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가면을 쓴 에릭 뮤지컬 <팬텀>의 주인공 '에릭'은 분명 선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예민하고, 집착적이며, 사람을 쉽게 죽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캐릭터다. <팬텀>의 주연 배우들은 이를 설득력 있게 잘 표현한다.

▲ 가면을 쓴 에릭 <팬텀>은 태생적으로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며, 여러모로 비교 열위에 있는 극이다. 하지만 분명 관객을 홀리는 <팬텀>만의 매력이 있다. 하필이면 비교되는 작품이 <오페라의 유령>이었기 때문에, 본래 극이 가지는 장점이 평가 절하되는 측면이 있다. ⓒ EMK뮤지컬


지난 4월 28일, 화려하게 국내 초연의 막을 올린 뮤지컬 <팬텀>이 7월 26일 커튼을 내렸다.

뮤지컬 <팬텀>은 태생적으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다. '유령'과 크리스틴의 관계를 조명한 것도 그렇고, 파리 오페라 극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그리는 부분 역시 같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참여한 <오페라의 유령>은 <팬텀>보다 먼저 대중 앞에 나섰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4대 뮤지컬의 하나로 꼽히는 <오페라의 유령>이 워낙 화려한 입지전적의 작품이다 보니, 후발주자 <팬텀>이 이래저래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유령>이 워낙 위대한 작품이라, 지나치게 <팬텀>이 격하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이미 봤거나, 앞으로 볼 사람이라면 뮤지컬 <팬텀>은 무조건 봐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뮤지컬 팬이라면, <오페라의 유령>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극이다.

크리스틴을 향한 에릭의 사랑

크리스틴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에릭 뮤지컬 <팬텀>에서, 에릭은 크리스틴의 재능을 단숨에 알아보고 그녀의 비밀 과외 선생이 된다. 크리스틴이 일방적으로 에릭의 도움을 받는 것 같지만, 자신의 재능을 남들에게 드러낼 기회가 없는 에릭에게 크리스틴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크리스틴은 에릭의 뮤즈로 거듭난다.

▲ 크리스틴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에릭 뮤지컬 <팬텀>에서, 에릭은 크리스틴의 재능을 단숨에 알아보고 그녀의 비밀 과외 선생이 된다. 크리스틴이 일방적으로 에릭의 도움을 받는 것 같지만, 자신의 재능을 남들에게 드러낼 기회가 없는 에릭에게 크리스틴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크리스틴은 에릭의 뮤즈로 거듭난다. ⓒ EMK뮤지컬


뮤지컬 <팬텀>과 <오페라의 유령> 모두, '음악의 천사', '오페라의 유령'으로 불리는 에릭이 주인공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독히도 추한 몰골을 지닌 그는, 자신의 외모를 가리기 위해 언제나 가면을 쓰고 다닌다. 이 오페라 가면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자아 표현의 수단이 된다.

<오페라의 유령>과 <팬텀>이 에릭을 조명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에릭과 크리스틴, 라울의 삼각관계에 초점을 맞춘 <오페라의 유령>은, 엄밀히 말해 한 편의 화려하고 장대한 '치정극'이다.

에릭이 크리스틴에게 품는 감정은 어떤 하나의 순수한 무언가가 아니다. 큰 바탕은 사랑이지만,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도 그 색이 다양하다. 연인과의 사랑, 부모와 자식의 사랑, 스승과 제자의 사랑, 친구 사이의 사랑 이 모든 감정이 큰 틀에서 '사랑'으로 통칭한다. 에릭에게 크리스틴은 제자이자 연인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에릭이 크리스틴을 향한 감정은 그래서 '사랑'이라고 도식화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소유욕, 성욕과 같은 욕망도 뒤섞여 있고 음악적 영감과 인정 욕구도 엉켜 있다.

<오페라의 유령>은 이 여러 감정 중 '연인으로서의 사랑'에 무게 중심을 둔 채 비극적 드라마를 완성한다. 반면 <팬텀>은 아니다. <팬텀>은 철저하게 주인공 에릭에게 초점을 맞췄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을 갖고자 광기에 휩싸였던 에릭은, <팬텀>에서 또 다른 종류의 광기를 보여준다.

"너의 노래 없는 삶은 의미 없는 죽음 날개를 잃은 새들처럼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갈 운명 버려진 기억 속에
크리스틴 그녀 없는 삶은 끝이 없는 사막
숨을 조이는 악몽 같아 혼자 쓸쓸히 난 네 손길만 기다려
내 맘 속에 묻혀 꺼낼 수 없는 음표들처럼
절정이 사라진 교향곡처럼 난 무대 위 박잘 놓쳐버린 어느 가수처럼 길을 잃고 우는 아이."

에릭과 크리스틴은 서로를 "음악의 천사"라고 칭한다. <팬텀>에서 에릭이 크리스틴을 탐하는 이유는 연정보다는 다른 감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는 크리스틴이 "나만의 연인"이 아니라 "나만의 음악"이 되리라고 말한다. 크리스틴은 에릭에게 예술적 감흥을 불어넣는 뮤즈(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그리스 신화 속 여신들)이다. 천사나 여신은 숭배와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지만, 소유와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는 다소 먼 존재이다.

샹동 백작을 질투하는 에릭 뮤지컬 <팬텀> 속에서 크리스틴 다에를 연모하는 에릭은, 필립 드 샹동 백작과 크리스틴이 친해지는 것에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그러나 에릭이 크리스틴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애정에 대한 갈망이나 소유욕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감정이 얽혀 있다.

▲ 샹동 백작을 질투하는 에릭 뮤지컬 <팬텀> 속에서 크리스틴 다에를 연모하는 에릭은, 필립 드 샹동 백작과 크리스틴이 친해지는 것에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그러나 에릭이 크리스틴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애정에 대한 갈망이나 소유욕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복잡다단한 감정이 얽혀 있다. ⓒ EMK뮤지컬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외모 때문에 에릭은 이 거대한 오페라 극장 지하에 갇혀 있다 (원작의 서커스단 이야기는 <팬텀>에서 제외됐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뽐내며 관객과 호흡하는 오페라 극장이, 에릭에게는 구속과 억압의 공간이다. 그가 오페라 극장 운영에 개입하며, 주연 배우와 작품을 선정하는 건 단순한 '깐깐함'이 아니다. 그가 무대에서 나설 수 없다면, 하다못해 자신이 만족할 수준의 무대는 나와야 한다. 음악을 위한 전당이지만 정작 본인은 음악을 할 수 없는 모순적 공간 내에서 자신의 열망을 간접 표출하는 셈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하고,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단순히 '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재능이라는 무기를 마음껏 쓸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인정받을 때 자존감은 올라간다. 재능의 발현은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에릭에게 음악이 인생의 전부인 이유다.

그랬던 그가 비로소 자신의 노래를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부르게 된다. 그녀가 바로 크리스틴 다에. 가공되지 않은 원석 같은 그녀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기뻐하는 건 에릭 자신이다. 크리스틴이 재능을 만개한 것에 환호하지만, 이 때문에 "유일한 나의 빛"이었던 어머니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한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오페라 극장에 갇혀 마음껏 이를 펼칠 수 없었던 에릭. 매번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상처만 입은 그에게 크리스틴의 존재는 '예쁘고 노래 잘하는 이성' 이상일 수밖에 없다. 크리스틴이 있기에 감옥은 고향으로 탈바꿈한다. 그는 크리스틴 앞에서야 비로소 유령이 아닌 에릭이 된다.

플롯의 구멍 메우는 에릭의 강한 흡입력

노래하는 에릭과 크리스틴 뮤지컬 <팬텀>의 넘버가 <오페라의 유령>의 노래보다 '임팩트'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귀 기울이면 비스트로, 그 어디에, 너는 음악 등 아름다운 넘버들이 여럿 있다.

▲ 노래하는 에릭과 크리스틴 뮤지컬 <팬텀>의 넘버가 <오페라의 유령>의 노래보다 '임팩트'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귀 기울이면 비스트로, 그 어디에, 너는 음악 등 아름다운 넘버들이 여럿 있다. ⓒ EMK뮤지컬


흔히 노래는 <오페라의 유령>이 낫고, 스토리는 <팬텀>이 낫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편견이다. 관객이 계속 따라서 흥얼거리게 할 '꽂히는' 넘버가 없다는 건 <팬텀>의 큰 단점이지만, 그렇다고 <팬텀>의 음악이 <오페라의 유령>보다 뒤처진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 어디에', '내 고향', '넌 나의 음악' 등 유려한 가사와 클래식한 음률이 잘 맞아떨어지는 곡이 여럿 있다.

오히려 이야기 흐름을 봤을 때, <팬텀>은 '탄탄'하거나 '매끄러운' 극이 아니다. 원작 소설의 재현과 변용 그리고 압축의 과정에서 다소 허술해진 지점들이 눈에 띈다.

보통 서사가 무너지면 아무리 듣기 좋은 넘버나 배우의 열연도 함께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뮤지컬이 외장에만 치중하다가 관객에게 실망을 선사했는가. 그런데 <팬텀>은 다르다. 아쉬운 부분은 분명 있지만, <팬텀>은 이 플롯의 허술함을 교묘하게 감추는 데 성공한다. 관객을 공감의 틀 안에 깊숙하게 끌어들인다. <팬텀>의 스토리가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극을 이끌어가는 '인물'에 있다. 에릭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갈등이 단순히 무대 위 한 천재의 고통이 아니라 관객의 고통과 교집합이 있기 때문이다.

<팬텀>의 에릭은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 여러 종류의 가면을 쓰며 자신을 드러낸다(그 가면들이 자꾸 말썽을 부려 배우의 연기를 방해할 줄 누가 상상했으랴). 마치 사람의 표정이 감정에 따라 바뀌듯이 말이다. 에릭에게는 가면을 '쓰고 싶은 욕망'과 '벗고 싶은 욕망'이 공존한다. 어려서부터 버림받고, 외모에 의해 격리되었던 그는 가면 안 모습이 외부에 공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우연한 계기로 자신을 보게 된 사람을 살해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비단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게 에릭뿐인가. 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대할 때 가면을 쓴다. 가면 뒤에 숨어 우리의 솔직하고 연약한 내면을 감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기 싫어 가면 뒤에 나를 숨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상반된 두 종류의 욕망을 동시에 느낀다. 상대와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상대가 원하는 가면을 쓰는 것 그리고 가면을 벗고 진솔한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것.

에릭과 크리스틴 역시 이러한 욕망으로 충돌한다. 에릭은 계속 크리스틴 곁에 있고 싶다. 자신의 가면 뒤 얼굴을 보면 그녀가 떠날까봐 크리스틴의 요구에 격렬하게 저항한다. 반대로 크리스틴은 에릭과 진심으로 마주하고 싶다. 정체불명의 음악 교사가 아니라, 그 뒤에서 상처받아 떨고 있는 에릭과 교류하고 싶다. '내 사랑' 노래를 부르며 크리스틴은 자신의 견고한 의지를 확인한다. 에릭을 사랑하고 있다고, 에릭의 어머니도 그의 본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자신도 볼 수 있으리라 확언한다.

주저하면서도 가면을 벗던 에릭의 마음이 어땠을까. 우리는 상대 앞에 진심을 꺼내놓을 때마다 주저한다. 내 가면 뒤 진짜를 드러냈을 때 상대가 다치거나 오해하면 어쩔까, 그래서 관계 자체를 상실하면 어쩌나 고민한다. 그러면서도 나의 진심이 상대에게 닿기를,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에릭은 크리스틴의 요구에 마지못해 가면을 벗지만, 민얼굴로 표상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기를 바란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뀐다. 크리스틴의 비명과 도망. 우리는 가면만 보고 가면 안을 섣불리 판단한다. 진정성을 요구해놓고, 정작 가면 안을 보았을 때 실망하거나 회피하는 인간관계가 다반사다. 그런데도, 이런 갈등의 과정 없이 우리는 진실로 서로를 대할 수 없다. 가면을 벗은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피상적이고 얕은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상처를 줄 것을 알면서도 가면을 벗기고, 벗는다. 그리고 그 안까지 포용해줄 누군가를 찾아 방황한다.

극의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는 에릭 앞에서 크리스틴은 무릎 꿇고 그의 가면을 벗긴다. 그리고 그에게 이별의 마지막 입맞춤을 선사한다. 에릭은 연모의 대상이자, 어머니를 대체하는 존재이자, 음악의 천사, 예술의 여신, 자신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있게끔 만드는 한 여자에게 큰 선물을 받는다.

그토록 애타게 크리스틴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에릭, 드디어 그녀는 그에게 왔다. 그녀는 결국 그의 추한 외모까지 온전히 마주했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였다. 추악한 외모의 유령이 아니라, 한평생 상처받았던 한 인간 에릭을 포용했다.

"넌 나의 음악 고귀한 음악 넌 나의 환한 빛
넌 나의 음악 꿈같은 음악 그대는 내 인생."

"알 수 있어 환상이 아니야. 그녀는 내게 와 나만의 음악이 되리라."

크리스틴은 에릭에게 와서, 에릭 인생의 전부였던 '음악'이 된다. 에릭은 크리스틴을 통해 생의 끝에서, 생의 전부를 얻었다. 크리스틴은 에릭에게 '구원'이었다.

뮤지컬 <팬텀> 포스터 지난 4월 28일부터 7월 26일까지, 뮤지컬 <팬텀>이 국내 초연에 나섰다. 태생적으로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며, 여러모로 비교 열위에 있는 극이다. 하지만 분명 관객을 홀리는 <팬텀>만의 매력이 있다. 하필이면 비교되는 작품이 <오페라의 유령>이었기 때문에, 본래 극이 가지는 장점이 평가 절하되는 측면이 있다.

▲ 뮤지컬 <팬텀> 포스터 지난 4월 28일부터 7월 26일까지, 뮤지컬 <팬텀>이 국내 초연에 나섰다. 뮤지컬 <팬텀>의 주인공 '에릭'은 분명 선한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예민하고, 집착적이며, 사람을 쉽게 죽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캐릭터다. <팬텀>의 주연 배우들은 이를 설득력 있게 잘 표현한다. ⓒ EMK뮤지컬



○ 편집ㅣ김준수 기자


뮤지컬 팬텀 오페라의 유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