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겨울 새벽의 참극.

2009년 1월 19일 새벽 5시.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의 남일당 건물 옥상으로 32명의 철거민들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철거전문 용역회사 직원들과 경찰특공대가 진입을 시작한 것은 25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1월 20일 새벽 6시 30분 경이었다.

이내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폭력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진압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이 작전으로 농성에 들어갔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 도심 한가운데 경찰특공대의 헬기가 굉음을 울리며 떠 있는 장면을 보았던 일이 있는가. 이 일로 보수를 대변하는 이들은 공권력에 무리하게 맞선 결과라고 철거민들을 힐난했고,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은 국가 권력의 남용이라고 비난했다.

항상 그랬듯이, 불리할 때는 정쟁이라고 묘사하고, 갈등이라고 덮어버리면 됐다. 그러면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잊혀졌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용산 참사'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제는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비극을 불러들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든 간에, '용산참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꼈다. 돈을 향한 욕망, 빼앗긴 권리를 찾으려는 몸부림, 로보캅을 연상시키는 경찰특공대의 복장, 타오르는 불길, 무너지는 망루, 경찰 헬리콥터가 내뿜는 소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사람들. 이 참극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국가였다." - <국가란 무엇인가> 본문 20쪽 중에서

어떤 기사보다도 이 사건의 내면에 깔려있는 배경을 적나라하게 짚은 표현이다. 그 참극의 자리에 있었던 '국가'는 시민의 죽음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그럴 필요조차 없을 만큼 여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건 이후 2년이 지나서야 문제의 남일당 건물을 철거했다.

모두가 피해자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 (주)시네마서비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긴박한 장면이 흐른다. 언제 진압이 시작될지 모르는 철거현장에 교복에 빨간 파카를 입은 고등학생이 찾아온다. 철거민 박재호(이경영)의 아들이었다. 마침 용역 깡패들과 경찰들의 진입과 함께 진압이 시작됐고, 박재호는 아들을 건물 구석에 급히 피신시킨다. 그러나 진압 과정에서 박재호의 아들은 사망했고, 경찰 1명도 사망했다. 경찰은 박재호가 경찰에게 폭력을 휘둘러 살인을 했으며, 박재호의 아들은 경찰이 아닌 용역회사 직원에 의한 사고사라고 발표했다.

박재호는 경찰에 의해서 아들이 사망했으며 자신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방대학교를 나와 국선변호사로 전전하던 윤진원 변호사(윤계상)는, 처음에는 이 사건을 그저 그런 사건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를 팔수록 묘한 오기 같은 게 생기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사건이 된다'는 냄새를 맡은 것. 냄새를 함께 맡은 기자 수경(김옥빈)과 선배 변호사 대석(유해진)과 함께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검찰의 방해를 이겨내는 전형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내내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주범은 누구인가?'

사실 영화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피해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하고픈 권력의 손과 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철거현장에서 박재호에게 쇠파이프로 머리를 맞아 사망한 경찰 회택과 그의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었다. 경찰 특채 조건을 채우고자 의무경찰에 지원한 희택이나 문래동 어느 구석에 있음직한 허름한 주물집에 하루종일 뜨거운 풀무질을 할 법한 그의 아버지도 보통의 착한 사람이었다. 당시 진압 현장을 지휘하던 경찰은 양심의 가책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경찰 브로커로 일할 정도로 착했다. 우리가 거리를 걷고 밥을 마시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만날 수 있는 흔한 착한 사람일 뿐이다.

반면 권력의 손과 발이 된 인물들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391쪽)였던 점에 악의 평범성의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몸부림 쳤던 검찰 수뇌부와 3명의 검사(배우 김의성, 오연아, 조복래)는 사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맡은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문제 전문가로 불렸던 아이히만처럼 말이다.

평범한 사람, 아이히만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영화 <소수의견>의 한 장면. ⓒ (주)시네마서비스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나치에 가입한 것은 특별한 신념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1960년 예루살렘에서 총 15가지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을 때, 무죄를 주장했다. 당시 존재하던 나치 법률 체계 하에서 아이히만 자신은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의 공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74쪽 참조).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에 걸친 유대인 추방과 학살이 국가의 정상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아이히만 개인이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세상을 바꿀 어떤 신념도 없었던 그는 히틀러가 희망한 대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부터 발칸 반도, 중부 유럽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축출 계획을 시행했다. 그는 확실한 성과를 거뒀고, 그의 남다른 재능이 성과의 배경에서 빛을 발했다.

일반적인 예상과 다르게, 유대인을 추방하는 계획은 매우 체계적이고 법률적인 토대 하에 진행됐다. 그 체계적이고 법률적인 토대를 만든 것이 바로 아이히만이었다. 협동 작업 라인을 만들어, 여권의 발부와 유대인의 재산 양도 문서 작성을 모두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재무부와 국세청, 경찰이라는 국가의 조직이 한데 모여 힘을 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절차들이 끝나면 열차에 태워져 유대인들은 추방지로 보내졌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제빵소와 연결된 방앗간과 같은 자동화된 공장"이다. 물론 열차를 태워보내는 방식 역시 매우 체계적이었다. 가령 객차 하나에 탈 수 있는 인원이 몇 명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따지는 식이었다.

그렇게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장례식장을 향해 매일 매일 떠났다. 1943년 6월 30일 제국(독일, 오스트리아 및 보호국들)에서 더 이상 유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포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 방식은 이루어졌고, 이송된 26만5000명 가운데 탈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이 신념도 없고,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단지 조직을 설득하는 능력과 협상 능력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히만이 국가에 충실히 봉사한 덕분이었다.

<소수의견>은 예상을 깨고 법정드라마에 충실하고 있다. 초반부 시위 장면이나 회상 장면에서 현장성 있는 컷들이 등장하지만, 스토리 자체의 묘미나 우리의 한숨을 자아내는 장면들은 주로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공방에서 등장한다. 그 공방의 이편에는 철거민 박재호와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와 기자가 있고, 그 너머 반대편에는 검사(아마도 공안검사)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비열함을 보였던 검사들은, '논리'에 충실한다. 그 논리에 '국가를 위하여'라는 명제가 깔려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처럼, 재판 내내 친절하고 교묘한 논리로 배심원들의 부성애를 자극하기도 하고, 때론 윽박지르기도 한다. 특히 여자 검사는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정감 가는 외모와 탁월한 언변으로 배심원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때로는 재판에 유리하도록 증인들을 회유했고, 증거물도 조작했다. 법률가라면 응당 지녀야할 양심 따위는 '국가'라는 명제 뒤로 숨어버렸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의 손과 발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들은 '서울의 아이히만'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영화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마무리가 된다. 하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영화의 이도저도 아닌 현실보다도 더 못하니, 어찌 보면 영화의 끝맺음이 오히려 더 해피엔딩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법정에 선 아이히만 단 한명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좀 더 심각하다. 우리 주변에는 셀 수 없는 아이히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물대포를 쏘았으며, 버스로 차벽을 쳤으며, 도시의 한 가운데 흉물스런 산성을 쌓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라고. 그러나 아이히만이 유죄였듯이, 그들도 유죄이다. 단 감옥이 아닌 그들이 권력에 부역함으로 만들어놓은 이 사회라는 거대한 감옥 안에 자기 자신도 함께 갇혀있는 것이다.

 영화 <소수의견>의 공식포스터

영화 <소수의견>의 공식포스터 ⓒ (주)시네마서비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찬현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소수의견 용산 참사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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