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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마이뉴스가 헤쳐온 길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오마이뉴스 15년의 역사를 100대 기사와 사건으로 풀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61] 남양유업 '살인적 밀어넣기'로 급성장? (2005. 11. 10)

시대의 징후를 포착한 특종이 당대에는 정당한 값어치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2005년 11월 초 대리점 업주의 제보로 시작된 이승훈 기자의 남양유업 '밀어내기' 보도가 그랬다(http://omn.kr/bl4c). 보도 이후 남양유업은 대외적으로는 "불공정 관행을 시정하겠다"고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제보자를 색출하고 밀어내기를 은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주 시스템을 변경하려 했다.

남양유업 사태는 영업사원의 '욕설' 녹취록 공개 등으로 '갑의 횡포'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2013년 5월에야 뒤늦게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남양유업은 뒤늦게 사과 기자회견을 했지만, 회사를 기다린 것은 공정거래위원회의 1123억 과징금 부과와 검찰 수사였다.

[62] 황우석 사건 연속보도 (2005. 11. 21~2006. 1. 10)

2006년 1월 12일 오전 황우석 교수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연구원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2006년 1월 12일 오전 황우석 교수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연구원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 조사위원회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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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은 "다수의 믿음이 객관적인 사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줬다는 면에서 언론은 물론 사회 각계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계 최초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논문의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해 황우석 박사 측은 <PD수첩>의 취재윤리를 이슈화 시키며 검증을 회피했다. 황 박사를 옹호하는 여론은 '<PD수첩> 광고 취소'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분출됐고,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논문 검증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논문게재 사진의 복제 등의 새로운 정황이 뒤늦게 드러나며 황 박사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당시 서명숙 편집국장은 "연구원의 난자 제공이 있었다는 그동안의 의혹 제기가 사실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보도한 언론에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은 더 충격이었다"며 황우석 옹호 여론에 비판적인 기조를 유지했다. 12월 2일의 '황 교수팀이 답해야 할 '줄기세포 미스터리'(http://omn.kr/4xd0)가 대표적인 사례였지만, <PD수첩>의 취재 윤리를 몰아세운 칼럼('황우석 몰아세운 일그러진 진보주의', 12월 5일)들도 실렸다.

물론 사건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황우석 팀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줄 만한 언론사를 선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충분한 정보를 주지 못한 점은 반성해야 할 지점으로 남는다.

[63] 소프트뱅크의 110억 투자 유치 (2006. 2. 14)

오연호 대표가 일본 도쿄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대표를 만나 총 110억 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했다(http://omn.kr/1ogb). 한국의 언론사 가운데 외자를 유치하고, 그 모델이 다른 나라에 직접 수출된 것은 오마이뉴스가 처음이었다. 그해 8월 28일 손 대표는 자신의 자본으로 설립된 오마이뉴스 재팬에 시민기자로 가입해 '총리 직선제'를 주장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64] 서명숙 국장의 조직개편 단행 (2006. 4. 14)

3월 28일 기자회원 게시판에 한 시민기자가 취재 중인 사안을 상근기자가 인지하고도 별도 취재를 통해 먼저 기사를 출고하는 일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와 해당 상근기자는 취재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게시판에서는 시민기자제 운용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끊이지 않았다.

오마이뉴스는 4월 6일 시민기자 오프라인 간담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한 뒤 17일 '생나무 클리닉 오픈' 등 수습책을 내놓았다. 생나무 클리닉을 통해 시민기자는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 등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이와는 별도로 서명숙 편집국장은 4월 14일 정치·경제·사회 중심의 상근기자 출입처 취재를 없애고 기동취재팀과 소편집장제로 통폐합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서 국장의 개편안은 창사 이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담았지만, 조직이 안정화되지 못하면서 8월 25일 정치·경제·사회팀을 부활시키는 방향으로 환원된다.

[65]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함께 취재한 만취경관 폭행 사건 (2006. 5. 27)

5월 26일 밤 서울 남대문경찰서 아무개 경사가 만취 상태에서 시민들과 출동 경관을 폭행하고, 경찰 간부가 나서서 보도를 무마하려는 정황이 포착됐다(http://omn.kr/bmpl). 시민기자의 취재 지원을 위해 상근기자가 당일 현장에 출동했고, 둘의 협업으로 생생한 현장 기사와 함께 후속 취재가 이루어졌다. 오마이뉴스의 취재편집 시스템에 대한 시민기자들의 앙금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양자간 갈등의 골을 메운 사건으로 기억된다.

[66] "내가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번역" (2006. 10. 11)

유명인을 내세운 대리번역은 베스트셀러 사재기와 함께 출판계의 오래된 폐습이었다.

구영식 기자는 정지영 아나운서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의 실제 번역자라고 밝힌 김아무개씨를 인터뷰했다(http://omn.kr/bkav). 기사가 나가자 출판사는 "스타 마케팅 차원에서 정 아나운서에게 번역을 의뢰해 놓고, 번역이 처음이라 불안해 김씨에게 이중으로 번역을 의뢰했다"고 실토했다. 논란이 커지자 정씨는 방송 일을 한동안 접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당시 한국기자협회에 가입하지 않아, 단독 보도를 하고도 '이달의 기자상'은 타사에게 돌아갔다. 오마이뉴스의 기자협회 가입은 2010년 10월에야 실현됐다.

[67] 한일 시민친구 만들기 (2006. 12. 15~ 17)

지난 2006년 오마이뉴스 재팬 창간을 계기로 '한국·일본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가 15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지난 2006년 오마이뉴스 재팬 창간을 계기로 '한국·일본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가 15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
ⓒ 윤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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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오마이뉴스 재팬 창간을 계기로 '한국·일본 시민 친구만들기' 행사가 15일부터 17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렸다(http://omn.kr/bpd5). 1회 행사에는 한국의 시민기자 25명과 일본 <오마이뉴스 재팬> 시민기자 25명 등 한·일 시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주부, 대학생, 스포츠 등 6개 분야로 조를 나눠 일본의 현장을 직접 방문, 취재했다. 2회 행사는 이듬해 강화도 오마이스쿨(11월 30일~12월2일)에서 열렸다.

[68] 오마이뉴스와 '문국현 바람' (2007. 7. 20)

지난 2007년 5월 21일 범여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포럼 창립총회에 참석해 기념강연을 가졌다. 문국현 사장과 천정배 의원등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지난 2007년 5월 21일 범여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포럼 창립총회에 참석해 기념강연을 가졌다. 문국현 사장과 천정배 의원등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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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 대표의 '선택 2007 리포트'는 그해 대선에서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http://omn.kr/bkdm). 리포트 1편과 2편에서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대선 출마와 성공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이후 여권에 '문국현 대안론'이 부상했다.

독자의 반응도 뜨거웠다. 시민기자들이 쓴 기사에도 문 후보에 대한 경계보다는 그를 응원하는 내용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10월 26일에나 거취를 결정하겠다던 문 사장도 출마 선언을 두 달이나 앞당겼다.

하지만 회사 안팎에서 문 후보 기사가 너무 많다는 우려가 나왔다. 급기야 9월 3일 노조 공정보도위원회가 토론회를 열었고, 의견은 '특정후보 띄우기로 보일 수 있다'는 우려와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충돌했다.

막상 대선 일정이 시작되고 문 후보에 비판적인 기사들이 함께 나오자 이번에는 문국현 캠프로부터 "오마이뉴스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문 후보는 12월 19일 대선에서 4위(5.8%)를 기록했다.

[69] 노무현 대통령 마지막 인터뷰 (2007. 10. 7)

지난 2007년 9월 2일 청와대 관저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중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지난 2007년 9월 2일 청와대 관저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중인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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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호 대표는 2007년 9월과 10월 청와대에서 3일간 13시간에 걸쳐 노무현 대통령을 심층 인터뷰했다(http://omn.kr/bpdq).

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지지자여서 구박받는 게 제일 미안하다",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안하면 당황할 줄 알았는데, 우리 진영에서 수류탄이 터져버렸다", "청와대에서 고개 들고 나가고 싶어 검찰과 절대 손잡지 않았다"는 등의 발언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6회로 연재를 중단한 '마지막 인터뷰'는 대통령 퇴임 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느 정도 합의된 시점에 재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09년 5월 23일 노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책으로 나왔다.

[70] 이명박 후보 '마사지걸' 발언 논란 (2007. 9. 12)

인연으로 따지면, 오마이뉴스와 이명박 대통령은 '악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6월 13일 그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지 3주 만에 오마이뉴스는 '수도서울 봉헌' 발언(7월 1일)과 아들과 사위가 히딩크 당시 월드컵 축구팀 감독과 기념사진을 찍은 사건(7월 3일)을 연달아 보도했다.

대선 기간에는 신문사 편집국장 만찬에서 나온 '마사지걸' 발언을 보도했다(http://omn.kr/bke1). "예쁜 여자는 많은 손님들을 받았겠지만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자신을 선택해준 게 고마워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하게 된다"는 후보자의 '인생 경험담'은  여성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명박 캠프 사람들은 후보자의 이미지를 해치는 기사의 확산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했다. 특히 미디어담당 간사였던 진성호씨는 9월 21일 뉴스콘텐츠저작권자협의회 간담회에서 "(마사지걸 보도 관련) 네이버는 평정된 것 같은데, 다음은 아직 폭탄이어서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해 큰 논란을 낳았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후에도 오마이뉴스는 "촛불집회 배후는 주사파 친북 세력"(2008. 6. 7) 등의 문제 발언들을 계속 보도했고, 집권 5년 내내 오마이뉴스와 이명박 정부의 긴장 관계는 계속됐다.

[71] 강화도 오마이스쿨 개교 (2007. 11. 24)

폐교가 된 강화도의 신성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시민교육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이 '강화도 오마이스쿨'이다. 매년 시민기자 학교, 어린이·청소년 기자학교 등 저널리즘 교육이 이곳에서 열린다.

[72] 광화문에서 상암동으로 이사 (2007. 12. 25)

오마이뉴스는 8년 만에 '광화문 시대'를 접었다(http://omn.kr/bl0g).

상당수 직원들이 기존 사무실보다 1.6 배 넓은 공간, 휴일 등에도 냉난방 가능, 옥상정원 등의 조건들에 매료돼 이사에 찬성했다. 2008년 1월 11일에는 뉴스게릴라 시상식을 겸해 조촐한 오픈하우스 행사도 했다.

그러나 경기도 분당·용인 등 거주 직원들은 "출퇴근 거리가 너무 멀어진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특히 기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사회에서 취재의 중심지는 여전히 서울 광화문"이라며 신중론도 강했다.

그런 우려는 이듬해 4월 광우병 촛불시위로 현실화됐다. 편집국에서는 "광화문에 회사가 있었다면 문만 나서도 거리의 열기를 느낄 대형 사건이 터졌는데, 취재 현장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는 탄식이 나왔다.

[73] 특별기획: 미국 쇠고기와 광우병 논란 (2008. 4. 21)

지난 2008년 6월 1일 새벽 서울 경복궁역 부근에서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짠 채 경찰 살수차(물대포)를 맞으며 버티고 있다.
 지난 2008년 6월 1일 새벽 서울 경복궁역 부근에서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짠 채 경찰 살수차(물대포)를 맞으며 버티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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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 후 국민건강권을 고려하지 않은 졸속 협상을 질타하는 여론은 서울 광화문의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다(http://omn.kr/bipr). 비판 여론에 놀란 정부가 서둘러 미국과의 추가협상에 나설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오마이뉴스는 '72시간 연속 동영상 생중계' 등으로 집중보도했고, 약 4만 명이 오마이TV의 '자발적 시청료 주기'에 참여했다. 6월 29일 새벽까지 이어진 촛불집회에서는 오마이TV 김호중 기자가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 등 온 몸을 가격 당해 병원에 응급후송됐고, 안홍기 기자(경찰 쪽에서 날아온 보도블럭에 맞음)와 권우성 사진팀장(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수차례 가격)이 부상을 당했다.

[74] 제1회 '나홀로 입학생에게 친구를' 개최 (2008. 7. 21)

2008년 짝궁 없이 홀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들의 수가 130명을 넘었고, 이들 대부분은 농어촌 지역 분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아름다운 재단'과 함께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동기생을 찾아주는 행사를 열었다(http://omn.kr/bjmz). 38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행사에는 배우 한혜진씨가 일일교사로 참여해 자신의 어린시절과 라오스 봉사 경험 등을 나눴다. '나홀로 입학생'은 8회(2014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75] 청와대 인터넷기자들 들고 일어나다 (2008. 12. 29)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을 설명하는 언론사 초청 대통령 간담회에 인터넷 매체들의 참여를 매번 배제했다. 정부 출범 직후부터 인터넷매체 기자들의 자리를 일방적으로 철거했다. "곧 시정하겠다", "추후 조치를 취하겠다"는 식의 의례적인 답변에 1년 가까이 상황을 지켜보던 인터넷 기자들의 불만이 폭발했다(http://omn.kr/78xt).

청와대를 출입하는 7개 인터넷매체 기자들은 "청와대 대변인실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출입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사에 대해 '공식적이고도 명백한 차별'을 가하고 있다"며 일련의 조치를 '인터넷 언론 대못질'로 규정했다. 이 공동성명에는 평소 이명박 정부를 우호적으로 보도한 보수 성향 매체(<데일리안>과 <뉴데일리>)들도 동참했다.

이 수석이 이끄는 청와대 홍보라인은 오마이뉴스가 이 수석과 두 대변인의 내부암투를 보도(2010.7.06)한 지 7일 만에 전원 경질됐다.

 '2008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시상식'에서 '2008 특별상'을 받은 윤근혁 기자(왼쪽)가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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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오마이뉴스 최다 특종 시민기자 윤근혁 (2009. 2. 6)

초등학교 교사이면서 교육 전문지 <교육희망> 기자인 윤근혁씨는 2000년 4월 30일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는 촌지'라는 사는 이야기 기사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데뷔했다.

이후 꾸준히 기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가장 많은 특종을 터트렸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2002, 2004, 2011, 2013년 4차례 선정됐고, 2008년에는 특별상을 받았다. 서울교총의 '이회창 지지' 공문(2002.11.28)과 2008년 촛불집회를 용공으로 모는 경찰의 안보동영상(2011.11.04), 공정택 전 서울교육감의 비리 의혹에 대한 연속보도 등이 주목 받았다.

[77] 임금 삭감의 한파 (2009. 4. 7)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광고탄압'의 여파는 오마이뉴스에도 밀어닥쳤다. 여타 진보매체들도 비슷했다.

2009년 3월23~25일 노사 협상에서 직원 20%, 팀장급 30%, 대표 포함 경영진 40%의 임금삭감안이 마련됐다. 임금삭감과 함께 전 직원들은 '1개월 휴직'을 했고, 직원 10여 명이 1년 동안 퇴사하는 등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했다.

[78]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2009. 5. 23)

지난 2009년 6월 8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앞에 오마이뉴스 이종필 시민기자의 기사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가 현수막으로 제작되어 내걸렸다.
 지난 2009년 6월 8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앞에 오마이뉴스 이종필 시민기자의 기사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가 현수막으로 제작되어 내걸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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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정국은 요동쳤다.

이틀 뒤 오연호 대표는 '이명박의 정치보복이 노무현을 죽였다(http://omn.kr/bkp7)' 제목의 기사를, 시민기자 이종필은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http://omn.kr/bmpp)'는 기사를 각각 썼다. 721만 7000원의 좋은 기사 원고료가 붙은 이종필 시민기자의 기사는 익명의 시민에 의해 광화문 대한문 분향소 근처에 현수막으로 내걸리기도 했다.

오 대표의 글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댓글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보수 성향 시민단체 바른민주개혁시민회의 의장이던 윤희구씨는 2011년 4월 11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실 행정관의 부탁으로 지인들과 함께 해당 기사에 노 전 대통령과 오 대표를 비방하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고 폭로했다.

[79] '10만인클럽' 회원 모집 시작 (2009. 7. 8)

월 1만 원을 내는 자발적 유료독자 10만 명을 모은다는 목표로 '10만인 클럽'을 시작했다(http://omn.kr/bkiu). 독자와 콘텐츠에 기반한 수익 구조를 만드는 또 다른 실험이었다.

[80] 오마이뉴스 공식 트위터 운영 시작 (2009. 7. 16)

2009년부터 뉴스의 새로운 유통채널로 SNS 서비스들이 각광받았다. 특히 140자의 짧은 단문으로 이용자간 의견을 주고받는 트위터는 단축 URL 서비스와 연동되며 큰 인기를 모았다.

오마이뉴스는 이러한 흐름에 신속히 대응해 7월 15일 트위터(@Ohmynews_Korea)를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트위터는 국내 언론사 중 <시사인>과 <경향신문>에 이어 3번째로 많은 24만 명에 가까운 팔로어를 두고 있다. 이듬해 10월 13일에는 공식 페이스북 운영도 시작했다.


태그:#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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