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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함께합니다. 그가 품는 희망은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너무나 아파서 가슴이 막막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오며, 작기만 했던 가능성은 어느덧 기대 이상으로 실현됐습니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중심에는 '사람은 상처 받고 고통만 당하기엔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 24년(1991~2014년) 동안 조카와 함께 울고, 웃던 나날들의 경험이, 어떻게 풍성한 열매로 자리하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기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자 말

점점 건강이 좋아지면서 덕이는 표정도 훨씬 밝아졌다. 마라톤을 하면서 어른들에게 듣게 되는 칭찬 덕분에, 덕이는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덕이와 함께 조깅과 태권도를 하면서,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일요일에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 덕이는 차츰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다.

마라톤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법을 배우다

덕이는 마라톤을 좋아합니다.
 덕이는 마라톤을 좋아합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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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마라톤 대회에서 함께 달리는 아저씨들은 덕이의 인내와 끈기에 놀랍다고 말씀해주시고, 덕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감사한 일이다. 지난번 덕이의 아픔 때문에, 아이들은 더 이상 덕이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라톤대회에서 만난 분들의 관심 덕분에 덕이는 마라톤을 계속 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마라톤이 끝난 후, 한 참가자 아저씨께서 덕이에게 말씀하셨다.

참가자 : "너 엄마가 하라니까 하는 거 아니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덕이의 엄마인 줄 안다.

덕이 : "아니."
참가자 : "그러면 너가 좋아서 마라톤 하는 거라고?"
덕이 : "응."
참가자 :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근데 왜 반말이세요?"

그 아저씨는 몇 번을 더 덕이와 대화를 하고는, 덕이를 이해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열심히 해"라고 격려하셨다.

그 참가자가 자리를 떠난 후, 나도 덕이에게 물어보았다.

고모 : "덕아~ 힘들지 않니?"
덕이 : "아니"
고모 : "정말?"
덕이 : "응."

덕이의 표정이 정말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마라톤을 끝낸 덕이의 모습에서는 학교에서나 다른 곳에서 친구들에게 받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듯 즐거움과 나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다.

마라톤 대회를 참가하기 위해서는, 미리 신청하고 그곳에서 보내온 마라톤복과 참가번호표를 받아야 했다. 그 후 약 1주일 정도면 대회가 열린다. 무슨 대회, 몇 km, 몇 년(덕이에게는 올해가 몇 년도인지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줄 필요가 있다), 몇 월, 며칠, 무슨 요일, 몇 시, 장소, 참석자(본인) 이름까지 덕이에게 일일이 직접 써서 자기방 벽에 붙여놓도록 했다. 마라톤 메달과 태권도 메달을 함께 덕이방 벽에 하나씩 모두 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어려워하던 숫자 개념도 점점 이해를 했다. 한글 읽기, 시계 보는 방법, 달력에 기록된 날짜와 요일까지 알아갔다. 이에 더하여 잠들기 5분 전 교육도 함께 했다. 정서적인 안정과 자신감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내가 덕이를 아주 잘 지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잠들기 전 5분 교육의 일환으로, 그동안 덕이의 활동들을 담은 사진을 덕이방 천장과 벽에 하나씩 붙였다. 이 사진들을 잠들기 전에 하나씩 짚으면서 덕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이 때 너가 얼마나 사랑스러웠고 자랑스러웠으며 대단했는지 아니?"라고 속삭였다.

지도하는 사람의 지도에 따라서 아이의 가능성은 더 크고 넓어진다.

덕이 때문에 떠오른 나의 어린 시절 추억

덕이를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은 건강미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에게 "운동선수셨어요?"라고 물을 정도로 신체가 건강하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소화기능이 약해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 없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아이였다. 이는 청소년기까지 이어져 학교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앉아 있는 아이였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나 형제들과 함께 뛰어놀기 보다는 늘 조용히 앉아있었다.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던 어느 날, 은사님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자폐증을 앓았던 사실을 알게 됐다. 남들과 함께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아이였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꼽는다면 "너는 거기에 앉아있어"라는 말을 들을 때였다. 마음 속으로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뛰어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기력이 없어 움직이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 쉬어야만 했었다.

이런 내가 더욱 내성적으로 변한 결정적인 원인은 부모님의 잦은 다툼이었다. 외향적인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나는 고민이 많았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이 동네 친구들에게 창피했다. 친인척은 물론이고 이웃 사람들에게 창피했다. 내향적이며 늘 앉아서 생각만 하는 아이였기에 더욱 고민이 커졌던 것 같다. 이런 나를 알아봐준 분이 바로 초등(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던지, 나에게 특별한 숙제를 내주셨다.

"너는 오늘도 너의 친구 누구네 가서 그 아이에게 오늘 배운 내용을 지도해주고 와라."

지금 생각해 보면, 같은 반이었던 그 친구의 지능도 덕이 정도의 지능이었던 것 같다. 거듭 숙제를 하다 보니, 어느덧 학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를 거의 매일 지도해줬다.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친하게 되었고, 토요일에는 그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우리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집에 돌아와 내가 엄마에게 한 말을, 엄마는 지금도 기억하신다.

"엄마, 친구네는 우리보다 가난해요. 집도 흙집이고, 아저씨도 오늘 일해서 오늘 먹고 살아요. 그래도 행복해요. 그 친구 어머니, 아버지는 항상 웃어요."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그 당시 '이 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나는 부모님의 다툼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마음으로 다짐했었다. "저렇게 부모의 다툼으로 자녀들이 불안해 한다면, 나는 시집가지 않을거야"라고.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는 (결혼하는 대신)고아원 원장 선생님이 되어 불쌍한 아이들을 돌볼 것이다"라고 미래희망직업을 선택할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방과 후 집에 들어섰는데 그날도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이셨다. 급기야 나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다. 이런 나를 등에 업고 방에 뉘었던 사람이 바로 덕이 아빠인 나의 오빠셨다. 어쩌면 오빠가 당시 가장 고민이 많았으리라. 그 오빠는 과묵했고, 소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어른들의 평을 들을 정도로 정이 많았다. 교과서적인 타입의 오빠였으니 속으로 더 앓지 않았을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머리맡에 큰어머니와 큰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한 동네에 살면서, 우리와 가장 가깝게 지내고 계셨던 분이었다.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부부 금슬이 참 좋으셨다.

그 이후부터 나는 부모님께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부모라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부모님께 대들었던 적도 있다.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쓰러졌을 때 나쁜기운이 들어간 것 같다"라고, 그 전에는 "순둥이"였다고.


태그:#교육과 열매, #학교와 숙제, #부모와 친구, #담임선생님과 물, #몸과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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