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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우리 요즘에는 시를 많이 안 쓰네."
"어…어… 정말 그렇네. 내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나봐."
"에휴, 취업준비 한다고 밥도 못 챙겨 먹더니 그럴 줄 알았어."

'시를 쓰다'는 말은 여자친구가 자주 방문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성관계를 지칭하는 은어다. 여자친구의 말대로 '우리의 사랑'을 기록하는 다이어리는 관계횟수가 줄었음을 보여줬다. 결코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서는 아니다. SNS에서는 여자의 식욕과 남자의 성욕의 크기가 같다는 이야기도 우스갯소리처럼 돌고 있을 정도니까. 이처럼 남자에게도, 물론 연인 사이에서도 섹스는 중요한 요소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관계가 줄었을까?

둘이 하나가 되도 입은 둘이다

연애하기 전 내 가계부
 연애하기 전 내 가계부
ⓒ 이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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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은 이렇다. 나는 현재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 연애 공백기가 길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활방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에 따라 소비습관도 변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서 밥을 먹거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술을 마시는 일, 스마트폰 요금과 교통비, 그 외 기타 등등 다 합쳐도 한 달에 쓰는 돈은 40만 원 내외였다. 연애 전에는 흡연도 했으니 스마트폰 요금 5만 원, 교통비 6만 원, 담뱃값 5만 원 등 이것저것 제외하면 내가 자유롭게 쓰는 잉여비용은 고작 25만 원 내외였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여자친구가 현실로 나오게 되니 이야기는 달라졌다. 연애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성스러운 과정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입'은 여전히 둘이었다. 그것도 취업준비생인 백수가 둘. 나는 계약직으로 규칙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으나 여자친구는 그렇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데이트의 정석이라는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는' 스케줄은 늘 적당량의 비용을 요구했다. 여자친구도 부모님께 용돈을 타 영화표도 사고 차도 사며 내 부담을 덜어주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저 '계약직 알바생'임은 변함없었다.

거기다 덧붙여 말 못할(?)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면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모텔비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는 점이었다. 연애초기 사랑이 타오르며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자 사랑 비용(?)도 늘어났다. 보통 모텔방을 빌려 쓰는 대실비는 제일 낮은 가격이 2만 원이다. 평균적으로도 2만 5천 원에서 3만 원 선이다. 더 좋은 방을 가려면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러니 여자친구와 모텔을 한 번 가려고 하면 애플리케이션을 뒤져가며 가격을 비교하고 회원할인을 해주는지까지 미리 확인해야 했다. 차마 여자친구 앞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연애초기에 모텔을 척척 안내하고 비용도 미리 알고 결제하는 나를 보고, 여자친구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결국, 우리의 관계가 줄어든 것은 순전히 내 주머니 사정 탓이었다.

난 그렇게 '찌질남'이 되었다

연애 후 내 가계부. 지출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연애 후 내 가계부. 지출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 이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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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느냐'고 처절하게 외치던 신경림의 시와 달리, 현대에는 가난해도 사랑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랑만 먹고도 살 수 있지'라는 낭만적인 환상은 내가 오랜 기간 연애를 안 했기에 몰랐던 것이었다.

늘 차근차근 지출을 기록하는 내 가계부 습관 덕분에 알게 된 것은, 사랑을 하며 지출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는 것이다. 취직을 준비하며 병행한 계약직 아르바이트 덕분에 그나마 수입은 꾸준히 있었다.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금연까지 했다. 그럼에도 20만 원이나 늘어난 문화생활 및 모텔비는 과거에는 없던 지출이기 때문에 지갑을 점점 얇게 만들었다. 식비도 늘어났다. 연인이 식사할 만한 식당들은 하나같이 비싼 편이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줄였는데도 식비 지출은 40만 원을 넘었다.

사실 여자친구에게 '우리 취업할 때까지 만나는 횟수를 좀 줄일까?'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돈이 너무 없을 때는 공부가 바쁘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여자친구와 만나는 대신 집에 혼자 박혀 있었다. 둘 다 대학생도 아닌, 백수이자 취준생이기에 경제적 문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어야 했다. 지금도 이런 '찌질남'을 사랑과 정으로 만나주고 아껴주는 여자친구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장그래는 왜 사랑하지 못했을까

<미생>의 주인공인 장그래, 많은 팬들이 바랐지만 드라마에서도 웹툰에서도 그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이 더 현실적이고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본능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지만, 모텔을 가고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현실이다.

아무래도 홀어머니를 둔 고졸 출신의 가난한 장그래가 안영이와 신나게 연애하는 모습은 전혀 '미생스럽지' 않다. 어쩌면 현실은 오히려 더 냉혹하다. 청년들의 삶을 보여주는 삼포세대의 '연애, 결혼, 출산'은 모두 사랑에서 파생된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주는, 섹스가 주는 이점에 대한 영국의 연구는 지속적으로 나와도, 내 가계부에는 사랑이 스며들 여력이 없었던 것처럼. 장그래에게도 사랑을 허락하라!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장그래 가계부 기사 공모



태그:#장그래 가계부, #가계부,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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