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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정이 어려워 이곳에 오기 위해 지인들에게 교통비를 빌렸습니다. 면접 과정이 진행되고, 빌리는 돈이 커질수록 '내가 왜 부산에 내려가는가, 내가 왜 이곳을 지원하는가?' 같은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경제적 위기를 통해 저에게 스스로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3번의 부산 방문, 지금은 간절합니다. 왜 XXX인지 진솔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부산에 있는 모 방송국 방송기자 전형 4차 면접에서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무리수였다. 면접장에 있었던 높으신 분들은 당황해했다. 그리곤 서로 눈치를 보다 한 분이 나에게 "자네 지금 우리 협박하나?"라고 말했다. 내 면접은 고작 4분 만에 끝났다. 역시나 떨어졌다. 부산을 3번이나 방문했지만, 4차 전형이 돼서야 10만 원의 면접비가 건네졌다. 내가 빌린 돈은 40만 원, 모두 메울 수 없었다.  

벼랑 끝에 몰렸다. 6월 가계부는 최악이다. 40만 원의 적자였다. 면접과 관련해 50만 원 가까이 썼지만, 돌아오는 건 4차 전형 때 받은 10만 원의 면접비뿐이었다. 게다가 2개의 과외마저 면접 일정 때문에 잘렸다. 빚은 남았고 나는 여전히 취준생이다.

식사비가 터무니 없이 낮다. 내가 지출을 줄인 만큼 여자친구의 소비가 늘었다. 돈이 없으면 주변사람들에겐 민폐다.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이다.
 식사비가 터무니 없이 낮다. 내가 지출을 줄인 만큼 여자친구의 소비가 늘었다. 돈이 없으면 주변사람들에겐 민폐다.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이다.
ⓒ 이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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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 과외까지 잘려

취업 준비 9개월, 어느 정도 자립의 경지에 다다른 줄 알았다. 나는 취업 준비와 함께 아르바이트 3개를 병행했다. 수·금·일은 보습학원에서 영어선생을 한다. 한 달에 40만 원 정도 번다. 초등학생 2명의 영어 과외도 한다. 한 명은 30만 원, 다른 한명은 15만 원, 총 45만 원을 받았다. 한 달에 버는 돈은 85만 원이었다. 자취생이 아니기에 아껴쓰면 남는 돈이었다.

물론 취업 준비와 병행하기 힘들었다. 일주일에 일을 쉬는 날은 화요일밖에 없었다. 비교적 급여가 높은 아르바이트였지만, 이동시간이 왕복 2시간이 넘어 소비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도 아르바이트는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이렇게 3개의 과외를 병행한 게 지난 4월부터였다. 밀린 휴대전화 요금을 갚아가며 가계부의 정상화를 시도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부산에 모 방송국 전형에 계속 합격했다. 면접 전형은 아르바이트생을 고려하지 않았다. 주로 면접은 평일 아침에 이뤄졌다. 교통비를 아낄 수도 없었다. 무궁화를 타고 가면 전날 숙박을 해야 했다. KTX나 항공편이 도리어 저렴했다. 면접은 5시간 가까운 대기시간이 필요했다. 면접이 끝나면 그날 밤이 돼서야 서울에 도착했다. 마침 날이 겹쳤던 과외는 계속 미루게 됐다.

과외는 이런식이다. '아차'하면 잘린다. 심지어 환불도 했다. 슬프다.
 과외는 이런식이다. '아차'하면 잘린다. 심지어 환불도 했다. 슬프다.
ⓒ 이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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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과외는 잘렸다. 과외 학생의 어머니는 나에게 신뢰를 거두셨다. 나는 수업료를 선지급으로 받았다. 그래서 먼저 받은 돈을 토해내야 했다. 주 1회 월 15만 원을 받는 과외에서 나는 2주 치인 7만 5000원을 다시 환불해줬다. 내가 맡은 과외학생들은 서로 어머니끼리 친했다. 이 때문인지 한 과외가 잘리고 난 2시간 후 나는 다른 과외마저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다음 날, 부산의 모 방송국은 '안타까운 인재'라며 나를 최종면접에 올리지 않았다.

6월 수입. 빚이 수입이라고 잡아둔 내가 멍청하다. 24원의 이자 소득, 이걸로 금리생활자라 말할 수 있을까.
 6월 수입. 빚이 수입이라고 잡아둔 내가 멍청하다. 24원의 이자 소득, 이걸로 금리생활자라 말할 수 있을까.
ⓒ 이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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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가 되기도 이렇게 어렵나?

"형, 저 돈 좀 빌릴 수 있나요?"

친한 형과 친구에게 40만 원을 빌렸다. 30만 원은 부산 가는 차비로 쓰고, 10만 원은 면접용 셔츠와 바지를 샀다. 지인들은 이번엔 느낌이 좋다며 나를 응원했다. 하지만 남는 건 '안타까운 인재'라는 칭호와 빚밖에 없다.

나는 <미생>을 보며 장그래의 슬픔을 느끼면서도,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다. 장그래가 속한 조직과 매달 나오는 월급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을'로 체화시킨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의 가사다. '미친' 6월을 지내면서 '이 사회에서 나는 왜 이렇게 무능력할까?'라고 자조했다. 기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언제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0'명을 뽑는 회사에 몰리는 '000'명의 지원자를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재정적인 문제는 취업을 준비한 내내 풀리지 않는 고차원 방정식이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런 비극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연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청년실업률의 통계 속 인물들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많았다. 그들은 장그래를 연민할 수 없었다. 도리어 그를 부러워했다. 나만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한 번 더 참고, 한 번 더 자조하지 않고, 그래도 행복하기 위해 버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장그래 가계부 기사 공모



태그:#장그래, #가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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