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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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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당국은 허를 찔렸다고 생각한 것인지 몰라도 안기부, 경찰 등 기관원들은 즉각 이소선과 추도위원장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도식을 준비하는 추도위원회에서는 추도식을 홍보하기 전에 이미 추도식 준비를 끝내 놓고, 당국의 감시도 예상해 그에 대비해 놓은 상태였다. 경찰, 안기부 요원들은 기관에 따라 근거리, 원거리에서 이소선과 민종덕을 따라 다녔다.

그러다가 그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레이건 방한이 가까워지자 그들(기관원)들은 이소선 등을 아예 집에 연금을 시켜버렸다.

기관원들이 가택연금을 시키는 방법은 사복경찰이 원거리에서 잠복하고, 기관원 서너 명이 대문 앞에서 24시간 상주하면서 완력으로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감시하는 기관원들이 가택연금 대상자한테 친한 척하면서 슬금슬금 집안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그들을 절대 대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한번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기관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린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떨고 있는 기관원들이 인간적으로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소선은 냉정하게 대응했다.

12. 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따라서 정권의 정통성은 고사하고 광주 학살을 자행한 살인 독재자에 불과했다. 이렇게 등장한 정권에 맨 처음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것은 독재정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레이건 또한 극우파로서 한국의 독재정권 지원을 약속하고 그 일환으로 방한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재야 민주인사들은 레이건 방한을 적극 반대했다. 연일 레이건 방한 반대 집회를 열었고 레이건 방한을 앞두고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진 환영 아치가 불태워진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레이건 방한을 계기로 미국 등 외신에서는 한국의 정치, 인권 상황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소선, 아들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가택 연금

이 같은 상황에서 당국이 이소선을 아들 추도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가택에 연금을 시켜놓았다는 외신 보도가 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소선은 추도식 당일에는 가택연금이 풀려 추도식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추도위원장인 역시 추도식 당일에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강력하게 항의하자, 지금까지 힘으로 집밖으로 나갈 수 없게 막아서던 기관원들이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대신 버스를 타고 가겠다는 그를 강제로 자신들의 차에 태워 집결 장소에까지 태워다 주었다.

이소선은 집결장소인 동대문종합시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집결장소에는 청계 조합원들을 비롯 많은 노동자, 민주인사들이 앞서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사복경찰들이 사방에 깔려 있고, 주차장 주변에는 기동대 버스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사복경찰들은 눈을 무전기를 들고 바쁘게 움직이면서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아울러 사복경찰만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아닌 외신기자들이었다. 레이건 방한에 동행한 외신기자들이 대거 몰려와 커다란 카메라와 마이크를 메고 분주하게 다니면서 취재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추도위원회에서 관광버스 회사와 추도식 당일 아침 10시까지 관광버스 4대를 이곳 주차장까지 대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도 버스는 오지 않는 것이다. 이에 참석자들이 웅성거리자 약속된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나서야 버스 한 대만 오는 것이다. 추도위원장이 버스 기사한테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버스 기사는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회사에서도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것이다.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이것은 분명 기관에서 버스 회사에 압력을 넣어 추도식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즉각 이러한 사정을 참석자들한테 알렸다.

"여러분 (정보) 기관에서 관광버스 회사에 압력을 넣어 버스가 한 대밖에 오지 못했으니 우리 여기에서 추도식을 합시다."

이에 이소선과 조합원 그리고 다른 참석자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다.

"좋지요. 여기서 하면 더 좋지요"

그러면서 모두 그 자리에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이 이렇게 나오자 경찰이 긴장한다. 경찰 우두머리가 대열 앞에서 노래를 지휘하는 조합원을 끌고 가려고 한다. 그러자 대열에서는 더 크게 노래를 불렀다. 지휘하는 조합원은 경찰을 뿌리치면서 더 의연하게 선동했다. 이러한 광경이 펼쳐지자 커다란 카메라를 맨 외신기자들이 몰려와 취재를 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경찰들한테 카메라를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자 사복경찰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과 동대문경찰서 정보과장은 부하들한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안 보이는 데로 가란 말이야, 안 보이는 데로!"

이 말을 듣고 떼 지어 있던 사복 경찰들이 이번에는 우르르 주차장 밑의 차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추도식 참석자들이 노래를 부르다 말고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경찰들이 우왕좌왕 하면서 상급자의 명령에 몰려다니면서 숨는 모습이 우습게 보인 것이다.

참석자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며 농성했다. 이 광경을 외신기자들은 계속 찍고 있었다. 정보과장은 이소선과 민종덕한테 와서 한 대만 더 보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민종덕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우리가 계약한 4대를 지금 당장에 보내라 "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버스는 한 대씩 띄엄띄엄 오는 것이다. 한 대씩 보내면서 참가자들의 태도를 보는 것이다. 3대까지 감질나게 보내주고 있다. 그러자 또 다시 선동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여기서 마석 모란공원까지 걸어갑시다. 경찰이 버스를 보내주지 않아서 우리는 부득이하게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태일동지 추도식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어이 마석에 도착해서 추도식을 거행합시다."

이렇게 외치자 참석자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줄을 세우고 추도식 플래카드를 맨 앞줄에 세우고 그 뒤에 이소선을 비롯 청계 조합원들과 참가자들이 주차장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은 바짝 긴장한다. 기동대가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퍼포그 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몸이 달은 정보과장이 버스회사에 급하게 전화를 해서 왜 버스를 빨리 보내지 않느냐며 큰 소리로 통화하는 것이다.

드디어 낮 12시 반이 넘어서야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다. 이에 참석자 모두 함성을 올리며 차에 타고 마석으로 향했다. 참석자들은 4대의 버스에 자리를 다 채우고도 서서 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청계노동자뿐만 아니라 70년대 민주노조 사람들, 재야민주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가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었던 그동안 어둠을 불사를 불씨가 지펴지고 우리들이 다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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