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롤러코스터>의 한 장면.

영화 <롤러코스터>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한국으로 향하는 '바비항공' 여객기 비즈니스 클래스. 타 항공사 허승복 회장의 비서는 서비스가 불만이라며 사무장의 뺨을 때리고, 무릎을 꿇린다. 다른 좌석의 한 기자는 땅콩을 달라며 끊임없이 징징댄다. 그야말로 '갑질'의 항연으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허삼관>을 연출한 하정우의 데뷔작 <롤러코스터>의 주요 사건 중 하나다. 만약,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이 영화를 봤다면, '땅콩 회항'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태로 인해 하정우는 일약 '예언자'에 등극했다. 이를 두고 한 블로거는 "천재 감독 하정우씨는 훗날 이런 비슷한 사건이 벌어질 걸 예견했었던 걸까요?"라고 적었다.

최근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던 하정우. 그는 <롤러코스터>의 '갑질' 장면을 염두에 둔 김제동의 질문에 "(영화 속에선) 비행기가 이미 써서 돌리지 못 했다"란 재치 있는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국드라마에서 이 장면을 연출됐다면 과연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을까.

<꽃보다 남자> 이후 <상속자들> 같은 궁극의 '재벌가' 드라마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방송가에서 말이다. '땅콩 회항' 사건의 여파에도 한국의 시청자들은 재벌2, 3세들이 꽃미남 '남주'로 매력을 어필하는 '한드'를 계속 봐야만 하는 걸까. 심지어 이제는 그들의 '멘탈'까지 걱정해 주면서까지.   

'월화수목금토일'을 점령한 재벌가 사람들, 해도 해도 너무한다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와 <킬미, 힐미> 포스터.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와 <킬미, 힐미> 포스터. ⓒ SBS,MBC


"원더랜드 태어날때부터 그쪽 꺼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근데 원더랜드, 좋아는 해? 한 번도 내꺼였던 적 없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지만 난 좋아하거든."

22일 방영된 SBS <하이드 지킬, 나>(아래 <하이드>에서 한지민의 대사다. 원더그룹의 계승자에게 놀이공원에 계약된 일개 서커스 단장이 하는 말 치고는 과한 것 같지만, 일단 이런 대사는 나온다. 

심지어 작가도, 드라마 속 주인공도 알고 있는 사실. 그들이 전문경영인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도 아니면 그럴 인성을 갖추지 못(안)했거나. 선입견이나 편견이라고 하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부류를 너무나 많이 봐 왔다. 마찬가지로, 조현아 전 부사장의 행동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래서일까. <하이드>와 MBC <킬미, 힐미>는 경쟁적으로 이 재벌가 남자들의 '멘탈'을 염려해 주기 시작했다. 각자의 이유로 이들은 다중인격과 해리성 인격 장애를 겪는 재벌2,3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현빈과 지성이 주인공을 맡고, 한지민과 황정음이 이들을 치유하는 여주인공을 연기한다.

'신데렐라' 드라마들은 그렇게 재벌남들의 정신 건강까지 치유해 주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조인성이 셀러브리티를 연기했던 <괜찮아 사랑이야>는 그나마 양반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킬미, 힐미> 전작인 <미스터백>은 한 술 더 떠 (판타지 설정에 힘입어 회춘한)70대 재벌회장과 20대 여성의 로맨스를 기어이 해피엔딩으로 성사시켜줬다.

아무리 운석이 등장하고 천상의 악마들이 드러나는 판타지 드라마여도 마찬가지다. 안하무인이고 제멋대로인 재벌남의 성격을 변화시켜 나가는 '재벌 로맨스'의 공식은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완성도로 충만하고 개성이 넘친다면 무엇이 문제겠느냐만, 다수의 드라마들이 함량미달이고 숫자가 많아도 (여전히) 너무 많아서 문제인 것이다.   

지상파 드라마, <미생>의 교훈을 곱씹어라

 드라마 <미생>의 포스터.

드라마 <미생>의 포스터. ⓒ tvN


어렵지 않다. 재벌남들이 연애도 하고, 귀신도 만나고(<주군의 태양>), 바람도 피는(각종 일일드라마들) 드라마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 말이다. 일단 PPL을 유치해 제작비 확보가 용이하다는 것이 현실적인 요인이자 당면한 과제일 터. 재벌가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줄수록 드라마 엔딩에 수록되는 협찬사들의 리스트가 늘어나지 않겠는가(이 PPL을 위해 완성도에 흠집을 낸 드라마도 한 두 건이 아니었다).

사실 그에 앞서, 드라마가 (여성) 시청자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깨지지 않는 '신화'가 너무나 견고하다는 것이 문제다. 트렌디한 드라마의 주시청층이 여성 20~30대라는 분석은 진리가 됐고, 40대 이상 주부들의 삶의 낙인 일일 및 주말드라마들은 '막장'으로 점철된지 오래다. 그 안에서 재벌가의 남자들이 벌이는 각종 로맨스가 살아 숨쉬는 중이다. 욕망과 판타지의 대리 충족에 유효기간이 없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게으른 지상파가 시청자들을 길들여 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판타지의 견고한 성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응답' 시리즈의 성공과 신드롬에 가까운 <미생>의 인기가 그 신호탄이었다. 여전히 전통적인 시청률에 매달리고 있는 지상파와 달리 케이블과 일부 종편드라마들은 스릴러와 같은 색다른 장르를 도입하고, 그나마 다채로운 직업군을 등장시키거나 특화된 소재를 가져오는 드라마로 지상파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상파 드라마는 일주일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벌가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들어야지 직성이 풀리는 듯 싶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영되는 일일드라마가 그러하고, 주말드라마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 미니시리즈야말로 사극의 왕가와 다를 바 없는 재벌가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튼다. 이제는 그만 적당히 할 때도 됐다. '미드'에 '일드'에 눈이 높아져 가는 젊은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현실로 빠져나와 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대한항공의 박창진 사무장은 "제2, 제3의 박창진 사건을 막기 위해 2월 1일부터 꼭 출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과연 박 사무장이 재벌 2, 3세들의 정신 건강을 챙기고, 그들을 위로하며 응원하는 TV 드라마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지상파였다면 장그래와 안영이가 연애를 했을 것"이라던 <미생> 제작진의 토로를 되새길 때다. 현재 시청률을 위해서도, 미래의 시청층을 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재벌가 드라마의 만연을 재고할 때 아닐까. 

하이드지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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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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