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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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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13주기 추도식을 성공리에 마친 청계모임은 자신감을 얻어 사기가 충천했다. 그 여세를 몰아 강제 해산 된 청계노조를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청계모임은 이 일을 전담하기 위해 민종덕에게 1983년 12월 1일 회의에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상근 간사를 맡겼다.

청계모임은 내부 조직을 다지고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 말과 1984년 초 겨울 동안, 기관원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연수 숙박교육을 했다. 당시는 마땅한 교육 장소가 없어서 무척 애를 먹었다. 눈 쌓인 산길을 헤치며 많이 이용했던 과천의 '영보수녀원'을 단골로 이용하기도 했고, 송추계곡의 어느 한적한 집을 이용하기도 했다.

1984년 봄이 되면서 청계모임의 목표가 서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봄, 청계노조 복구를 위해 힘을 모으다

청계노조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지지는 물론, 이를 추진하는 주체들이 무엇보다도 현장 투쟁의 경험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노동조합을 복구하면, 독재정권으로부터 불어 닥칠 혹독한 탄압이 예상되었다. 그 예상되는 탄압을 이겨내는 길은 노조복구의 정당성에 기초한 명분과 2만 여 청계천 노동자는 물론 전체 노동자와 시민들의 지지뿐이었다.

이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투쟁의 고리를 잡기 위해서 고심하던 중, 1984년 3월 6일 신광용이 연행되어 구속되는 일이 발생했다. 신광용은 아프리 사건 때 3층에서 뛰어내려 부상을 당해, 불구속 상태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불구속 상태로 그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갑자기 구속을 시켜버린 것이다.

이에 청계모임에서 즉각 '신광용 동지 석방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원장 민종덕, 부위원장 황만호, 박계현, 김성민, 김향숙 그리고 간사 김영대를 뽑았다. 지금까지 이런 대책위원회는 대개 재야 유명 인사들로 구성되어 유명 인사들을 앞세워 싸워왔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직접 당사자인 자신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려 싸우기로 한 것이다. 신광용 석방투쟁이라는 고리를 활용해 조직력을 과시하고 아울러 투쟁의 경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당시 정세는 유화국면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다. 승산이 있는 싸움을 통해서 투쟁의 성과를 거둔다면, 그만큼 조직력과 투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신광용 석방 대책위원회'는 신광용 동지의 구속 경위와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독재정권의 청계노조 강제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이 부당한 행위에 항거하다 구속된 노동자들의 정당성을 알렸다. 구속된 신광용 동지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청계노조 재건에 대한 의지도 밝혔다.

아울러 '신광용 석방 대책위원회'는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상대로 정부당국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는 홍보활동을 펼쳤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3월 20일 아침 8시 30분, 청계노동자들이 출근하는 각 상가 길목에서 "근로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라는 유인물을 대대적으로 배포하기로 했다.

실행 전날 저녁, 유인물 배포 팀은 신당동의 자취방에 모여 내일 아침에 유인물을 배포할 위치를 정하고 경찰이 연행하면 어떻게 행동하고, 연행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숙지하였다. 그리고 유인물 배포 조를 짰다.

노동자들이 출근시간에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을 찾아봤다. 우선 평화시장, 동화시장, 을지상가, 연쇄상가가 모여 있는 을지로 6가의 평화시장 앞길, 덕수중학교 정문 앞(지금의 프레야타운), 동화시장 입구 그리고 국립의료원 뒷골목에 인원을 집중 배치하였다.

한 조를 3명 내지 4명으로 해서 4조 정도를 이곳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신평화시장, 부관시장(지금의 동평화시장)을 상대로 한조, 동신상가 을지로 가정집공장 등에 각 한조씩을 배치하여 아침 8시 30분을 기해 동시에 유인물을 뿌리기로 했다.

시작된 유인물 배포 투쟁, 경찰과 쫓고 쫓기는 아침

다음날 아침, 약간의 긴장감과 기대감 그리고 새로운 투쟁에 대한 호기심 등이 뒤섞였다. 유인물을 한 아름씩 안고 각자 배치된 위치로 갔다.

드디어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일제히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노동자들한테 "근로자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라는 큼지막한 유인물 한 장씩이 배포했다.

노동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어! 노동조합이 없어진 것으로 알았는데 언제 생겼어요?"
"네 노동조합이 강제해산 되었지만 이제 우리 힘으로 다시 재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노동조합이 있어야 근로조건이 개선되고 사장들이 우리한테 함부로 하지 않죠.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유인물을 받아가면서 이런 격려의 말을 하는 노동자를 볼 때는 힘이 저절로 났다.

출근 시간이 바빠서 아무런 표정 없이 유인물만 받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이쪽에서 "수고하세요"하면서 인사했다.

매우 드문 경우에는 유인물을 받아보고 관심이 없다는 듯이 다시 되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럴 때는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유인물 배포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서 주변이 소란했다. 돌아보니 상가 경비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유인물 배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자 유인물 배포를 엄호하는 조가 나타나서 상가 경비들을 막았다.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해서 엄호조를 배치해 놓은 것이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청계천의 각 상가가 노동자들과 상가 측 사람들이 옥신각신하는 소리로 아침 출근시간에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이어 기동경찰들이 나타났다. 경찰들은 유인물 배포를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붙잡아 연행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유인물 배포조는 경찰들을 따돌리면서 멈추지 않고 유인물을 계속 배포했다. 약이 오른 경찰들은 몇 사람의 남성 노동자들만 지목해서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 지리와 상가 건물 구조를 더 잘 아는 노동자들은 이쪽 입구로 들어갔다가 경찰을 따돌리고 다른 출구로 나와서 다시 유인물을 배포했다. 경찰이 또 쫓아오면 다시 상가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구멍으로 나오고, 이렇게 쫓고 쫓기면서 출근시간이 끝날 때까지 유인물을 다 돌리고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이날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중부경찰서에 연행된 회원들은 6명이었다.

이날 아침에 벌어졌던 유인물 배포 사건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상가 전체에 퍼졌다. "이제 노동자들이 뭔가 들고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노동자들한테는 기대 섞인, 사용주들한테는 우려 섞인 이 소문으로 전체 작업장이 술렁였다.

이날 연행된 사람들은 10시간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다음날은 유인물 배포 투쟁을 건너뛰었다. 경찰과 경비들이 어떻게 대비하는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2일. 또 다시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방법으로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날 아침에도 노동자들은 경찰들과 쫓고 쫓기면서 청계천 상가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런데 경찰의 연행 작전은 지난번하고는 약간 다른 양상이다. 지난번처럼 유인물 배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연행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민종덕 대책위원장을 지목해서 연행하려는 것이다. 경찰은 그 사이에 대책위원회에 대한 정보에 따라 위원장의 사진을 가지고 위원장만 쫓는 것이다. 유인물 배포 팀도 위원장을 집중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결국 경찰의 물리적인 힘에 밀려 위원장이 경찰에 붙잡혀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민종덕은 이날 7시간 동안이나 중부경찰서 정보과장을 비롯해 정보과 형사들과 조사과정에서 말씨름을 하다가 풀려 나왔다.

청계노동자들의 이 같은 투쟁 상황을 시시각각 전해들은 이소선은 이들을 격려하고 제발 몸 성히 안전하기를 기도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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