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포스터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다소 늦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결국 입소문이 터졌다. 걸출한 신작들의 개봉에 잠시 주춤하다가 끝내 박스오피스 1위를 탈환한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가 30일 중으로 누적 관객 수 25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조지 밀러 감독이 30년 전 자신의 손으로 만든 <매드 맥스> 트릴로지를 잇는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원작에 대한 향수와 SF 영화 팬들의 기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주목받았다. 관객 앞에 첫선을 보인지 2주 차를 맞아 열기가 한풀 꺾였을 법도 한데, 인터넷상에는 중복 관람 인증샷이 넘쳐난다.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 맥스>)는 어떤 영화기에 박스오피스 역주행이라는 진풍경을 연출할 수 있었을까?

떠난 자, 그리고 잡으려는 자...결국은 '생존'의 문제다

 <매드맥스>의 한 장면

<매드맥스>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속 시타델의 전사들은 발할라(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궁전으로, 전쟁에서 죽은 자들이 사후 머무는 곳. 우리나라에서는 '천국'으로 번역-기자 주)를 꿈꾼다. 또 젖과 아이를 생산하는 가축으로서 시타델에 감금된 채 '길러지는' 여성들은 '어머니의 녹색 땅'을 그린다. 언뜻 전자는 명예로운 죽음을, 후자는 인간다운 삶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은 채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듯하다. 그러나 등장인물이 사막을 내달리는 이유는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이들이 죽음의 땅에서 공유하는 과제는 생존이었다.

워보이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전사자들만 갈 수 있다는 발할라를 동경한다. 워보이 눅스(니콜라스 홀트 분)는 버릇처럼 "I live! I die! I live again!"을 외치고, 크롬처럼 반짝이는 영웅으로 기억된 채 죽음을 맞고자 한다. 오직 발할라로 가는 '하이웨이'를 타기 위해,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아무렇게나 죽는다. 발할라를 향한 워보이들의 집착은 지독한 삶의 욕구와도 맞닿아 있다. 그들에게 현생은 '영웅'이라는 목표를 위해 잠시 생존하는 모종의 유예 기간과도 같지만, 명예롭게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워보이들에게 삶과 죽음은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난세일수록 영생과 천국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성행하고, 다음 생을 위해 공덕을 쌓으려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타델의 지배자이자 신인 임모탄 조(휴 키스 번 분)의 아내들(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낳는 '브리더'들) 역시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다.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분)와 스플렌디드(로지 헌팅턴 휘틀리 분)를 필두로 연대한 여성들은 물과 기름, 어머니의 우유를 담은 트럭에 몸을 싣고 녹색 땅이 있는 동쪽으로 탈주한다. "우리 아이들을 당신처럼 만들지 않겠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그렇게 반역을 꾀한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은 곧바로 임모탄의 군대에 쫓긴다.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보장하는 시타델을 등진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생존'에 있었다. 소유 당하는 존재로 연명하기를 포기하고, 존엄성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는 그들은 비장하게 시타델을 떠난다.

그래서 이 모든 구조를 설계한 임모탄 조에 의해 사막 한가운데서 맞붙는 워보이들과 여성들은 닮은꼴이다. 하나 그들이 원하는 생존의 결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다. 워보이들은 크롬처럼 빛날 자신들의 내세를 위해 '오늘'을 소비하고, 여성들은 아이들의 녹색 미래를 위해 스스로의 '지금'을 기꺼이 저당 잡힌다. 그들이 원하는 '생존'의 모양을 두고, 가치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다. 이들의 추격전에서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넘어서는 숭고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그리고 이들의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바로 맥스(톰 하디 분)다.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지키지 못한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약탈자들에게 쫓기는 맥스는 도피를 생존의 방법으로 정했다. 죽음을 택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망령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 두렵기에 아직 그는 살아야만 했다. '망가진 삶을 고치지 못해 미쳐버린' 맥스에게 희망을 품는 것은 실수에 불과했고, 그래서 그에게 삶이란 죽음으로부터의 처절한 도망이다.

'공존' 택한 맥스와 퓨리오사, 진부한 러브라인은 없어

 <매드맥스>의 한 장면. 맥스

<매드맥스>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처럼 생존을 갈망하는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누런 사막의 모래 먼지를 아교 삼아 한데 섞인다. <매드 맥스>는 서쪽의 시타델에서 동쪽의 녹색 땅까지 가는 여정에서 단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 역시 별다른 방해 없이 서사에 빠져들며, 몰입도는 러닝타임 내내 균등하고 깊게 유지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리 연출이다. 드푸 워리어(아이오타 분)의 기타 소리는 전투에 나선 워보이들의 사기를 높임과 동시에 영화의 배경음이 되어 관객을 사막으로 끌어들인다. 모래 폭풍을 뚫고 나온 퓨리오사가 트럭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소리는 그대로 타악기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처럼 변하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맥스의 발걸음 소리와 섞인다. 이같이 영화 안과 밖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소리는 죽음의 땅에서 엉킨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더욱 단단하게 결합한다.

모양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이들이 숨을 곳도 없는 사막 위에서 쫓고 쫓긴다. 이 단순하고 전형적인 서사는 마치 '최초의 인류'가 써내려간 전설을 보는 듯하다. 사실 <매드 맥스>의 전체적 설정은 30년 전의 트릴로지와 유사하지만, 분위기는 판이하다. 대사가 절제된 채 묵묵히 한 곳을 향해 달리는 이 영화와 다르게, 전작들은 맥스가 다양한 이들과 마주치면서 겪는 모험을 비춘다. 전작들은 민담 같은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이 영화는 전설에 가깝다. 나아가 2015년판 <매드 맥스>는 혼자만의 생존을 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으로 보다 신화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신으로 군림했던 임모탄이 자신의 신인류와 멸망하고, 그렇게도 원하던 구원을 쟁취한 퓨리오사는 '최초의 인류'로 그 자리에 선다.

이 영화에는 잘 포장된 도로도, 인간 이외의 가축도, 자동차 이외의 교통수단도, 문명국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사막과, 수송과 전투만을 담당하는 자동차, 그리고 살아남는 것을 열망하는 인간뿐이다. 생존에 대한 갈급이 강해질수록 생과 사의 경계는 마치 신들의 세계처럼 모호해지고, 모든 존재는 신성함과 무가치함을 동시에 품는다. 이처럼 원초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매드 맥스> 속 인간들은 스플렌디드가 '죽음의 씨앗'이라 부른 총알처럼 사막에 심어져 있다. 하나를 배양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죽음이 따른다. 눅스는 맥스의 고성능 피를 빼앗아 생명을 얻으려 하고, 맥스는 추격당하는 퓨리오사의 트럭을 탈취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채 홀로 떠나려 한다. 생존 앞에서는 어떤 가치도 힘을 잃는 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미덕이다.

누군가 살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만 할 것 같은 이 '웨이스트 랜드'의 논리는, 맥스가 끝내 여성들과 동쪽을 향하게 되며 깨진다. 이름을 딴 영화의 주인공 치고는 비중이 적어 보였던 맥스가 돌출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맥스는 남성을 과시하지도, 여성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오로지 적이었고, 그중에서도 약자와 강자를 나눌 뿐이었다.

그러나 트럭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게 된 퓨리오사와 맥스는 영화에서 용호상박하는 맞수이자 피를 나눈 전우로서 존재한다. '공존'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보통 이 정도로 눈빛을 교환하고 같은 편으로 오래 지냈을 때 이성적 호감이 생길 법도 한데, 이 두 사람은 남녀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진부한 설정의 등장까지 원천봉쇄된다. 회군에 성공해 모든 인민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오르던 퓨리오사가 그 영광을 양보한 채 떠나는 맥스와 미소를 주고받는 장면은 보기 드물게 매력적인 영화 속 남녀 관계의 탄생을 고하고 있었다.

사운드와 시각적 성취의 이중주...보는대로 느끼는 119분 

 <매드맥스>의 한 장면

<매드맥스>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처럼 신화의 신성함과 숭고함이 가미된 '미래 전설' <매드 맥스>의 시각적 성취는 사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모든 전투 장면을 놓쳐서는 안 되지만, 자연 앞에서 형편없이 스러지는 인간과 기계를 보여 주는 모래 폭풍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또 녹슨 고철 자동차와 화염이 난무하는 <매드 맥스>의 사막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속 사막의 우아함이 느껴지는 까닭은 단연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에게 있다.

예언가처럼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브리더들은 물론, 빗발치는 불덩이와 총알 속에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효율적 성과를 거두는 전문가적 면모의 퓨리오사는 생존에 대한 동경을 과도한 집착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어머니의 땅이 파괴됐다는 소식을 접한 퓨리오사가 사막에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무심히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 뿐인 사막을 배경으로 비추며 허무함이라는 감정이 완벽하게 시각화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멋진 영화가 만들어진 와중에도 퓨리오사가 수동적인 인물이라든가, 이 영화는 주체적인 여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등의 지적이 나와 많은 영화 팬을 아연실색하게 하고 있다. 문화 콘텐츠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제각각일 수 있으나, 명백한 오독은 지양되어야 한다. 옛 선조들은 이런 경우에 사용하라고 '아전인수' '곡학아세'라는 옛말을 물려준 듯도 하다. 그저 119분 동안 영화관에 앉아서 눈만 뜨고 있으면 보이는 이야기를 부러 꼬아 읽으려는 노력이 인상적이다. <매드 맥스> 속 대사가 비교적 절제돼 있고, 그래서 상징적인 장치가 나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단순한 지적 허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죽음의 땅 위에서 생존을 갈구하는 이들의 이야기, <매드 맥스>는 좋은 관람 환경에서 볼 것을 권한다. 아이맥스 상영은 모두 종료된 상태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아직 M2관이 남아 있다. 메가박스 코엑스점의 M2와 전주효자CGV의 아이맥스관을 기준으로 한다면, 전자의 C~D열 가운데가 후자의 G~H열 가운데와 유사하며 이 곳이 최적의 좌석이다(초심자들은 한두칸 정도를 뒤로 갈 것을 권함). 화면의 경우 미묘한 차이로 아이맥스관의 손을 들어줄 수 있겠지만, 사운드는 M2관의 압승이다. 반드시 특성화관이 아니라도 좋으니 영화관으로 가자. 사막 위의 '하이웨이 스타'들을 좀 더 박진감 넘치는 환경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조지 밀러 톰 하디 샤를리즈 테론 니콜라스 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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