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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때는 지난 2월이었다. 당시 나는 업무 차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 국가정보원을 방문했다. 그때 국정원 담당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국정원 홍보관에서 나는 아주 뜻밖의 기록을 보게 되었다. 국정원이 자신들의 모체인 1961년 6월 중앙정보부 창설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담은 '국정원 주요 연혁' 자료에서였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아래 중정)가 창설된다. 초대 부장은 국회의원 9선을 지내고 정계 은퇴한 김종필 전 의원. 이어 많은 이들을 공포스럽게 만들었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정 부훈이 제정된 때는 같은 해 9월이라고 홍보 판넬에 적혀 있었다. 그때였다. 이어지는 연표를 읽어 보던 중  나는 매우 이상한 기록을 보게 됐다. 악명 높은 중정 시대에 그들이 거둔 대공 치적 성과를 기록한 내용이었다.

국가정보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당시 부훈 및 국가정보원 원훈
 국가정보원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당시 부훈 및 국가정보원 원훈
ⓒ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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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스스로 인정한 조작 '동백림 간첩단 사건'

악명 높던 '중앙정보부'가 박정희 독재 권력 하에서 적발한 공안 사건은 참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인민혁명당 사건'이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다시 10년 후인 1974년에는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인 발표를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이가 구속됐고, 특히 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는 여덞명을 사형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훗날 전부 무죄로 드러났다. 재심 결과 중정이 고문 조작한 사건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런 사건 중 또 하나가 1967년 7월 중정이 발표한 '동백림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당시 중정은 독일과 프랑스로 유학 간 학생 또는 교민 등 194명이 동베를린 내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 교육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세계적인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과 화가 이응로 등이 이 사건 당시 간첩으로 몰렸으며 시인 천상병 역시 수사 과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죽을 때까지 휴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중정 시절 얻은 '대공 치적'이라며 자랑처럼 써 놓은 이 사건은 사실 '중정의 조작'으로 밝혀진다. 주목할 점은 이를 밝혀낸 기관이 다름 아닌 국가정보원,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2006년 1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체 조사결과 과거 중정이 발표한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은 그 자체가 조작이었다"고 고백한다(관련 기사 : "박 정권, 동백림사건에 '간첩죄' 무리하게 적용").

사실은 1967년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공화당이 대규모 부정 선거를 했고 이 때문에 연일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계속되자 이를 잠재우고자 사실을 왜곡·과장해 만든 사건이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국정원 발전위는 피해자들에게 정부가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이것이 바로 '1967년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의 진실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들이 스스로 고백한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에 대해 국정원은 자기들 홍보실에서 찾아온 방문객을 상대로 중정 시절 자신들이 거둔 대공 실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하지만 이건 '새발의 피'였다. 국정원은 1974년 2월 당시 중정이 발표한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역시 대공 치적이라며 또 써 놓고 있었다. 과연 사실일까?

재심 결과 무죄 판결 난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1974년 3월 15일 중앙정보부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이른바 '울릉도 일가족 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한다. 말 그대로 울릉도를 거점으로 하는 간첩 조직망이 일망타진 됐다는 것인데 남편과 아내, 또 그의 아들과 일가 친척 관계로 얽힌 일가족이 간첩 또는 간첩임을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모두 47명이 검거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놀랐다. 일가족이 울릉도·서울·부산·대구·전북 등에서 암약하며 북한을 왕래하는 등 간첩 활동을 하다 중정이 적발했으니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줬을까. 결국, 이후 이 사건 관련자 중 3명은 재판 결과 간첩 혐의가 인정돼 사형 선고 후 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한 구속자 중 상당수가 징역 10년 이상을 선고 받는 등 매우 엄중한 처벌을 받은 사건이었다. 사실이라면 '간첩 잡는 공안 기관'으로서는 자랑할 만한 그 당시 성과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건 역시 중정 시대 조작된 대표적 공안 사건 중 하나로 밝혀졌다. 사건 이후 이 사건 구속자와 가족들은 차마 죽을 수도 없는 억울한 지경 속에서 연명했다. 가슴에 한이 켜켜이 쌓인 채 울분 속에서 숨만 쉬고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행위를 중정이 조작해 간첩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2006년 7월 26일, 이 사건 당시 간첩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그리고 2심에서 다행히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이성희 전 전북대학교 수의학과 교수가 제일 먼저 나섰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아래 진화위)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가던 2010년 6월 30일, 진화위는 이 전 교수의 진정 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진실은 '중정에 의한 조작 사건'. 진화위는 권고에서 불법 구금 및 가혹 행위로 조작한 이 사건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재심 조치하라고 발표한다.

이후 2010년 12월 재심을 청구한 이성희 전 교수에게 대한민국 법원은 2013년 6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12월 11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이성희 전 교수에게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간첩 혐의에 대해 다시 선고한다. 대법원 최종 판결은 '무죄'였다. 무려 40년 만에 밝혀진 진실이었다(관련기사 : '울릉도간첩단' 40년 만에 무죄를 확정받다). 이후 대법원은 이 전 교수를 따라 재심을 청구한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에게 연이어 무죄 선고를 내렸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 중정이 조작한 대표적 간첩 사건 중 하나인 '1974년 울릉도 거점 일가족 간첩단 사건'의 실체였다.

국정원이 자랑하는 치적은 모두 '조작' 사건

한편 국정원이 중정 시절 이룬 '대공 치적'이라며 홍보관에 기록한 공안 사건은 모두 세 가지였다. 그 마지막 세 번째가 1975년 11월 적발했다는 '학원 침투 간첩단 검거 사건'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사건 역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 사건 역시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1975년 11월 22일 당시 중정은 김동휘 등 재일동포 유학생 12명과 국내 대학생 9명 등 21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한다. 훗날 '재일교포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불리게 된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구속된 이들 중 4명은 간첩 혐의가 인정돼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외 구속자 역시 상당히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한편 사형 선고 받은 4명은 이후 전원이 사면을 받아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달리 사형장에 서서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만은 면하게 된다.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건 발표 초기부터 이 사건은 조작 논란에 휩싸였다.

그 후 세월이 흘렀다. 이 사건 당시 징역 4년을 받아 복역했던 김동휘씨가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정을 낸 것은 2006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2010년 5월 18일, 진화위는 4년 만에 그 결과를 발표한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진화위는 이 사건 당시 영장도 없는 가운데 김동휘씨 등을 중정이 불법 연행했고 이후 20일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구타 등 가혹 행위와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냈음을 밝혀냈다.

이후 김동휘씨는 이러한 진화위 결정을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5월 24일, 법원은 재심 결과 김동휘씨에게 무죄를 확정한다. 결국 국정원이 자랑하던 중정 시대 자랑스러운 치적이라며 홍보하는 세 건 모두 '고문과 강압 수사로 빚어낸 전형적인 공안 조작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국정원의 잘못된 중정 시절 '대공 치적' 홍보를 확인한 후 일정 말미에 함께 자리한 국정원 고위 책임자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국정원 홍보관에 설치된 '국정원 역사 주요 연혁' 중 중정 시절 치적으로 기록한 사건 전부 재심 결과 무죄로 밝혀진 사건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특히 2006년 국정원 스스로 조작을 인정한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을 그로부터 9년이 지나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홍보하는 게 말이 되냐고 따졌다. 그러자 관계자는 "홍보관에 그런 내용이 있냐?"며 되묻더니 "확인 후 사실이면 수정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직원이 홍보관에 들어갈 일이 없다 보니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몰랐다. 변화된 현재 시점에서 잘 살펴 바로 잡겠다"고 약속했다.

선선히 답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제 해결되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확인 결과, 국정원은 달라지지 않았다.

국정원 홈페이지, 조작 무죄 사건 여전히 삭제하지 않아

국가정보원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중앙정보부 시절 '대공 치적'. 재심 결과 무죄로 판결난 사건 또는 스스로 조작 사건임을 인정한 사건들을 여전히 중요 실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내 '주요 연혁' 안내 캡쳐 국가정보원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중앙정보부 시절 '대공 치적'. 재심 결과 무죄로 판결난 사건 또는 스스로 조작 사건임을 인정한 사건들을 여전히 중요 실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 국가정보원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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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이 문제를 제기한 후 나 역시 잊고 있었다. 그날 분명하게 지적했으니 국정원에서 당연히 바꾸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혹시' 하는 의심이 든 것은 최근이었다. 그래서 국정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가 '국정원 역사' 메뉴중 '주요 연혁'을 클릭한 순간, 결과는 정말 실망스러웠다.

국정원 인터넷 공식 홈페이지 중 관련 내용은 지난 2월 당시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1967년 동백림 사건'과 '1974년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그리고 '1975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은 국정원이 중앙정보부 시절 일궈낸 '위대한 대공 치적'으로 당당히 기재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대한민국 법률에 따라 재심 결과 무죄 선고된 이 사건에 대해, 더구나 국정원 스스로 조작을 인정한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 역시 여전히 그들의 중요한 '대공 사건 적발 치적' 성과물로 버젓이 기재되어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한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지 묻고 싶다.

정말 게을러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조작을 인정할 수 없다는' 소심한 저항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전자라면 반성해야 하고, 후자라면 국가 기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안 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처절한 법정 투쟁 끝에 얻어낸 무죄가 국정원 홍보관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여전히 유죄로 남아 있는 오늘이 슬프다. 국정원의 반성을 촉구하며 조속한 시정 조치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것이 과거 조작된 공안 사건에 의해 희생된 그 분들에게 국정원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국가정보원, #조작 간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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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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