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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바뀌는 속도가 하도 눈부셔서 어지럼증이 생길 정도다. 여차하면 눈뜬장님 처지가 된다. 신조어도 마구 생기다 보니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혼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비빔밥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나름대로 흐름이 있다. 시민사회에서 담론이 형성되고 그것이 시민운동으로 번지며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몇몇 대안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런 현실을 몸소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럴 즈음이면 정치권에서 정당의 선거공약으로 내 걸리게 된다. 진보 정당이 먼저 시작한다. 곧이어 집권 여당의 선거공약이 된다.

농민기본소득, 얼마나? 어떤 식으로?
 

농민기본소득도 그런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민기본소득을 얘기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당해하는 표정을 봐야 했다. 당치도 않다는 그 표정부터 누그러뜨리는데 제법 시간을 들여야 했다. 아무 조건 없이 매월 일정액을 주는 것인데도 정작 받을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놀라운 일이 있었다. 북 콘서트 <마음 농사짓기>에서 들었던 얘기는 의외다. 농민기본소득을 제법 밀도 있게 얘기했는데 참석자들은 일제히 지급액을 더 높여야 하지 않겠냐는 것과 지급 요건이 더 완화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지자체가 감당할 의제가 아니라 어서 법제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경북에서 월 200만 원씩 2년을 지급하는 청년 농부제가 막 시행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00만 원의 90%를 정부에서 주고 10%만 농가에서 지급하는 제도다. 이처럼 농민 기본소득제는 조금씩 무르익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왜 공짜 월급을 주느냐'는 의문이 아직 다 사라지진 않았다. 어느 지역의 동네 어르신들에게 농민기본소득을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를 어색해해서 나는 '공짜 월급'이라고 했더니 훨씬 전달이 쉬웠다. 반응은 똑같았다.

"농민들한테 돈을 그냥 주면 일할 사람 누가 있겠어?", "무슨 돈으로 공짜 월급을 줘?"라는 반응이었다. 농민의 일반 정서가 '기본소득'의 개념과 철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장수읍에 지하상가가 생기면

기본소득제의 여러 쟁점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배당권'을 얘기해 보자. 기본소득제도는 배당권에 그 철학적·논리적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장수 로터리에서 장수교까지 지하상가가 만들어진다고 가정하자. 지하에 양쪽으로 들어서는 10평짜리 점포 수가 100개나 된다. 그러면 모두 천 평이다. 평당 300만 원이라고 하면 총액은 30억 원이다. 기존 도로의 지하 영역은 명백히 공유재이다. 공유재는 시민의 몫이다. 30억 원에서 공사비와 공사 업체의 적정이윤 외에는 모두 시민의 몫이다. 마찬가지 이치다. 장계면 소재지에 기차역이 들어선다고 할 때 집값과 땅값이 오를 것이다. 이는 땅이나 건물이 가치를 창출한 것이 아니라 교통정책에 따른 위치로부터 나온 불로 수익이며 나라 정책으로 인한 이익은 공유재다. 즉, 나라의 주권자인 시민의 몫이지 땅 주인, 건물주의 몫이 아니다.

시민들은 이 '시민의 몫'을 매달 꼬박꼬박 나눠서 받을 수 있다. 지하상가가 장수읍에 생겼고 기차역이 장계면 소재지에 생겼지만 계북 삵다리 마을에 살 건 천천 운곡마을에 살 건 똑같이 그 권리를 가진다.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국민'이 일본 천왕의 충직한 백성이라는 '황국신민'의 준말이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은 배당권을 갖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이것을 부패한 정권과 기업주 또는 투기꾼들이 독식했을 뿐이다.

2011년이면 8년 전이다. 무상급식을 놓고 전국이 시끄러웠던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것에 직을 걸로 사퇴했다. 지금은 전국의 초·중·고에 무상급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마다 조례가 만들어져 학교급식지원센터까지 설립되었다. 농민기본소득이 학교급식의 사례를 어떤 속도로 따라갈지 두고 볼 일이다.
  
실업문제, 노년 빈곤 등 기본소득으로 해결

"일을 안 하면 밥을 안 준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진다. 일하래야 할 일이 없다. 기계들이 일을 해서 사람이 할 일은 빠르게 줄어든다. 자율 자동차나 공유 택시 등장으로 택시 기사들이 난리다. 하이패스 단말기가 늘면서 고속도로 나들목 수금원이 정리해고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가속화된다. 실업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대우해양조선과 현대중공업 합병 문제로 시끄러웠고 현대자동차 광주형 일자리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자리 창출이라는 국정 목표는 유효하지 않다. 실업 문제를 고용으로 풀지 않고 기본소득 시민 배당과 금융 혁신으로 해결하는 패러다임의 대 전환을 해야 한다. 

실업과 수입의 불안전 공포 때문에 보험과 부동산에 집착한다. 기존 복지제도들은 관리와 처벌과 운영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선진 각국과 정당들이 기본소득제도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2013년에 비록 부결되었지만 스위스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월 300만 원씩 지급하자는 국민투표까지 있었다. 브라질은 2002년과 2003년에 상·하원에서 입법 승인이 났다. '시민 기본소득법'이다. 현재 미국의 알래스카주에서는 갓난아기까지 포함하여 연 1000~2000달러씩 지급된다. 4식구 면 4000~8000달러씩이다. 일본은 45세 미만의 자격을 갖춘 취농인(신규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5년~7년 동안 해마다 2200만 원씩 지급된다. 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은 직불제 형태로 청년 농민에게 직불금 총액의 25%를 별도로 지급한다. 

핀란드 정부는 전 시민에게 월 100만 원 지급을 목표로 지난 2017~2018, 2년간 기본소득제 실험을 했고 이를 핀란드 사회보장국(Kela)에서 예비 보고서를 공개함으로 기본소득제를 본격화하고 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취약 계층인 농민이 우선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세계 시민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농민 월급제의 미래
 

우리나라에서는 성남과 서울의 제한적인 '청년 배당제' 이외에 '농민 월급제'가 여러 곳에서 실시되고 있다. 농민 월급제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30만 원에서 200만 원까지 매월 지급하는 데도 있고(나주시) 30만 원에서 170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거창군). 기간도 제각각이다. 나주시는 10개월 동안인 데 반해 거창군은 7개월 동안 지급된다. 함양군은 30만 원에서 150만 원까지를 7개월간 지급하는데 대상 품목을 양파까지 확대했다고 한다. 근데 거창과 함양은 조례가 만들어져 있지 않다. 전국적으로 조례가 만들어진 곳은 18개 도·시·군으로 내용은 붕어빵처럼 천편일률적이다. 목적, 대상, 절차와 방식, 규모, 액수, 선정기관 등이 똑같다. 마치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전남 강진군에 전국 최초로 귀농 귀촌 지원 조례를 만들어주고 나서 전국으로 똑같은 내용이 복제되었던 것과 판박이다. 

그런데 이 농민 월급제는 농민기본소득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갈지 주목할 필요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월급이라고 하면 일을 하는 사람이 일정액을 안정적으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농민 월급제는 속되게 표현하자면 '농산물 담보 무이자 대출 제도'이다. 전국 30여 개 시군에서 실시되는 이 제도는(조례 제정은 18개 시군) 천편일률적으로 개별 농가가 연초에 농협과 출하약정을 체결하면, 약정금액의 50%~60%를 농번기에 월별로 나누어 지급한다. 당연히 추수할 때 원천징수를 한다. 그사이에 발생하는 이자를 지자체가 보전해 주는 제도다. 이자 없는 빚인 셈이다. 

2013년에 전국 최초로 이 제도를 시작한 화성시와 순천시는 여러 보완 요청을 받고 있다. 우선 계통출하 능력이 있어야 자격요건이 된다는 게 장애다. 정작 기본소득이 필요한 가난한 농민은 그림의 떡이다. 농협과 업무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품목이 제한적인 것도 문제이고 지급액도 3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매우 적다. 미리 돈을 당겨쓰는 꼴이라 가을에 목돈을 만질 수 없는 것도 한계다. 순천시는 신청 농가가 점점 줄고 있다. 

장수군은 아직 이마저도 하고 있지 못하지만 정책으로 채택한다면 이 제도의 근본 한계를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장수에서 '농민 월급제'가 거론된 것은 2017년이다. 관내 농가의 30% 정도가 참여한다고 할 때 1억 5천만 원 정도의 이자 보전 비용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농민 월급제를 잘 키워내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농촌의 각종 선별적 복지제도나 보조사업, 지원 사업을 직접 지불금 개념의 농민기본소득제로 전환해 가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국가 차원의 정책으로 채택하고 입법화가 목표다.

"돈은 있다"

가장 최근의 기본소득 제도를 잘 정리한 책으로는 강남훈의 <기본소득의 경제학>과 야마모리 도루의 <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이 있다. 특히 하승수의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에는 한국의 경제 상황과 재원 마련 방안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돈은 남아돈다"이다. 

환경파괴를 일삼는 토건 사업이 매년 40조 원이다. 대기업 집단들이 혜택을 보는 조세감면, 비과세, 세액공제, 우대세율 등 조세지출이 연 33조 원이 넘는다. 대한민국 조세부담률 24.3%를 오이시디 평균인 34.1%로 만 해도 153조가 생긴다. 여기다가 노인 요양, 유치원, 연금, 복지원, 교육기관 각종 복지형 국비에 들어가는 간접비 즉, 관리·감시·감독·처벌 비용은 천문학적인 숫자다.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그 돈의 대부분은 시장으로 나온다. 소비재 구매에 쓰인다. 국민경제가 활성화되는 동력이 된다. 

이런 관점과 시각이 문제다.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 여겨야 실현될 확률이 높아진다. 작년 2018년도에 삼성은 영업이익이 약 776억 달러로, 원화로는 약 91조 원에 달한다. 세계 3위다. 시민 배당금이 상당 부분 포함된 돈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가 초등학생들까지 갤러리를 생산비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사 줬기 때문이라는 '시민 배당 의식'의 눈으로 봐야 한다. 더 많은 농민이 그렇게 바라본다면 농민기본소득은 그만큼 더 빨리 실현될 것이다. 뒷전에 앉아 불로소득처럼 챙길 게 아니라 자연의 위대한 상속자로서 건강한 밥상을 책임지는 농민이라야 농민기본소득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간, 여남 간, 세대 간 내부 식민지를 해방하는 투쟁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주에 나올 장수군 귀농인 잡지 <뜬봉샘>에도 실립니다.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생태적 전환과 해방을 위한 기본소득

하승수 지음, 한티재(2015)


마음 농사 짓기 - 농부 전희식의 나를 알아채는 시간

전희식 지음, 모시는사람들(2019)


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 - 국민 복지의 뜨거운 화두, '기본소득'에 대한 입문서

야마모리 도루 (지은이), 은혜 (옮긴이), 삼인(2018)


기본소득의 경제학

강남훈 (지은이), 박종철출판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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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귀농. 2007년 3월부터 치매를 앓는 늙으신 어머니랑 사는데 삶의 새로운 영역을 맛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