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사진보기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김봉준	관련사진보기

노조 강제 해산 명령서를 받은 청계 노조 간부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상근 간부들은 매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지만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날짜만 지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일부 간부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부터 싸울 힘을 모아 죽더라도 '꽥'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죽어야 했다. 독재 정권의 부당한 탄압에 순순히 당하고 물러선다면 이후 다시 일어설 명분도, 자산도 없게 될 것이었다. 죽더라도 장렬하게 죽어야 한다. 그것이 이후 우리가 다시 일어설 명분이 되고, 되살아날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근 간부 중에서 투쟁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사무장이었다. 그는 지금부터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선 노조 사무실 출입이 봉쇄될 것을 예상하고 노조 사무실이 폐쇄당하기 전에 타자기와 등사기를 빼돌렸다. 

빼돌린 타자기와 등사기를 창신동에 사는 조합원 이수진의 셋방 다락에 숨겨 두었다. 이수진은 재단사로서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노조 활동에 협조적인 사람이었다. 미싱사인 김화선과 결혼한 새신랑으로, 그의 집은 낮에는 내외가 다 출근을 해 아무도 없다. 그 시간을 이용해 유인물을 얼마든지 제작을 할 수 있었다.

사무장은 투쟁 의지 없이 다른 사람 눈치만 보는 간부들과 결론 없는 논의만 하기에는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비상근 간부인 부지부장 신광용을 비롯해 회계 감사 황만호 그리고 이들보다 늦게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김영대 등과 투쟁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방이나 자취하는 동료들의 셋방을 전전하면서 모임을 열고 대책을 고민했다. 가장 큰 고민은 어디서 농성을 하면 오래 버틸 수 있는가와 그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종교 단체조차도 이들과 함께 싸우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투쟁 방법 고심... "외국인과 함께"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외국인 사무실이나 외국인과 함께 농성하는 것이었다. 외국인과 함께 농성하면 진압하는 쪽에서도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함부로 경찰을 투입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들의 투쟁이 외신에 보도도 될 수 있어서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마땅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노조 상근자 회의는 알맹이 없이 걱정만 계속하다 마치기를 거듭 했다. 그러다 1981년 1월 16일 임현재 지부장, 이승철 지도위원, 전태삼 조직부장, 민종덕 사무장, 박원섭 교육선전부장, 박재익 조사통계부장, 신순애 부녀부장이 참석해 해산 명령에 따른 대책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노조 해산 명령에 대해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 행정 소송을 해보자는 의견, 그리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으니 깨지더라도 청계 노조답게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치 의견이 여럿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싸워야 한다는 의견과 아무 대책이 없는 쪽 두 가지였다. 행정 소송을 하자는 의견 역시 실제로 행정 소송을 할 분위기나 의지를 갖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라도 해 보자는 뜻이었다.

"청계 피복 노조가 어떤 노조입니까? 전태일 동지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이 아닙니까. 우리 노조는 민주노조의 상징으로서 권력의 부당한 탄압에 이렇게 뒷걸음질만 치다가 결국 낭떠러지로 떨어져 깨질 순 없습니다. 우리가 힘은 없지만, 있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노조의 자존심이고, 우리가 살 길입니다.

지금 정세에서 우리가 싸운다고 해서 저들이 해산 명령을 철회할 리는 없겠지요. 많은 희생이 따르겠지요.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장렬하게 싸워서 깨지면 이후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지만, 뒷걸음질치다가 깨지면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투쟁을 주장하는 측의 이런 논리에 어느 누가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부장과 지도위원은 투쟁 후 그에 따른 희생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렇다면 조합원들을 동원해서 농성 같은 것을 해야 할 텐데 지금 분위기로 금세 진압이 될 것이다. 그러면 투쟁다운 투쟁도 못해보고 조합원들 희생만 커질 텐데 현실성이 있을까?"

회의 참석자들은 이런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이때 임현재 지부장이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력 행사로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조 사무실보다는 아프리 사무소 같은 외국인 사무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면 좋겠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찬성합니다. 조직력을 동원해 실력으로 대항함으로써 우리 노조의 원상 복귀를 요구합시다. 그 방법으로 우리 청계피복지부 사무실이나 노동 교실 등지에서 시위 농성을 할 경우 10분 내지 20분 이내에 경찰에 진압될 우려가 있으므로 '아시아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 한국사무소' 같은 외국 기관을 점거해 외국인과 함께 농성하면 경찰에서 외국 기관이므로 쉽사리 진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외신에 보도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지부장의 아프리 발언을 받아 투쟁을 주장하는 쪽에서 그에 찬동하는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나 대부분은 찬성도, 그렇다고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 실행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 결과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곧 있는데 취임식 뉴스에 우리의 농성 소식이 묻힐 수 있으므로 취임식 후인 1월 22일에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농성을 위한 유인물 조합원 동원 등의 준비는 사무장과 조직부장 전태삼이 하기로 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있을 확대 간부회의에서 토의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부터 임현재 지부장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도요한 신부를 만나 실력 행사를 하기로 한 사실을 알렸더니 극력 만류 하더라. 지금 우리가 싸우면 최소한 3년은 징역을 살아야 하는데 3년 징역 사는 만큼의 힘으로 조직을 하면 되지 않겠나?" *

이런 의견에 대해 다른 간부들도 전날 투쟁에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반대를 못 했지만, 이제는 지부장의 의견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도 아니어서 회의는 흐지부지 끝났다. 

이와 달리 사무장은 신광용, 황만호, 김영대 등과 계속 투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대상을 더 넓혀 전태삼, 김선주, 서재덕 등과도 개별적으로 접촉했다. 투쟁을 준비하는 핵심들은 실행 이전에 검거되거나 발각될 염려가 있어 아예 집을 나와 싸움을 준비했다.

집행부는 또다시 노조 강제 해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월 18일 오후 5시에 회의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신순애 부지부장 집에서다. 이날 참석자는 임현재 지부장, 이승철 지도위원, 민종덕 사무장,  박원섭 교선부장,  박재익 조사통계부장 그리고 경리직원 나성자였다. 이 자리에는 이소선도 참석했다.

이날 회의는 노동조합의 강제 해산이라는 절체절명의 대책 회의임에도 회의 초반부터 비장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책은 고사하고 임현재 지부장과 이승철 지도위원이 이소선한테 그동안 섭섭했던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놓는 것으로 회의를 망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다툼이 벌어졌다. 이에 이소선은 "너희는 단결력도 없고 결단력도 없다. 내가 형무소 갔을 때 누구 하나 돌봐준 사람 있느냐" ** 면서 언성이 높아졌다.

다른 참석자들은 황당한 분위기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날 회의는 대책이고 뭐고 노조 강제 해산에 대해서는 아무 논의도 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이소선은 이날 회의가 이렇게 파탄 난 것은 어쩌면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강력하게 싸우자고 주장하고 나서면 명분상 반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서 회의 자체를 엎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결국 노조 사무실 폐쇄... '암담'

상근 간부들은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노조 사무실에 나갔다. 그 날도 강제 해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회의했으나 별다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본조인 연합노조에서 구성하는 청산 위원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결정만 하고 끝났다. 

이틀 뒤인 1월 21일 오전 연합노조 김인근 위원장이 청계노조 지부장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임현재 지부장과 이승철 지도위원이 연합노조로 가는 것을 보고 사무장도 따라 나섰다. 이들이 위원장실에 들어가니 김인근 위원장과 낯선 사람 세 명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이 들어서자 연합노조 위원장이 낯선 사람 세 명을 소개했다.

"이 사람들은 서울시에서 나온 분들입니다.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서 나온 분들이니 얘기를 잘 해 보세요."

서울시 공무원이라는 소리에 열이 받은 청계 노조 간부가 버럭 한마디 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것입니까? 서울시가 무슨 권한으로 노동조합 해산을 명하는 것입니까? 법에 의해서 해산 명령을 내렸다고요? 아무리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라 해도 마지막 할 말은 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노동조합을 해산하면서 아무 이유 없이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해산을 명하는 것이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청계노조 간부들이  이렇게 흥분하며 얘기하자 서울시에서 나온 사람들은 '흥분하지 말라'며 청계노조의 해산에 대해 자신들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어떤 큰 힘의 작용으로 결정된 것이니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라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들이 온 본래 목적을 말했다.

"노조는 이미 해산됐으니 여러분들은 취직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시(市)에서 여러분들을 위해 취직 자리를 알아 봐 줄 테니 잘 생각해보세요."

서울시에서 청계 노조 간부들을 회유하려고 했다. 이에 심한 모욕감을 느낀 간부가 말했다.

"이것 보시오. 우리들은 그런 것 필요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그리고 이들 일행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나오면서 연합노조 위원장한테 거듭 배신감을 느껴 한마디 더 했다.

"위원장님, 전국연합노조 위원장으로서 상급조직의 위원장으로서 기껏 하시는 일이 이런 공무원들 심부름이나 하는 겁니까?"

그때 이들 일행이 만난 사람들은 서울시 공무원으로 소개를 받았지만 사실은 정보부 직원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했다.

연합노조를 다녀온 그날 오후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다시 노조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고압적인 태도로 '청계노조의 해산을 재차 명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노조의 회계 장부와 예금 통장을 빼앗아 갔다.

상근 간부들은 모욕, 협박을 당한 이날 저녁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노조 사무실 문을 잠그고 퇴근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복 차림의 몇몇 그림자가 노조 사무실 주위를 감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들은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태연한 척하면서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상근 간부들은 평상시처럼 정상 출근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부터 수백 명의 기동 경찰들이 평화·동화·통일 상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노조 사무실이 있는 평화시장 옥상 입구에서는 경찰들이 노조 간부들의 출입을 가로막았다.

간밤에 경찰과 서울시가 합동 작전으로 노조 사무실에 침입해서 사무실 집기 등 노조의 모든 재산을 끌어내고 노조사무실 출입문을 대못으로 박아 버린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소선은 참담했다. 바로 어제까지 출·퇴근하던 노조 사무실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이소선과 상근 간부들은 이날 종일 지척에 있는 노조 사무실에 접근도 못하고 근처 다방을 전전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하고 상황을 조합원들한테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