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포스터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포스터 ⓒ CJ E&M


고등학생 때 <서울대 의대 3인 합격 수기>, <7막 7장> 같은 책들이 유행했었던 기억이 있다. 교육 과정과 대입 전형이 거의 해마다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이 책들의 구절 하나하나에 매달려야 할 만큼 간절히 원했던 것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에 입사하는 꿈. 그 뒤의 미래는 궁금해 할 틈도 없었다.

'나의 꿈은 대기업 회사원입니다'는 진리와도 같은 명제였다. 장래희망을 배우, 성악가, 화가, 작가, 과학자라 말하는 아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꿈을 꾸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이 꿈이 어떻게 됐냐하면, 대부분은 소위 '이해찬 세대'가 품었던 환상만큼 산산이 부서졌다. 누군가는 한동안 이 사회의 낙오자가 된 듯한 느낌에 시달렸을 것이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누군가는 몇 년이고 수능을 다시 치렀을 것이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Smart is the new sexy'라는 말이 상기한 책들처럼 유행하고 있는 까닭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동일 터다. 내신 등급, 수능 점수, 자격증 갯수, 인턴 경험의 양, 어학 점수, 봉사활동 시간 따위의 수치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오히려 논리란 없다.

우리는 이미 고학력, 고스펙을 갖춘 이들이 이와 비례한 능력이나 인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수치들은 아직 우리의 일상을 장악하고 있다. 이른바 '뇌가 섹시한 남자', '뇌섹남'들이 각광받는 것은 이러한 수치의 비논리를 격파하고 논리로서 이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토론 도중 말문이 막힐 즈음 '이게 현실이니까' 따위의 근거 없는 방어를 하기 보다는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논지를 펼친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더욱 빛난다. 물론 그저 언변이 뛰어날 뿐인 궤변론자들을 '뇌섹남'이라고 부르는 오류-이를테면 IS와 페미니스트를 동일선상에 둔 칼럼니스트라든가-도 종종 목격되지만, 시대가 호명한 '뇌섹남'이 '스펙남'과 같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대기업 면접, 국제중 입학 문제 푸는 게 '뇌섹남' 이라고?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예고편의 한 장면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예고편의 한 장면 ⓒ CJ E&M


지난 2월 26일 첫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뇌섹시대-문제적 남자>(이하 <뇌섹시대>)는, 이 시대가 왜 '뇌섹남'을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초청된 '뇌섹남'들의 화려한 스펙을 줄줄 읊는데에만 1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고교 시절 전교 1등' '영국 명문 사립고 출신' '카이스트 경영공학 석사' '세계 명문 시카고대 출신' 같은, 학원가 현수막에서 볼 법한 문구들이다.

게다가 '뇌섹남'들을 앉혀 놓고 한다는 말은 "카이스트 박사 과정이면… 학창 시절에 공부 정말 잘했죠?" 같은 '쌀로 밥 짓는 소리' 뿐이다. 아무리 '학벌 초월' '스펙 초월'이라는 말들이 오용되거나 공염불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뇌섹시대>가 보여 준 '뇌섹남' 접근법은 이조차 거스른다. 그야말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뇌섹시대>가 '뇌섹남'들에게 건넨 과제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글로벌 대기업의 면접 문제였다. 대기업 취업 컨설팅 전문가들이 '전문적 남자'가 되어 이들을 평가한다. 그렇기에 이 모든 과정은 대기업 입사를 기준으로 진행된다. '면접'은 상호가 동등한 위치에서 발언하는 토론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뇌섹남'들은 '정답' 같이 여겨져 온 것들을 논리로 격파하는 쾌감을 선사하는 대신, 그저 기존의 정답들을 맞히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런 탓에 상상도 못했던 재기발랄한 답변에 대한 기대감은 물거품이 됐다. 면접관의 마음에 드는 거짓 답변을 하자는 의견이 나올 뿐이다. 바칼로레아(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편집자 주)를 도입했더니 모범 답안을 예상해 주는 맞춤 학원이 등장한 꼴이다. 이럴 바엔 어려운 수학 문제 맞히기 같은 '진기명기'를 보여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뜬금 없는 중국어학원 PPL까지 보고 있노라면, 이 프로그램에는 <뇌섹시대>보다는 <전국학력자랑> 내지는 <스펙시대-면접의 비결> 같은 제목이 어울릴 것도 같다.

이후 제시된 과제는 국제중 입학 면접 문제다. <뇌섹시대>는 이를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문제'로 설명한다. 기껏해야 13년 인생을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해석이다. '특목고 진학률 50%' '귀족 중학교' 따위의 수식에 감탄을 연발하는 출연자들은 차치하더라도, '1학년 국영수 평균 A등급(50%)' 곁에 덧붙인 '일반 중학교 평균 등급 18%'라는 비교 멘트는 어이가 없을 정도다. 토론 면접이라 대기업 면접보다는 흥미진진했지만, '상위 클래스' 같은 표현을 통해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계급화하는 가치관이 과연 '현실'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뇌섹시대>의 출연자들에게 '뇌섹남' 자격론이 제기되는 것은 부당하다. 다만 '뇌섹남'이라는 호명의 근거와 시대적 요구를 무시한 채 그저 강박적으로 트렌드를 좇으려 하는 제작진의 태도는 안일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뇌의 섹시함'이란 수치화할 수 있는 가치도, '불합격'이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도 아니다. 출연자들이 진짜 '뇌섹남'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뇌섹시대>에서 주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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