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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시골에서 만난 인도 아이의 해맑은 웃음
 바라나시 시골에서 만난 인도 아이의 해맑은 웃음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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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려라 하니'와 이 선생과 셋이서 산티드라씨네 집에 가기로 했다. 20대 후반의 산티드라씨는 이 선생이 메인 가트에서 사귀었다는 인도 현지인이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선재'. 그는 바라나시 메인 가트 주변에서 힌두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의 머리를 깍아 주는 거리의 이발사이며 순례객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마사지를 해주는 안마사이기도 하다.

바라나시 메인 가트 주변을 걷다 보면 친근하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악수를 하자는 줄 알고 반갑게 손을 맞잡으면 손을 꼭 움켜쥐고 마사지를 시작한다. 그리고 묻는다.

"마사지 받아 볼래요?"

그들이 바로 안마사들이다. 멋모르고 온몸을 맡겼다가는 최소 백 루피 이상을 줘야 한다. 갠지스 강가 가트 주변에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이 내민 손들을 잡는 대신에 '나마스테' 합장으로 공손하게 거절했다. 목욕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나 같은 인간에게 마사지는 가당찮은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내게 손을 내밀던 사람 중 하나가 산티드라씨 였다. 그는 전신 마사지를 해주면 보통 백 루피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늘 웃는 얼굴의 그는 그렇다고 마사지 비용이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300루피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이 목적이 아닙니다. 마사지 받는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 메인가트에서 마사지 일을 하고 있는 산티드라, 선재씨 부자. 선재씨가 시골 마을로 우리 일행을 초대했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 메인가트에서 마사지 일을 하고 있는 산티드라, 선재씨 부자. 선재씨가 시골 마을로 우리 일행을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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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버지와 함께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그가 손님을 데리고 오면 주로 그의 아버지가 마사지를 해준다. 그의 아버지는 이곳 메인 가트에서 '안마 마스터'로 불리운다. 한번 받아보라는 이 선생의 강압적인 권유로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간단한 안마를 받아 보았다. 팔과 목 등이 시원해진 안마를 받고 나서 그에게 백 루피 돈을 건네주려 하자 한사코 거부한다. 자신들의 집에 가는 손님에게 어떻게 돈을 받겠냐는 것이었다. 돈을 들고 있는 내 손이 부끄러웠다.

바라나시 근처의 움막촌... 카메라를 들이대다

그의 집은 바라나시 가트를 중심으로 갠지스 강 건너 농촌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그의 가족들을 위해 숙소 주변에서 인도의 전통 과자를 샀다. 우리나라의 한과와 비교할 수 있는 인도의 전통 과자는 보통 '사모사'나 '스위트'라 불리운다. 하지만 그 맛은 한과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너무 달다. 입 안이 얼얼할 정도다.

산티드라씨와 함께 오토릭샤를 타고 시골 마을로 가는 도중에 수박도 한 통 샀다. 그의 집으로 향하는 도로 주변은 난민들의 거주지 같다. 난민들의 '하꼬방'보다도 더 허름하다. 겨우 햇빛과 비만 가린 거적때기로 덮여 있는 움막들이다. 이 움막들이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다. 릭샤를 타고 지나가며 움막집 사진을 찍었다. 그 움막집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가 그 큰 눈으로 오토릭샤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나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바라나시 외곽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의 움막집
 바라나시 외곽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의 움막집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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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왜 찍어대는 거죠?'

가난에 찌들려 꼬질꼬질한 아이가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말에 그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사진조차 찍을 수가 없었다. 그냥 웃어 보이자 사내아이도 빙그레 웃는다. 카메라를 들이댈까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오토릭샤가 바쁘게 출발한다

바라나시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그의 시골 마을 입구에는 소똥들이 널려 있었다. 소똥들을 말리기 위해 아예 탑처럼 쌓아 올렸다. 이 소똥들은 대개 연료로 쓰인다. 시골 마을집들은 도시의 움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나름 규모를 갖추고 있다. 바람에 많이 노출돼 있는 허허벌판의 가옥들이라 그런지 대개 ㅁ자로 된 벽돌집이었다.

그의 집은 부모님 방, 동생 방, 형 가족의 방, 그리고 그의 가족이 쓰고 있는 방, 이렇게 네 개의 방으로 돼 있었다. 외양간 옆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이 공간은 소똥과 황토를 이겨 바른 맨바닥으로 되어 있다. 한낮의 뜨거운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잘 수 있는 피서처라며 그가 우리에게 한번 누워 보라고 권한다. 아이들이 마당 한 옆에서 펌프질을 해가며 물을 뒤집어쓸 정도로 무더운 날씨였는데 이 방에 들어서자 시원한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왔다.

더위에 지쳐 마당에서 목욕하고 있는 선재씨 조카.
 더위에 지쳐 마당에서 목욕하고 있는 선재씨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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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외국인이 왔다고 구경나온 아이들이 선재씨네 집 대문 밖에서 활짝 웃고 있다.
 마을에 외국인이 왔다고 구경나온 아이들이 선재씨네 집 대문 밖에서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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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 옆에는 따로 또 한 채의 집이 있었다. 큰아버지 가족이 살고 있는 큰집이라고 한다. 큰 집 역시 가족 모두가 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한 집 건너 집들이 사촌, 팔촌, 친척들이라고 한다. 예전에 우리 농촌처럼 대가족으로 살고 있는 씨족 마을이었다. 낯선 외국인들이 찾아 왔다는 소문에 몇몇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우리 일행들을 구경했다. 농사일에 관심이 많은 나는 집 주변의 밭을 둘러보았다. 텃밭에는 방울 토마토와 고추가 심어져 있었고 대부분 밭들이 혼작을 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침대가 놓여져 있는 집에서 그의 가족이 차려준 인도 음식을 대접을 받았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힌두신 사진이 모셔져 있는 작은 성전 앞에 이 선생이 500루피를 놓고 왔다. 이들 가족에게는 제법 큰돈이었다.

그리고 이 선생은 매일 식사 때마다 산티드라씨에게 밥을 사주겠노라 한 모양이다. 나는 이 선생에게 그를 도와주려는 의도는 좋은데 자칫 돈에 의지하게 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거 같다고 말해줬다. 산티드라씨는 그날 이후 자신의 일에 몰두하지 않고 이 선생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 잘 쓰는 한국의 사업가 이 선생에게 혹시 어떤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산티드라씨네 집을 나와 바라나시 강가 주변에 있다는 인도 아이들의 방과후 공부방을 찾아갔다. 문방구에서 노트와 연필 등을 사들고 찾아간 공부방은 우연찮게도 내가 묵고 있는 숙소 근처에 있었다.

손주를 안고 있는 동네 할머니
 손주를 안고 있는 동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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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시골 마을 아이들
 인도 시골 마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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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솟아 있는 힌두 사원들, 동물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어지러운 도로, 소똥과 범벅이 되어 있는 미로 속 같은 복잡한 골목길과 갠지스 강가에서 몸을 담그고 기도 드리는 힌두교인들이 떠오르는 바라나시, 거기에 당당하게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하거나 염주 등을 팔고 있는 아이들이 전부처럼 다가오는 이 복잡한 바라나시에서 골목길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가난한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다소 흥분된 상태였다. 갠지스 강가, 힌두교 성지라는 바라나시의 빤한 그림들 속에서 뭔가 새로운 기사거리를 찾아 낸 기분이었다.

빈민촌의 공부방... 그곳에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공부방은 아주 비좁은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 빈집이나 다름없는 컴컴한 공간을 통과해 다시 이층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3시부터 문을 연다는 공부방은 두 칸의 교실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모두 50여 명. 우리가 찾아 갔을 때는 20여 명의 아이들이 비좁은 교실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영어를 배우고 한 옆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공부방은 안마사 산티드라씨의 형, 샤르마가 책임 선생님으로 있었다. 미국과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는 두 외국인의 후원으로(프랜츠 NGO)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샤르마는 동생과 달리 영어가 유창했다. 나는 사진을 찍어가며 그에게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로 온갖 질문을 던졌다. 그의 유창한 영어를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가 아는 한도에서 정리해 보면 이랬다.

바라나시 골목에 자리한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방과후 공부방.
 바라나시 골목에 자리한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집 아이들의 방과후 공부방.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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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을 찾는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나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려운 아이들이다.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10학년까지 있는데 1, 2, 3학년 4, 5, 6학년 7, 8, 9, 10학년 세 그룹으로 나눠서 공부하고 있다. 이곳 선생님들은 모두 5명, 이들은 영어를 비롯해 기타, 그림, 댄스, 컴퓨터 등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 공부방이 문을 열었을 때 갠지스 강가 가트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구걸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날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다음 날 공부방을 다시 찾아가야 했다. 사진기를 들이대기도 전에 아이들의 맑은 눈빛을 보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제는 취재에만 몰두 해 있어 아이들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들의 맑은 눈빛을 보자마자 취재를 한답시고 공책 몇 권 들고 가서 호들갑을 떨었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바라나시 외곽지역의 움박촌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던 아이의 무언의 물음처럼 공부방 아이들의 눈빛이 똑같이 묻고 있는 듯했다.

'사진을 왜 자꾸만 찍어대는 거죠?'

부모에게 사랑조차 제대로 못 받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맑은 눈빛들, 나는 인도 아이들의 그 크나큰 눈을 보고 있으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는 것은 뻔뻔한 작업이다. 사진기를 들이댔다. 아이들이 사진 찍는 나를 쳐다본다. 내가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순수한 눈빛들이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아이들을 기사거리의 대상으로 삼아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내 검은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시꺼먼 마음으로 아이들의 공부를 방해 하고 있는 것 같아 몇 장의 사진을 정신없이 찍어대고 서둘러 공부방을 빠져나왔다.

공부방을 빠져 나오면서 산티드라씨의 형제들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인 '선재'를 떠올렸다. 저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중에 '선재'라는 이름이 또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바라나시에서 머물면서 선재라는 이름을 여기저기서 만났다. 갠지스 강을 유람하는 보트 이름도 '선재 보트'이고, 자신들의 배를 타자며 호객했던 아이 이름이며 그 작은 체구로 노를 저었던 아이 이름도 선재였다.

화엄경의 선재동자의 선재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선재라는 이름과 만나면서 선재동자를 떠올렸다. 그 크고 맑은 눈빛의 인도 아이들을 보면서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떠올렸다.

인도에서 만난 선재... 내 안의 탐욕을 내려놓다

한문으로 선재(善財)의 재를 풀어보면 재물을 뜻한다. 화엄경에 보면 선재동자는 재물이 아주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이름을 선재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도 사람들이 '선재'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마 재물이 많기를 바라는 것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엄경의 선재동자는 재물과 상관없는 깨달음의 길을 걷는 구도자를 상징한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華嚴經)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인데, 그 뜻은 '크고 넓은 부처님의 세계를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하게 만드는 경'으로 풀이된다. 고은 선생의 소설과 장선우 감독의 영화 속 '화엄경'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선재동자는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인물이다.

바라나시에서 만난 아이
 바라나시에서 만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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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안내를 받아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천하를 떠돌아다닌다. 가장 낮은 자세로 떠돌아다니며 53명의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의 도를 구한다. 선재동자를 일깨워 주는 선지식들은 천민이나 왕을 가리지 않는다. 장사꾼 뱃사공, 보살, 비구, 비구니, 선인, 바라문, 동자, 동녀, 왕, 천신에서부터 몸을 파는 창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 모든 사람들이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준 선지식이었으며 친구였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선재동자가 만나는 사람들은 빈부귀천,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스승이었고 부처였던 것이다.

화엄경에서 깨달음의 길을 찾아 떠나는 구도자를 어린 동자로 내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이 바로 부처의 길이기에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 초발심으로 구도자의 길을 가라 이르렀던 것이 아닐까?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하나같이 어린아이처럼 되라 이르렀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어린아이의 티 없이 맑은 눈빛을 보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긴 하지만 잠시나마 내 안의 탐욕을 내려놓게 된다. 탐욕을 내려놓게 하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선재동자나 다름없다. 선하고 악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 가리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만나는 선재동자.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자리, 맑은 눈빛을 가진 세상 아이들은 선재동자다. 거리의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에 대책 없이 카메라를 들이댔던 몰상식한 나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던 움박집 아이는 나를 일깨워 주는 화엄경의 구도자, 선재동자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그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배고픈 아이의 밥그릇을 걷어차면 세상은 배고픔으로 가득할 것이고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내주면 세상은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서 만난 아이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에서 만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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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도 시골마을, #인도 아이의 눈빛, #바라나시 공부방, #화엄경의 선재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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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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