽게 했다. 집에서 밥을 챙겨먹고 안정을 찾았다. 부양가족이 생기다 보니 책임감도 생기고 야구를 진중하게 하게 된다. 총각일 경우는 아무래도 유혹거리가 많다. 친구들과 어울려 소주 한잔 하루 이틀 하다보면 어느덧 노는 것에 빠져버리게 된다."

안정을 찾아서일까? 신생팀 빙그레에서 그는 의미 있는 기록을 여럿 세웠다.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은 69경기 무실책 기록이다(1987년10월 4일~88년7월20일). 5시즌을 뛴 그는 1990년 시즌 후 구단과 불편해지자 미련없이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이후 대전에서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태평양에서 5시즌을 뛰었다.

이후 1994년에는 한국시리즈를 경험했고 1995년엔 올스타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통산 타율 2할3푼5리 567개의 안타, 홈런은 14개를 기록했다. 타율은 낮았지만 안정된 수비력을 과시했다. 이듬해 태평양 돌핀스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팀이 새로이 창단될 때 그 또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그것은 바로 선수에서 초보 코치 김성갑으로의 출발이었다.

"선수생활을 끝내고 코치 생활을 2군 코치부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철저히 기본부터 가르치기로 했다. 그래야 기량 향상이 된다고 지금도 믿는다. 2군 코치들이 정말 중요하다. 첫 스타트를 잘못 잡으면 자칫 전도유망한 선수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은 선수들과 소통이다. 소통이 되지 않아 오해가 쌓이면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개개인이 무엇이 필요한지 대화를 통해 지도를 하려고 노력했다." 

간혹 강압적 태도로 선수들과 대화를 하지 않는 야구 지도자도 있다. '이게 도대체 왜 안 되는 거냐?'는 식의 구태의연한 지도로 아마추어 야구를 병들게 하는 현실에서 김성갑 감독의 소통은 기자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선수 개개인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특성을 살리는 위주로 지도한다. 요즘 선수들은 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그의 야구인생에서도 시련은 있었다. 1997년에 발생한 IMF 경제위기는 가장인 그에게도 비껴가지 않았다. 당시 KBO(한국야구위원회)는 코치 수에 제한을 두었다. 김성갑은 12명 코치에 들지 못했다. 결국 그는 타의적으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1년을 쉬다 보니 정말 답답했다. 보다 못한 집 사람이 어디든지 나가라고 배려해 줬다. 그래서 캐나다로 무작정 3개월 정도 나가 있었다. 어학연수를 통해 공부를 좀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공부가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웃음) 그라운드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책상에 앉아 있겠나? 힘들었다. 오랫동안 야구만 해서 몰랐는데 혼자 떨어져 있어 보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생기더라. 가족에 대한 소중함도 생겼다."

그렇게 3개월을 캐나다에 있다 다시 서울로 복귀해서 서울고등학교 인스트럭터로 1년 동안 지도했다. 그리고 그를 잊지 않고 현대에서 코치로 복귀 시켰다. 오히려 선수 때보다 코치 때 더 간절하게 열심히 가족을 위해 일한 그에게 지난 1년간의 시련은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 1년 동안 쉬면서 수입이 없다 보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아시다시피 코치는 매년 1년씩 계약이다. 구단에서 보기에 선수들이 기량 향상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그래야만 구단이 나와 계약을 하지 않겠나? 그때의 그 경험 때문에 더 절실하게 지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조금만 낮추면 된다

김성갑          화성히어로즈 김성갑 감독

▲ 김성갑 화성히어로즈 김성갑 감독 ⓒ 강윤기



KBO리그 2012 시즌은 KBO 감독들의 무덤이었다. 당시 한화를 이끌던 한화 한대화(현 KBO경기운영위원) 감독과 넥센 히어로즈의 김시진(현 대표팀 전력분석팀장) 감독이 도중에 사퇴했다.

그리고 당시 넥센 히어로즈의 수석코치였던 김성갑은 감독 대행의 자리에 올랐다. 프로 야구 1군 감독은 10명밖에 없는 명예로운 자리다. 많은 선수, 코치들이 꿈꾸는 자리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감독이라는 호칭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손사래를 쳤으며 방송사와의 인터뷰를 절대 하지 않았다. 왜 그랬냐는 기자의 질문에 "감독 대행 시절에는 방송사 인터뷰를 절대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감독실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하는 기본적인 게임 관련 멘트 정도만 홍보팀을 통해 제공했다. 게임에 이겼다고 하이파이브 하러 앞장서 달려 나가고 이런 부분은 내가 모시던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김 감독은 "앞으로도 예의를 아는, 정도를 지키는 선수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사람은 기꺼이 자기를 낮출 줄 안다'
그렇다. 야구도 야구지만 인성도 중요하다. 야구를 잘하는데 인성까지 훌륭하면 그 선수는 스타가 된다. 그러나 야구를 잘하는데 인성이 없으면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팀의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것을 아는 선수를 만들기 위해 김성갑 감독, 그는 오늘도 묵묵히 그라운드에서 땀방울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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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U, 스포츠 야구 전문기자 , 강윤기의 야구 터치 운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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