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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 <환상의 여자> 겉표지
ⓒ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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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신의 미래가 막막할 때,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의 과거가 떳떳하지 못할 때, 자신이 뭔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느낄 때.

그러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컴퓨터가 멈춰버리면 '리셋'시키듯이 자신의 인생도 리셋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자작나무>에서 '잠시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새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바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과 출생지, 생년월일 등 모든 것을 바꾼다. 그렇게 된다면 싫어도 새 시작을 하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되는 셈이다.

재회한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물론 신분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영화 또는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번쯤 상상해보면 어떨까. 자신의 신분을 바꾸고 직업도 바꾸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가정이다.

가노 료이치는 자신의 2003년 작품 <환상의 여자>에서 제목처럼 비밀스러운 여자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진짜 신분이 무엇인지 의심이 되는 것. 작품의 주인공은 도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스모토 세이지.

그는 어느날 오년 전에 헤어졌던 애인 고바야시 료코를 우연히 지하철역 계단에서 만나게 된다. 세이지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어보려 하지만 료코는 무엇에 쫓기듯이 걸음을 옮기며 자신이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긴다.

다음날 료코는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세이지는 경찰의 연락을 받게 된다. 당연히 알리바이를 포함한 여러 가지 조사도 받게 된다. 세이지는 자신이 이 사건을 수사하겠다고 다짐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비교적 수월하다. 하지만 수사가 진척될수록 세이지는 혼란에 빠진다. 료코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자신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조금씩 드러나는 남녀의 과거

스스로 신분을 바꾸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상처도 한 몫을 할 것이다. 과거의 상처가 꼭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기억 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가, 잊을만 하면 튀어나와서 사람을 자극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통째로 바꾼다.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야.'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쉽게 마음이 부서질 수 있다. 성인이 된다고 해서 확고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발 디딘 곳이 위태롭다고 느낄 수도 있다. <환상의 여자>의 주인공도 그래서 정체불명의 여인을 찾아서 과거로 과거로 내려간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씻기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범죄소설은 과거를 추적해가는 소설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예전에 저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몇 번이고 다시 살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환상의 여자> 가노 료이치 지음 / 한희선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환상의 여자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황금가지(2015)


태그:#환상의 여자, #가노 료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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