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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뤄진다.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가 건강하면 사람도 건강하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히 의식주가 필요하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 의식주 때문에 죽음을 택한다면, 그는 그저 사회부적응자일까. 현대사회는 그리 단순한 논리로 한 인간을 매도할 자격이 없다. 개인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다. 국가나 사회가 정책이나 제도를 잘못 운영함으로 안 죽어도 될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세 모녀 법', 세 모녀 살릴 수 없어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하승수 지음 / 한티재 펴냄 / 2015. 3 / 140쪽 / 8000원)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하승수 지음 / 한티재 펴냄 / 2015. 3 / 140쪽 / 8000원)
ⓒ 한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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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14년 2월 27일에 발생한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을 충격적으로 경험했다. 큰딸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고 어머니는 실직해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들은 방안에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그들이 남겨놓은 70만 원과 쪽지다.

쪽지에는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혀있었고, 전 재산인 현금 70만 원을 집세와 공과금으로 남겨두고 세상을 하직했다. 이들은 공과금을 꼬박꼬박 내왔다고 한다. 세상에 빚을 지기 싫어 '긴급복지지원제도'가 있음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자 뒤늦게 정치권은 설레발을 떨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복지사각지대를 없애겠다고 했고, 야당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 및 '긴급복지지원법 개정안' 등을 발의하기에 이른다. 이 법은 지난 해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여전히 세 모녀를 지원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세 모녀가 근로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지원을 받기 어려웠는데, 개정안은 ▲ 개별급여 시행 ▲ 근로활동 강화 ▲ 부양의무자 기준 일부가 완화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세 모녀 법'이 여전히 세 모녀와 같은 환경의 가정을 돕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극단적인 예일 수 있겠지만, 다시 우리나라에서 '세 모녀 자살 사건'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면 안 된다. 복지 사각지대 운운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 모녀 자살 이전과 다르지 않은 환경 속에 산다. 소위 세 모녀의 자살로 '세 모녀 법'이 생겼지만 여전히 제2, 제3의 '세 모녀'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이다.

자살 원인은 개인 탓만이 아냐

"죽음, 특히 자살의 원인을 오로지 현상만 보고 파악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개인적 결정에만 주목하면 죽음은 단지 개인의 선택일 뿐이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개인적인 원인만을 분석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사회구조적 원인이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의 연령·성별·인종·계급·계층 등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 자아나 성격·개성·사상·가치관 등 내밀한 영역에 가서 그가 그런 사회구조적 영향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파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3가지 죽음>(2015, 이준일) 중에서

그렇다. 이준일이 지적한 대로 개인보다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구조적 요소와 환경을 배제하고 개인에 초점을 맞춘 죽음 문제로 접근한다면 100 퍼센트 실패하고 말 것이다. 세 모녀의 죽음이 세 모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이 점을 감안하여 대통령도 정치권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사건이 있고 1년이 더 지난 지금 복지사각지대는 없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이 있다.

보편복지와 선별복지가 뜨거운 화두가 된 시대에 우리는 산다. 이 사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는 엉터리없는 짓거리가 버젓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째 보편복지를 말하면 진보고, 선별복지를 말하면 보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 논쟁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면 차라리 복지 타령이나 말지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특히 자살)은 개인적 결정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사회가 죽음으로 내몰고 '왜 살지 죽었어?' 한다면 너무 하지 않는가.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인 하승수의 두 번째 팸플릿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를 읽으며 '기본소득'이란 낯선 단어에 귀가 번쩍 뜨인다.

만약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세 모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결과를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생활고로 인하여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본소득이란 다른 말로 '시민배당'인데, 국가로부터 돈을 받을 권리에 따라 돈을 배당받는 걸 말한다.

누구에게나 주식배당처럼 시민배당을 줘야

시민배당은 공유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토지·자연환경·동식물·자원·기후 등은 누가 애써서 생산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어느 특정인의 소유여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 이미 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공공재임에도 불구하고 선점하고 값을 매겨 재산화했다.

시민배당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본래 공유였던 것을 사유화했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을 환수하여 시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재산이 있든 없든, 직업이 있든 없든 국가로부터 지급 받는 돈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 배출행위에 대하여 부담금을 매겨 그 돈을 시민에게 배당하자는 것이다.

이미 미국 알라스카 주에서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주민들에게 배당금을 주고 있다. 노동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주민이면 받는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1년에 1758억 원(2014년 기준)을 배당받는다. 대한민국의 국토에서 산다면 대한민국의 토지와 환경 때문에 나오는 이득을 배당받을 자격이 있다.

"'공유'라는 개념에 기반해서 재원을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불평등을 완화하고 불안을 줄이며,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고 생태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18쪽 중에서

세 모녀는 누구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긴급복지지원제도도 이용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고 받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일하지 않아도 국가가 시민배당을 한다면 굳이 신세진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삼성 대주주인 이건희 회장이 주식배당을 받으며 누구에게 고마워하거나 신세진다고 생각하겠는가. 보편복지를 힘주어 주장하는 이들도 선별복지가 가난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기는 정책이어서 반대하는 게 아닌가. 복지혜택을 받으려고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해마다, 혹은 달마다 증명해야 한다면, 그건 복지가 아니라 지옥이다.

시민배당은 권리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세 모녀니 당연히 시민배당을 받을 수 있다. 누구 눈치 볼 이유가 없다. 책은 기본소득에 대한 학문적 접근으로부터 시작하여 재원마련과 실제적 시행, 효과 등을 자료를 들며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경제정의실현과 환경보호,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면에서 이제 우리도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하승수 지음 / 한티재 펴냄 / 2015. 3 / 140쪽 / 8000원)
※책 뒤안길-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길일 것 같아 그 길을 걸으려고요.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하승수 지음, 한티재(2015)


태그:#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하승수, #녹색당, #기본소득, #시민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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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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