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이나 우리를 기다리게 했던 아시안컵은 이번에도 끝내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지난달 31일 호주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호주와의 2014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결승전서 연장접전 끝에 1-2로 분패했다. 27년만에 결승에 진출했던 한국은 우승의 문턱에서 아쉽게 고배를 마시며 또다시 4년 뒤를 기약하게 됐다.

하지만 우승을 제외하고 슈틸리케호의 여정은 완벽했다. 이는 결과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번 아시안컵을 치르면서 대표팀이 보여준 땀과 눈물의 모든 과정에 바치는 헌사다.

대회 개막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조차 한국의 우승 가능성에 회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외신에서도 일본, 이란, 호주 등과 비교하며 한국의 우승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 누군가는 골잡이가 없다고 걱정했고, 누군가는 신임감독 취임 후 3개월만에 열리는 메이저대회의 짧은 준비기간을 우려했다. 대회 개막 이후에도 주축 선수들의 줄부상과 감기 대란, 기복심한 경기력 등이 도마에 오르며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반년전 월드컵 참패의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가운데,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까지 나왔던 대표팀이었다.

슈틸리케호는 위기를 기회로 멋지게 바꿔냈다. 베테랑과 젊은 피, 주전과 비주전, 플랜 A와 B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대표팀은 끊임없이 외부의 선입견과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전체가 그라운드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마지막까지 승리를 갈망하는 투혼은, 한동안 대표팀에 실망하고 등을 돌렸던 이들마저도 다시 돌려세울만큼 깊은 감동을 안겼다.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아쉬운 패배도 대표팀이 지난 한 달간 보여준 뜨거운 투혼의 가치를 결코 훼손할 수 없었다. 져도 부끄럽지 않은 패배, 완벽하지 않아도 기꺼이 자랑스러워할수있는 우리 국민의 팀, 지난해 월드컵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했지만 끝내 볼수 없었던 '진짜 대표팀'의 모습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절반의 성공과 실패로 끝난 호주전 승부수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다시 한 번 변칙적인 전술을 가동했다. 이번 대회에서 상대팀에 따라 다양한 라인업과 맞춤형 전술로 재미를 본 슈틸리케 감독의 승부수. 베스트11이 예상대로 정상출전한 호주와 달리, 한국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박주호를 왼쪽 측면으로 돌리고 센터백 장현수를 기성용의 중원 파트너로 기용한 것은 다분히 호주의 공격력을 의식한 전술이었다.

좌우 풀백의 공격력이 좋은 호주의 측면 공략을 의식하여 원래 풀백 출신인 박주호를 수비형 윙어로 기용하며 전방에서부터 압박을 가하고 중원에서는 체격조건이 좋은 기성용-장현수를 세워서 힘좋은 호주 미드필더들과 몸싸움에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슈틸리케 감독이 처음부터 한골차 승부를 염두에 두고 수비적인 경기운영을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승부수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조심스럽게 경기를 풀어가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그만큼 공격전개에 있어서는 답답함이 커졌다. 지난 조별리그에 이어 한국은 호주와의 점유율 싸움에서 크게 밀렸다. 당시에는 그래도 위험지역에서의 결정적인 실수는 적었지만 이날은 중원과 수비라인에서 잦은 패스실수로 호주에 역습 찬스를 내주며 어려운 경기를 펼쳐야했다.

이번 대회 처음으로 윙에 기용된 박주호는 수비적인 면에서는 나름 제몫을 했지만 공격 전개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장현수 역시 패스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여 실수를 남발했다. 조별리그에서 센터백으로 활약했던 장현수는 활동량이 많은 미드필드에서 선발로 뛰어나디며 후반 중반 이후 체력이 고갈됐고, 교체카드를 모두 소진한 연장전에서는 다리에 지가 나서 한국으로서는 수적열세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번 대회내내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던 한국은 결승전에서만 호주에 2골을 허용했다. 실점과정도 과정이지만 타이밍이 매우 나빴다. 경기가 마무리되어가던 전반 45분(루옹고)과 연장 전반 15분에 수비집중력이 흐트러지며 실점을 내줬다. 의도치 않게 끌려가는 상황이 된 한국은 후반들어 점수를 만회하기 위하여 라인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초반의 수비적인 선수기용은 후반 공격전개에서 변화를 주는데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다.

후반 선수교체로 인한 변화도 원활하지 못했다. 끌려가는 상황에서 세 장의 교체카드 중 공격수는 이근호(남태희)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수비형 미드필더 한국영(박주호)과 센터백 김주영(이정협)이었다. 투입할 수 있는 공격수 자원이 부족하여 수비수들을 기용하고 기성용과 곽태휘를 최전방으로 끌어올려야 했던 것은 대표팀의 고질적인 약점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낸 대목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승부수가 천금같은 동점골로 이어졌다. 유일한 스트라이커 자원인 이정협의 후반 체력이 떨어지자 경기 종반 후반 41분 수비수 곽태휘를 타깃맨으로 최전방으로 올리며 롱볼에 의한 공중전을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이 먹혀들어가면서 호주 수비에 균열이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후반 45분 기성용의 2대 1 패스에 이어 손흥민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다. 한국의 역대 아시안컵 통산 100호골이기도 했다.

양 팀 모두 교체카드를 소진한 상황에서 맞이한 연장전은 체력싸움에서 승부가 갈렸다. 장현수가 사실상 제대로 뛰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어쩔수없이 곽태휘를 다시 아래로 내리고 장현수를 최전방으로 올렸다. 체력적 부담에 수적열세까지 안게된 한국의 공수밸런스는 눈에 띄게 무너져있었다.

이날의 가장 아쉬운 장면이 연장 전반 종료 직전 나왔다. 호주 트로이시의 결승골 당시 한국은 수비진영에서 무려 네 번이나 잇단 실책을 저질렀다. 위험지역에서 김영권의 부주의한 패스가 호주에 차단당하며 역습의 빌미를 제공했다. 다시 두 번째로 공을 걷어낼수 있던 상황에서 김진수가 안이하게 뒷발로 처리하려다가 문전 왼쪽에서 호주 주리치에게 빼앗겼다.

김진수가 체격조건이 월등한 주리치를 몸으로 막아서며 끝까지 공을 걷어내려고 했지만, 다른 선수들이 빠르게 도와주지못하고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돌파를 허용한게 세 번째 실수였다. 김진현이 펀칭으로 막았지만 앞으로 흐른 공이 트로이시에게 갔고, 이미 많은 선수드링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에도 호주의 2선 쇄도를 막지못한게 뼈아픈 마지막 실책이었다.

한국은 연장 후반 만회골을 넣기 위하여 애썼지만 더 이상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호주의 거친 수비와 상대적으로 한국에 인색했던 심판의 휘슬도 공격 흐름이 자주 끊긴 원인이었다. 결국 종료 휘슬이 울리면서 경기는 그대로 호주의 우승으로 끝났다.

아쉽지만 박수받기에 충분하다.

사실 결승전만 놓고보면 이전의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에 크게 못 미쳤다. 선수들이 지나치게 우승의 부담에 짓눌리다보니 평소와 다른 잔실수가 너무 많았고, 결국 유리하던 흐름을 단숨에 뒤바뀌는 두 번의 치명적인 실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반 40분 이후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투혼과 포기하지 않는 근성만큼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곽태휘의 공격수 기용과, 기성용의 예리한 침투패스, 손흥민의 극적인 동점골 등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우리 선수들의 신속한 대처능력과 유연한 전술변화는 비록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날 경기를 역대 최고의 아시안컵 결승전으로 만들어냈다.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유난히 이번 결승전이 아쉬움으로 남았을 두 선수가 있다. 바로 이번 대회 내내 한국의 좌우측면을 책임진 두 풀백, 김진수와 차두리다.

김진수는 공수를 넘나드는 폭발적인 활동량을 앞세워 왼쪽 측면을 지배하며 '이영표의 후계자'로 입지를 굳혔다. 만일 김진수가 없었다면 한국은 절대 결승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뼈아픈 실수로 마지막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상처도 받았다. 그것은 단지 김진수의 실수만은 아니었다. 향후 한국축구의 10년 미래를 책임질 왼쪽 풀백이기에 이 아픔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성장해야만 한다.

차두리에게는 이번 호주전이 자신의 국가대표 A매치 마지막 경기였다. 우승 헹가래와 함께 선수생활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었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차두리는 이미 이번 대표팀을 통하여 누구도 잊지못할 최고의 은퇴무대를 가졌다. 우즈벡과의 8강전에서 보여준 그림같은 드리블 돌파는 이번 아시안컵 한국대표팀 최고의 하이라이트 필름이기도 했다. 또한 차두리가 걸어온 A매치 74경기에는 한일월드컵 4강, 남아공 원정16강 등 한국축구의 빛나는 역사가 모두 오롯이 묻어있다. 우승을 떠나 차두리는 이미 한국축구의 전설이다.

짧은 시간에 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조련한 슈틸리케 감독 역시 박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아시안컵을 통하여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지도력이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슈틸리케 감독이 보여준 합리적이고 유연한 리더십, 선수들을 아우르는 포용력은, 한국축구가 지난 아픔을 딛고 다시 내일을 위하여 전진할수 있다는 값진 희망을 안겨줬다. 우승은 놓쳤지만, 그 우승컵이 아깝지않을 정도로 풍성한 수확과 많은 이야깃거리를 발굴해낸 아시안컵이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