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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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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청계피복노조의 단체협약 갱신체결 투쟁에서 임금 인상과 퇴직금 10인 이상 업체 적용을 쟁취한 것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첫째, 유신독재체제가 무너져 정치적 공간이 넓어진 상황에 선도적인 투쟁을 했으며, 둘째, 퇴직금의 경우 근로기준법의 16인 이상을 뛰어넘는 10인 이상 업체 적용을 쟁취함으로써 제도개선 투쟁의 의미가 있었다.   

4월 투쟁을 끝낸 청계노조 간부들은 매우 분주했다. 전국 각지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현장에서 지원, 연대를 요청하는 것에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청계 간부들은 투쟁사업장에 달려가서 자신들의 투쟁 사례를 발표하고 연대를 표시했다.

이소선은 투쟁사업장 방문에 누구보다도 바빴다. 특히 청계노조 임금인상 투쟁 직후 벌어진 사북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격려하기 위해 청계 조합원들을 이끌고 사북으로 향했다.

사북사태는 동원탄좌(주)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노동조합의 어용성에 맞서 투쟁한 사건이다. 직접적인 발단은 당시의 노조위원장이었던 이재기가 광산노동조합연맹 전국지부장회의에서 결정된 42.7%의 임금인상안을 무시하고, 4월 15일 회사 측과 비밀리에 20% 인상에 합의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에 노동자들은 즉시 '위원장 사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광산노동자 5명이 경찰차에 치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흥분한 광산 노동자들은 사북읍으로 가두 진출했다. 노동자들은 경찰과 무력충돌하면서 4월 22일 오후 2시께 사북읍을 완전히 장악했다. 4월 24일 대책위원회와의 2차 협상에서 11개 항에 합의함으로써 파업이 종결된 사건이다.

이소선은 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뚫고 노동자들을 향해 달려가 사북탄광 노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박정희 죽은 뒤 '더 지독한 놈' 나타났다"

1980년 봄에는 노동자들의 투쟁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각 대학교에서는 학내 '민주화' 투쟁 집회가 열렸다. 이 학생들의 집회에도 이소선과 청계노동자들의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이소선과 청계노조 간부들은 여건이 되는대로 각 대학교 집회에 가서 노동문제를 부각하기 위한 연설을 했다.

특히 이소선의 고려대 연설은 대단히 선동적이어서 수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투쟁에 불을 댕겼다.

"박정희 독재가 죽어서 민주주의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지독한 놈이 나타나서 지금 민주주의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학생, 노동자 똘똘 뭉쳐서 전두환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군복 입은 놈들에게 민주주의 빼앗겨 독재의 암흑 속에서 두들겨 맞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소선의 연설에 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우리가 싸우지 않고는 절대로 민주주의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여러분!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자 서민의 생존을 위해 나서서 싸웁시다!"

이소선의 선동에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함성을 지르며 교문으로 밖으로 향한다.

학원의 민주화 집회와 투쟁 양상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5월 13일을 기점으로 '계엄철폐' '유신잔당퇴진' '전두환 일당 퇴진' 등을 외치며 가두로 진출했다.

이소선과 청계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시위대열에 합류해 투쟁하느라 바빴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 앞 광장에 10만 명이 넘는 학생·시민이 모여 데모를 했다. 이날도 청계노조 조합원들이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 그렇지만 노동자 대오를 지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날의 투쟁은 지도부인 학생운동세력이 그날의 집결인파만으로도 당국에 의사 전달은 충분히 됐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탄압이 시작됐다

서울에서는 15일 시위를 끝내고 이후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는 사이에 전남 광주에서는 계속해서 시위가 진행됐다. 마침내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시위진압에 군을 투입시켰다. 그럼에도 광주에서는 '계엄 철폐'와 '민주화'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군부는 시위대에 발포를 함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이 촉발됐다.

광주에서 살육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다.

5월 27일, 끝내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빼앗기고 광주민중항쟁은 끝이 났다. 이어 광주민중 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학생 지식인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구속·수배했다. 그리고 곧이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국보위가 설치됐다. 군부는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긴장과 공포속에서 재야 세력,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집중적으로 탄압함과 아울러 노동운동 관련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탄압, 이렇게 이뤄졌다

노동조합 탄압은 몇 단계에 걸쳐서 실시됐다. 첫 번째 조치는 노동운동가에 대한 수사였다. 두 번째 탄압조치는 이른바 노동청 업무검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해 압박을 가했다. 세 번째 조치는 소위 정화조치와 지역지부 폐지 등이었다.

첫 번째 조치로 계엄당국은 이소선을 체포하기 위해 전국에 지명수배를 했다. 계엄 당국이 이소선을 수배한 것은 4월 7일부터 17일까지 임금인상 투쟁에 앞장선 것, 고려대 등 대학교에 가서 연설한 게 계엄포고령 위반이라는 것이 수배의 이유였다. 이소선은 계엄군을 피해 일단 피신했다.

두 번째 조치로 노동청 업무검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즉 노동청에서 탄압대상 노동조합의 회계장부를 뒤졌다. 청계피복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노동청 직원이 연일 노조사무실에 상주하면서 노조의 모든 장부를 샅샅이 뒤졌다.

이에 청계노조는 '회계 등 돈에 관한 한 전통적으로 떳떳하니 너희들이 아무리 뒤져 볼 테면 뒤져보라'는 생각으로 업무 검사에 임했다. 그런데 이처럼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웠던 노조가 탄압의 주체인 노동청한테 창피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숙희 교선부장이 조합원들한테 조합비를 징수해서 입금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유용해 버린 사실이 노동청 업무검사에서 발각됐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숙희 교선부장은 즉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박원섭이 교선부장이 임명됐다.

세 번째 조치로 지역지부 폐지 방침이었다. 청계피복노조는 예외로 인정됐으나 정화조치에는 해당이 됐다. 한국노총의 중앙정화위원회를 중심으로 각 산별 위원장이 추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정화위원회에서 정화조치가 하달됐다.

청계노조의 대응

이에 따라 청계피복노조에도 정화지침이 내려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77년 9월 9일 결사투쟁사건 때 구속됐던 4인(신순애, 신광용, 이숙희, 민종덕)의 조합임원직 사표를 신속히 받아라. (2) 청계피복노조의 고문인 이소선 여사에게 지급되는 월급을 중단하라. (3) 평화, 동화, 통일상가 이외의 건물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조합원이 될 수 없으니 그들로부터 조합비를 징수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로부터 과거에 받은 조합비는 모두 당국에 토해내야 한다.

이에 대해 노조에서는 대책을 숙의한 결과 (1)의 경우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2)의 경우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월급을 내용상으로는 지급하지만 형식상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3)의 경우는 융통성 있게 운영하면 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청계노조는 스스로 내린 결론대로 버티기로 하고 사태추이를 예의주시하기로 했다.

졸지에 수배자 신세가 된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의 친구 집에 잠깐 머물다가 며느리의 친정인 사돈집에서 계엄사 합수부 요원들 한테 10월 11일 검거돼 곧바로 구속됐다. 구속 사유는 5.17 이전에 청계노조 임금인상 투쟁과 고려대 학생들 앞에서 연설 한 내용 등이 포고령 위반이었다.

계엄 아래서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에서 군인들이 착검을 한 채 민간인을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는 것에 대해 이소선은 '왜 민간인을 군인이 재판하는 것이냐'고 따졌으나 재판은 공포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결국 이 재판에서  이소선은 포고령 위반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소선은 구속된 지 두 달 만인 그해 12월 12일 계엄사령관 심사로 석방됐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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