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마냥 웃으면서 볼 수만은 없었다. 감독은 아이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그려내고 있지만 오히려 이를 무기로 어른들을 향해 강한 일침을 놓는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왠지 모르게 나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비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시대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우리는 때로 나를 잃은 채 살아간다. 나를 위해 밥벌이를 해야 하는데, 밥벌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게 되니 비상식적인 일을 저지르게 되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더 끔찍한 건 이러한 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점점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어느새 정의 같은 건 고리타분한 논쟁이 되어버렸다.

'집'과 '개'의 상징성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포스터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포스터 ⓒ 삼거리픽쳐스


<개를 훔치는 방법>(이하 <개훔방>)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집'과 '개'를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집'은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 돈을 불리는 투기의 대상이다. 이는 곧 돈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꼴이 된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돈이 된다. 따라서 '집'은 기득권의 안전망, 즉 돈이다. 개를 훔쳐 돈을 받아내 집을 사려고 하는 지소(이레 분)의 모습은 결국 기득권의 안전망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개'는 무엇인가. 개는 본래 인간을 위험(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동물이다. 정의를 상징한다. 정의란 '나'를 지키는 일이다. 이는 곧 내가 내 삶의 오롯한 주인이 되는 것과 같다. 결국, 개를 훔쳐 받은 돈을 가지고 집을 산다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이 된다.

"집주인이 되면 개가 싫어지는 거냐, 개가 싫어지면 집주인이 되는 거냐" 대포(최민수 분)가 지소에게 건넨 말에서 그 의미는 명확히 드러난다. 돈을 많이 벌면 정의를 지키지 않게 되는 걸까, 정의를 지키지 않으면 돈의 주인이 되는 걸까?

이러한 상징성은 <플란다스의 개>(봉준호 감독, 2000)의 그것과 상당한 유사점을 가진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떡값 1500만 원을 찔러주며 교수가 되려는 윤주(이성재 분)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평범한 중산층이다. 개 짖는 소리가 불편했던 그는 그는 개를 아파트 지하에서 죽이기로 결심하는데, 정작 이때 그가 죽이려고 하는 개는 성대수술로 짖지 못하는 개다. 이는 지식인이면서도 정의를 부르짖지 못하는 윤주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것이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후, 개를 죽이지 못하고 옷장에 가두는 이유다. 하지만 얼마 후 윤주는 다른 개를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뜨려 진짜 죽인다. 그런 윤주에게 일침을 가하는 동시에 훗날 조력자가 되는 사람이 현남(배두나 분)이다. 그녀는 훗날 노숙자(김뢰하 분)에게 잡아먹힐 뻔한 윤주네 개를 찾아준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장면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장면들. ⓒ 리틀빅픽쳐스


<개훔방>에서 현남의 역할을 하는 이가 대포다. 그는 지소에게 처음에는 위협적인 존재로 다가오지만, 결국엔 지소의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준다. 대포는 현남과 마찬가지로 자본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더 나아가 자본의 논리에서 철저하게 해탈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집이 필요 없다. 그런 장치가 필요 없을 만큼 자신의 삶에 오롯한 주인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 층이라 불리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노숙자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철저히 주류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기에 그 누구보다 먹고 사는 문제(돈)에 대해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노숙자를 자본주의의 하수로 표현했다. 그러나 대포는 다르다. 노숙자인 그의 삶은 비정상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감독은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희망을 말한다

모두 저마다의 개가 가출했지만, 그럼에도 <개훔방>은 희망을 말한다. 지소에게 노부인(김혜자 분)은 "모두들 때가 되면 다 떠나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살다보면 다 그렇게 되는 거야"라고 들린다. 살다보면 정의 같은 건 차치하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영화는 그것을 수긍하지 않는다. 지소는 노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월리는 집을 나간 게 아니라 길을 잃은 거에요."

우리는 잠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헤매고 있는 우리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길을 찾아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영화는 정현(강혜정 분)을 통해 그것을 보여준다. 정현은 철없는 엄마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기준에서 그러하다. 그녀에게 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완전한 가족의 사랑이다. 정현은 언젠가 돌아올 남편을 기다린다. 이 모습 또한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영화에서 지소와 정현의 갈등은 계속되는데, 이는 돈이 나를 지키는 삶과 내가 나를 지키는 삶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지소와 정현은 화해를 하고 이로 인해 지소는 자신을 성찰한다.

"하지만 인생은 목표를 이룬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전세 500짜리 집에 사는 것을 목표로, 혹은 그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걸 목표로 하며 산다는 게 어쩌면 끔찍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한 장면.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한 장면. ⓒ 리틀빅픽쳐스


지소는 집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했는데, 이는 '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소는 엄마와 눈물의 화해를 한 후 개를 돌려주기로 결심한다. 이로써 그녀는 집을 돈이 아닌 '우리 가족이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런 집 안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를 고민하다보니,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를 잊었다. 지소의 말처럼, 노부인의 말처럼, 살면서 나쁜 짓을 전혀 안하고는 살 수 없다. 힘든 시간들을 겪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도 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짓이 착한 짓으로 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지소처럼 자신을 성찰하자는 것에서 그 해결점을 찾는다. 나아가 영화는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뒷받침되어야 하는 국가의 모습을 노부인을 통해 제시한다. 그녀는 집도 있고, 개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마르셀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마르셀을 운영한다. 이는 곧 참된 국가의 모습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선물해야 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그 안전망이 있어야 우리는 지소처럼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또 개를 즐겁게 산책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성호 감독은 메이저 투자 배급사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에도 "개를 돌려주는 결말"을 고수했다. 그가 왜 그렇게 개를 돌려주는 결말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다. 지소는 자기 자신을 지킴으로써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다시 개를 돌려주는 것에 있다.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다시 되찾는 것, 그것이 어쩌면 진짜 완벽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지석(홍은택 분)은 지소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분명히 월리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우리처럼. 월리가 너무 불쌍해. 결국 우리 때문에 월리가 불쌍해진 거잖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걸. 내가 중심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는 어쩌면 세상에 대해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판타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Whatever', 초등학생은 따지지도 못하나요? 이름에 돌 '석'(石)자가 들어가서 바보일 줄 알았던 지석이는 우리가 생각지 못한 뼈있는 질문을 던졌다. 더 이상 내가 불쌍해지지 않게 나를 지키자.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기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해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lhi100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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