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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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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청계노조가 강제 해산 당하고, 아프리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 수배된 상태에서 세상은 어둠같은 침묵만 짙게 깔려 있었다.

1981년 11월 13일 전태일 11주기 추도식이 다가왔으나 그동안 전태일 추도식을 주최해왔던 청계노조가 해산된 상황에서 추도식을 주최할만한 단체가 없었다. 그래서 유가족, 구속자 가족, 조합원 그리고 재야인사 몇 분이 함께 추도식을 주최하여 거행하게 되었다. 비록 초라하게 치러진 추도식이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각오와 결연한 의지로 전태일의 뜻을 실현하고자 다짐했다.

신군부는 청계피복노조를 필두로 반도상사, 서울통상, 태창섬유, 남화전자, 무궁화메리야스 노조 등 일련의 70년대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불법 부당한 만행은 계속되었다.

신군부독재정권은 81년 7월 콘트롤테이타 노동조합을 파괴시켰다. 콘트롤테이타는 다국적 기업으로서 그 동안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해오다가 마침내 공장철수를 단행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해고시켰다.

이에 콘트롤테이타 노동조합은 공장철수 반대와 부당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투쟁했다. 그러나 정작 자국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할 우리나라의 노동부에서는 콘트롤데이타 해고자의 복직을 시키지 못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노동자 50여 명은 노동부에 찾아가서 노동부의 처사를 규탄하고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그러자 경찰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농성 노동자 전원을 연행하고 그중 3명을 구속시켰다.

또한 70년 대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의 하나인 원풍모방 노조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숨통을 조여 왔다. 지부장과 부지부장을 정화 해고시키고 상집위원과 대의원을 연행하여 강제사표를 받고 해고 조치하였다. 이밖에 노동부에서는 법률적 근거도 없이 통합종용을 하는 등 온갖 탄압을 자행해 오다 마침내 1982년 9월 27일 100여 명의 정체불명의 구사대들이 노조사무실에 난입해 노조간부와 조합원들을 사무실 밖으로 강제로 끌어내고 사무실의 기물을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조합 간부가 정신을 잃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에 현장에 남아있는 650여 명의 조합원들은 "폭력배 물러가라", "노동조합 사무실 돌려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투쟁하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투쟁은 계속되다가 마침내 10월 1일 새벽 회사 정문에서 농성하다가 전투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모두 끌려나왔다.

이렇게 해서 70년대 민주노조는 원풍모방을 마지막으로 단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었다. 신군부 정부는 민주노조를 완전히 파괴하는 등 노동운동을 압살한 상태에서 노사분규가 81년에 비해 82년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83년 초에는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사업장에 즉시 개입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70년대 민주노조 간부 출신들은 구속, 수배, 정화, 삼청교육, 해고 등으로 엄청난 좌절과 분노를 되씹어야 했다. 모두들 생활과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은 서로 만나기 시작했다. 만나서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지독한 외로움을 달래면서 앞날을 기약했다. 이때 이들은 해고자라는 뜻을 상징하는 '고자모임'이라는 자조 섞인 이름으로 만나 주로 관악산을 등산하면서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달랬다.

이처럼 폭압적인 노동운동 탄압 속에서도 어떻게 하면 노동운동의 불씨를 꺼지지 않게 할 것인가를 재야 민주인사들은 고민했다. 특히 전태일 추도식에 참가한 재야인사들은 청계노조의 아프리사건으로 구속된 이소선, 황만호, 전태삼, 김영대, 박계현, 김성민, 임기만, 이덕곤, 문숙주 등 11명이 너무나 가혹한 형벌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을 위한 구명운동이나 지원활동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구속자들을 위한 기구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몇 번의 모임을 거쳐 마침내 1981년 12월 14일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는 당국으로부터 탄압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겉으로는 전태일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하는 것으로 표방하지만, 실제 활동 내용에 있어서는 구속자 석방운동 및 지원, 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노동운동 탄압에 바람막이를 하고 청계노조 재건을 지원하는 것 등이었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를 발족시킨 인사들은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이우정(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 위원장), 이창복(전 국회의원), 김동완(목사 전 NCC총무), 이길재(전 국회의원), 김창국(전 상지대총장), 정인숙(전 민주노총 여성노조위원장), 윤순녀(전 노동사목회장), 정양숙(전 가톨릭노동청년회장) 등으로 주로 신구교의 인사들과 재야, 노동운동가들이 망라되었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회장은 공덕귀 여사가 선출되었다. 공덕귀 여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써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 정권 내내 반정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서 활동해왔다. 공덕귀 여사는 70년대 재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소선과 신뢰와 친분이 두터웠다. 77년 이소선이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에도 공덕귀 여사는 노동교실에 직접 방문하여 이소선 구속을 항의 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었다.

공덕귀 회장을 중심으로 기념관건립위원회는 전태일기념관 건립기금 모금활동을 벌이는 것은 물론 구속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 면회, 모금활동 등을 열심히 했다.

헌 옷 장사, 죽은 사람 옷 수집해 와서 깨끗이 빨아 팔기도... 

81년 말에 만기 출소한 이소선은 심신이 매우 지처 있었다. 그렇다고 여유롭게 맘 편하게 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우선 당장 급한 대로 어린 손자 손녀를 살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신당동 중앙시장에 나가서 헌 옷을 사다가 세탁해서 파는 일을 며느리하고 시작했다.

중앙시장에 나가면 헌 옷을 수집해 오는 고물장사가 있다. 그 장사한테 옷을 사서 깨끗하게 세탁하고 수선해서 파는 것이다. 이소선은 이 장사를 오래 전부터 해 왔었다. 청계노조 초창기에도 이 장사를 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노조운영을 이어 나갔다.

헌옷 장사에서 이문을 많이 남기는 것은 죽은 사람 옷을 수집해 와서 깨끗이 빨아서 파는 것이다. 이소선은 낮에 죽은 사람 옷을 수집해 와서 밤새도록 며느리하고 손빨래를 해서 널어놓았다 다음날 다 마르면 깨끗이 다려서 내다 파는 일을 해서 생활을 꾸려 나갔다.

며느리는 낮에는 삯바느질을 해서 마련한 돈으로 틈틈이 감옥에 있는 남편 전태삼을 면회 다녔다.

이소선은 아들 태일이의 목숨과 바꾼 청계노조도 해산되고, 수많은 조합원들이 구속된 상태에서 집안 형편까지 엉망이 된 것을 볼 때 마음이 허했다. 헌 옷 장사를 해서 집안을 어느 정도 수습해 놓으니 허한 마음이 더 했다. 집안에서 손자 손녀 돌보며 평범하게 사는 것은 징역살이 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이소선은 그동안 노동운동 하느라 소홀했던 교회를 열심히 나가기로 했다. 그동안 믿는 자로서 교회 다니는 것을 소홀 했던 것을 반성하고 교회에 다시 다니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다닐 교회가 마땅치 않았다.

아들 전태일이 죽었을 때 장례식도 치러 주던 교회에서 자신이 노동운동 한다는 이유로 말도 되지 않는 모함을 해 그 교회는 다닐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창동교회를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직분인 권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거듭 난다는 각오로 교회를 다니고 아울러 흐트러진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데 마음을 쏟아야 했다.

이소선은 가정과 교회 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마을 주민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은 이소선한테 찾아와 의논하고 일을 해결 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식량이 떨어진 집에서 하소연 하면 이소선이 나서서 동사무소에 가서 밀가루라도 타 와서 해결해 준다든지, 의지할 곳 없는 이웃 주민이 상(喪)을 당하면 염습(殮襲)을 직접 해 주기도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마을 사람들과 한 집안처럼 지내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이소선을 집안 어른처럼 여기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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