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속 마리는, 바깥 세상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 환상에서 깨어나라는 페르젠 백작의 지속적인 경고도 이해하지 못한다. 악인은 아니었지만, 위정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속 마리는, 바깥 세상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 환상에서 깨어나라는 페르젠 백작의 지속적인 경고도 이해하지 못한다. 악인은 아니었지만, 위정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 EMK뮤지컬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마리 앙투아네트만큼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왕비가 있을까. 비록 그녀가 한 말은 아니지만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로 대표되는 사치와 향락의 주인공이다. 또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내에 상륙해 호연하고 있다. 그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화려함을 자랑한다. 일본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비엔나 뮤지컬은 초연임에도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다. 본래 오는 2월 1일 막을 내리려던 이 극은 1주일 연장공연에 들어섰다.

이 작품은 철저하게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관점에서 그려진 세계관을 묘사한다. 그녀가 바라봤을 때, 프랑스 혁명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민중의 분노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비판의 화살을 받아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대한민국 푸른기와집의 '그분'처럼 말이다.

동기에 대한 설득력 없는 캐릭터... 대체 왜?

 마그리드 아르노를 연기하는 차지연.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역이지만, 혁명의 정당성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으면서 민중을 대변하는 그녀의 캐릭터도 죽어버린다.

마그리드 아르노를 연기하는 차지연.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역이지만, 혁명의 정당성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으면서 민중을 대변하는 그녀의 캐릭터도 죽어버린다. ⓒ EMK뮤지컬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뮤지컬 <1789 바스티유의 연인들>처럼 혁명을 긍정적으로 기술할 필요는 없다. 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수도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창작자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이다.

그러나 최소한, 왜 작품 속 인물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흡입력을 가져야 한다. 반동인물의 동기가 명확히 살아날 때,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갈등이 더 매혹적으로 풀어질 수 있다. 반동인물을 별 다른 설명 없이 절대악 혹은 평면적 캐릭터로 설정해버리면 그에 맞서는 주동인물의 행위도 단선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극의 깊이가 사라져 버린다.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역시 프랑스 혁명의 폭력성을 고발하지만 동시에 혁명의 정당성과 민중이 분노하는 이유도 잘 서술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반동인물인 마담 드파르지의 행동에 일정 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그녀의 증오를 안타까워하게 된다. 그녀가 부르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Out of Sight, Out of Mind)의 감동이 배가 되는 이유다.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은 아예 반혁명을 기치로 내건 극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공포 정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주인공 퍼시에 맞서는 쇼블랑의 신념을 폄하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 덕분에 이 극은 두 인물 간의 대립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민중을 대변하는 마그리드의 동기는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창작인물인 마그리드 아르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의 엠블럼에는 'MA'라는 표기가 적혀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그리드 아르노의 이니셜이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인 마그리드 역시 다른 작품의 인물처럼 비장미를 가득 머금은 채 혁명의 노래를 부른다.

"우리의 손으로 운명을 바꾸자
빼앗긴 권리를 모두 찾아
더는 참지 않아, 이제 보여줘야 해
더 강한 힘을, 우리 모두의 힘을
더는 울지 않아, 함께 일어나 싸워야 해
시간이 왔어, 일어나 싸워야 할 때야."

마그리드를 연기하는 윤공주·차지연 모두 명배우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며 '더는 참지 않아'를 열창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별로 감동적이지가 않다. 대체 빼앗긴 권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싸우자는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이토록 혁명을 지지하는지 단 한 번도 제대로 극 중 표현되지 않는다. 그녀는 가난했고, 그러니 '아마도' 불우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관객이 유추해야 한다. 그녀가 이끄는 혁명의 과정을 살펴보면 진실도, 정의도 없다. 그저 왕비 한 명의 파멸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대체 왜 마그리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함정에 빠트리고 모함하면서까지 나락으로 떨어트리려는가. 이 작품만 봐서는 마그리드가 증오와 악의의 투영 대상으로 왜 마리 앙투아네트를 설정했는지 알 수가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억울함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사라진 혁명 정신은 마그리드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죽여버렸다.

화려한 캐스팅과 아름다운 노래... 역사왜곡과 스토리에 파묻히다

 1789년 당시 '베르사유 행진'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삽화.

1789년 당시 '베르사유 행진'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삽화. ⓒ 위키백과


뿐만 아니다. 이 극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수단으로 프랑스 혁명 자체를 비하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우를 범한다. 자유와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던 당시 언론은 거짓과 선동으로 가득 찬 프로파간다로 묘사된다. 나아가 오를레앙 공작 개인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더불어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속에서 민중은 무지하고, 이기적이며, 속물적 인간들로만 그려진다.

수많은 왜곡 중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묘사는 '베르사유 행진'에 관련된 부분이다. 베르사유 행진은 1789년 10월 5일, 부녀자를 중심으로 한 군중들이 비바람을 헤치고 베르사유 궁전 앞까지 나아간 역사적 사건이다. 가난과 배고픔에 분노한 이들은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했지만 당시 왕은 사냥을 떠나 궁전에 없었다. 폭발한 군중은 근위병을 살해하고 뒤늦게 도착한 왕의 신변을 구속한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애초에 왕족·귀족·성직자 계급의 사치와 민중 착취가 두루뭉술하게 그려진다. 빈곤의 부당함과 혁명정신을 외치며 베르사유로 행진하자는 마그리드의 말에 민중은 무덤덤하게 반응한다. 대신 군중들은 반짝이는 동전에 금세 매료된다. 남자들이 치마를 입고 분장하더니 돈에 눈이 멀어 베르사유로 행진을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연대해 왕정을 타파하는 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부르주아의 선동과 매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 민중 대다수가 혁명에 적극 호응한 동기를 단순히 선동과 매수로 치환할 수는 없다. 계급의식의 성장과 당시 시대정신에 대한 폄훼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상기했듯, 작품 자체의 미적 완성도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다소간 변주하는 건 창작자의 자유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속 역사 왜곡은 스토리와 캐릭터에게 긍정적 요인이 되기는커녕 부정적으로만 작동한다. 힘을 잃어버린 마그리드 덕분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평면적 인물에 그친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는 훌륭한 노래들이 많다.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의 결과물은 언제나 그랬듯 놀랍다. 김소현·옥주현과 더불어 윤형렬·전동석 등 훌륭한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소화한다. 그러나 아무리 캐스팅이 화려하고 노래가 좋아도, 애초에 부실한 스토리가 발목을 잡는다. 눈물까지 흘리며 열연하는 배우들의 재능이 너무 쉬이 낭비된다.

뮤지컬의 넘버(노래)는 갈라 콘서트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다. 이야기 안에서 인물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다. 뮤지컬 넘버가 최고의 생명력을 지니는 때는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가 아니다. 이야기의 맥락 속에 있을 때다.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이 그토록 감동적인 이유는 결과적으로 파멸할지라도 그 순간 순수하게 이상을 추구했던 지킬의 의지와 감정이 잘 표현됐기 때문이다. <레 미제라블>의 '내일로'에 소름이 돋는 이유는 작품 속 캐릭터 각자의 행동에 대한 나름의 이유가 설득적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바라는 각기 다른 내일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기에서 되돌리기 어려울 정도의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스토리의 조야함은 극 후반부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갑자기 마그리드 아르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배 다른 자매라는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두 인물이 닮았다는 복선이 나오기는 하지만, 막장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뜬금없는 설정에 실소가 나온다.

갑작스레 왕비의 처지에 공감하는 마그리드의 행동 변화도 별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옆에서 지켜보더니, 그토록 증오했던 상대를 갑자기 이해하고, 끝에는 동정하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고, 대단원의 막이 내리며 극은 끝난다. 그 끝을 '우리가 꿈꾸는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노래가 장식한다. 그러나 앙상블과 함께 어우러지는 이 장엄한 노래에 별 다른 감흥이 없다.

결국 O.S.T.는 사고 싶지만, 굳이 돈을 주고 재연을 보고 싶지는 않은 애매한 작품이 돼버렸다.

푸른 기와집의 그분께서 이 뮤지컬을 봐야 하는 이유

 윌리엄 해밀턴의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1794년 작품이다.

윌리엄 해밀턴의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1794년 작품이다. ⓒ 위키백과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기존의 선입견만큼 악녀가 아니었다. 평범한 전제 왕정 시대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면 오히려 성군으로 칭송받았을지 모른다. 과거 왕비들에 비해 비교적 덜 사치스러웠고, 성격도 온화한 편이었다.

그러나, 케이크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지 않았다는 점이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못한다. 자리에는 그에 걸맞은 책임이 뒤따른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변혁의 시대 속에서, 피지배계급의 요구를 수용하며 구체제를 혁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요구에 둔감했고, 어떻게든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데만 안간힘을 썼다.

왕실 재정은 파탄 났고, 백성은 굶주렸다. 자유와 평등의 사상이 널리 퍼지며 민중은 계급적 불평등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사상과 통치이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왕과 왕비는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새로운 시대를 무시하고 과거에 얽매였다. 일부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가신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왜 백성들이 반발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기회는 있었다. 당시만 해도 왕정을 유지한 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는 게 절대 다수의 여론이었다. 외국군을 끌어들여 혁명을 무위로 되돌리고, 탈출을 시도했던 무능력함은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단두대의 이슬'이었다.

지난 2014년 11월 25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규제 타당성 여부를 조속히 검토해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들을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 처리해야 한다"라면서 "앞으로 부처가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소명하지 못하면 일괄 폐지하는 규제 기요틴(단두대)을 확대해 규제혁명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신년 기자회견 질의응답 시간에도 "수도권 규제완화가 덩어리 규제인데 규제 단두대에 올려서 과감하게 풀자는 것이 입장"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단두대는 죄수들을 고통 없이 그리고 효율적으로 참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형 도구다. 프랑스 혁명시기에 쓰였으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 단두대에 의해 처형됐다. 특히 공포정치 기간 동안 단두대에 수많은 피가 흐르게 했던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통령은 1960~1970년대의 통치이념을 끄집어내 2015년에 자꾸 펼치려 한다. 과거의 사상을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려는 꼴이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애써 무시하고, 억누르는 데 집착하고 있다. 몇몇 측근에 둘러싸여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통치 행위에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 대통령께 이 작품을 추천해드린다. 청와대에서 구입한 224만 원짜리 리클라이너 의자 한 개 구입비용이면, 할인 없이 VIP석에서 16번 보실 수 있다. 무지한 민중과 언론의 음모에 사로잡힌 극 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입장에 깊이 공감하고 눈물짓게 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더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위정자의 말로는 비슷하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포스터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포스터 ⓒ EMK뮤지컬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혁명 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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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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