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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임재춘의 농성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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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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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연말은 겨울 한파가 심하다. 바람도 많이 불고, 비가 많이 와 농성하는 해고자들에게 쓸쓸한 연말이다. 옛날보다 못한 노동법과 비정규직 제도 때문에 노동자들의 하루살이는 점점 힘이 든다. 어른들의 말씀에 아무 쟁이나 되면(아무 기술이나 있으면) 먹고 사는데 지정이 없다 하였는데, 현재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내년부터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요건을 더 완화해 비정규직으로 바꾸는 법(정규직을 해고한 뒤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할 것이라는 의미-편집자 말) 개정을 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투쟁 사업장만 늘어나고 해결 사업장은 하나도 없다. 광고탑과 철탑, 회사 굴뚝에 오르는 노동자가 많다. 옛날에는 굴뚝이 공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요즘엔 해고 노동자들의 최후 수단이 되었다. 그곳에 오르는 것은 너무 절박하기 때문이고, 함께 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사회에서는 외면한다.

12월 13일 새벽, 평택 쌍용자동차 70미터 굴뚝에 이창근, 김정욱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올라갔다. (앞서) 고법에서 회계조작으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지만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에서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파기 환송을 받았다. 구조조정, 정리해고와 함께 26명의 죽음까지 만든 회사인데, 경영자들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송전탑에 오른 지 3일째, 그는 단식을 시작했다

2008년 10월 21일, 이인근 지회장이 양화대교 북단 송전탑에 올랐을 때의 모습. 이날 이인근 지회장 송전탑 위에서 삭발을 했다.
 2008년 10월 21일, 이인근 지회장이 양화대교 북단 송전탑에 올랐을 때의 모습. 이날 이인근 지회장 송전탑 위에서 삭발을 했다.
ⓒ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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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에 인근이(금속노조 콜텍지회 지회장)도 서울 양화대교 북단 45미터, 전기가 무려 14만 볼트나 흐르는 송전탑에 오른 적이 있다. (2006년 정리해고 이후) 이때까지 콜텍의 우리는 대전의 계룡에서 정리해고 상황을 알리고 회사에 면담 요청도 많이 하였는데, 회사는 면담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인근이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인근이는 말없이 행동했다. 인근이가 서울의 송전탑에 올라간다는 얘기를 듣고 그날 새벽에 대전에서 조합원들과 급하게 차를 타고 올라왔다. 양화대교 철탑에 도착하였을 땐 이미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서울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하였고, 처음으로 지하철 선전전을 했다. 지하철에서 4인 1조가 되어 한 정거장마다 한 명은 피켓을 들고, 두 명은 시민들에게 선전지를 나누어 주고, 한 명은 우리 상황을 설명하였다. 우리 콜텍은 대전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시민들에게 해보는 선전전이라 쑥스럽고, 창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인근이는 송전탑에 오른 지 3일째 되는 날 단식 투쟁까지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삭발도 했다. 나는 철탑 아래서 인근이 머리카락이 잘리는 모습을 동영상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그 당시 나는 사람으로서 죄지은 기분이었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속상하고 막막했다. 밑에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이 일에 후회도 하였다.

11월 중순엔 인근이의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져 크레인을 타고 내려왔다. 그 때 송전탑에서 내려오는 인근이 모습은 죽은 사람 시체의 느낌이었다. 그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퇴원을 하였다. 송전탑에서 내려온 후 여러 후유증이 생겼고, 이가 안 좋다는 말을 종종 하였다. 또 송전탑에 오를 때 농성에 필요한 짐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몰라 있는 짐 없는 짐 한 번에 다 싸서 올라갔더니 뒤로 넘어질 뻔 했다고, 올라가는 데 힘이 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농담으로 이야기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나오지만 인근에게는 아찔한 이야기이다.

송전탑에서 내려온 후 몇 명의 조합원은 조합을 탈퇴하였다. 이런 하루하루가 사람 사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남은 조합원들은 몇 주 후 최후의 수단으로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있는 본사 건물을 점거하였다. 점거 8시간 만에 경찰 특공대에 검거되어 조합원 전체가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그 일로 경봉이형과 당시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조민제 지부장은 구치소 생활을 하였다.

다시 얼마 후 대전 농성장으로 돌아갔을 때 송전탑에 인근이가 가지고 올라갔던 전열복을 보면 그 시체 같은 모습이 또 떠올라 눈물이 나곤 했다. 정리해고 당하면 땅이 싫어 하늘에 올라가 국민에게 호소를 하지만 이 사회와 경영자들은 아무 말이 없다. 현재 굴뚝에 있는 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성과를 얻어 몸 건강하게 내려오기를 기도한다. 내년에는 단 한명의 노동자도 하늘에 오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2014년 12월 26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양화대교를 선택한 이유 "국회가 잘 보이는 곳이라..."

2008년 10월 21일, 이인근 지회장이 양화대교 북단 송전탑에 올랐을 때의 모습. 이날 이인근 지회장 송전탑 위에서 삭발을 했다.
 2008년 10월 21일, 이인근 지회장이 양화대교 북단 송전탑에 올랐을 때의 모습. 이날 이인근 지회장 송전탑 위에서 삭발을 했다.
ⓒ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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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근 지회장에게 왜 하필 양화대교였냐고 물었다. 그는 대전에는 올라갈 만한 높은 곳이 없었고, 쉽게 연행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고, 국회가 잘 보이는 곳이라 양화대교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곳에는 지하철도 지나간다니 서울 시민들에게 잘 보일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멀리 있는 국회에서 보라고, 시민들이 이 상황을 알아달라고 그는 10m 길이의 플래카드와 함께 자신의 몸만 한 배낭을 메고 45m 양화대교 부근의 송전탑에 올랐다. 2008년 10월 15일 새벽 4시, 경찰이 달려올 수 없는 시간, 조합원들이 잠들었을 시간에.

그가 송전탑에 오른 이유는 어떻게든 박영호 사장을 대화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였다. 사측과의 교섭 성사, 그것이 목표였다. 해고농성 2년째, 각종 해고 지원금들이 말라가고 조합원들이 지쳐갈 즈음이었다. 그가 고공농성과 함께 곧바로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은 미리 그의 마음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만큼 고공농성은 그에게 끝장 같은 것이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스마트폰도 없던 그때는 아침에 눈을 떠 아래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간간이 찾아오는 사람들과 통화를 하고, 책을 보고, 또 다시 잠이 들거나 허공을 응시하는 시간들이었다.

세상은 그의 의지만큼 굴러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알아주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11월 13일 다시 땅으로 내려올 땐 10Kg 넘게 줄어든 몸뚱이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착잡함, 남은 나날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서였다.

송전탑 위에서 그는 배고픔보다도, 고독함보다도 부모님이 그곳을 찾아왔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허위허위 허공으로 흔드는 어머니의 손을 멀리서 보는 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득한 슬픔이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이러다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칠 때도 송전탑 아래 부모님을 볼 때만큼 아찔하진 않았다고 했다.(관련기사 : [농성일기 10]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버지는 오늘도 웁니다)

정리해고로 직장과 직장동료와 괴리되었다. 거리농성으로 가족과 멀어졌다. 급기야 굴뚝이나 송전탑, 전광판을 오르는 일은 세상에서 밀려나는 자들의 슬픈 관행이 되었다.

그곳에 오를 때도, 그곳을 내려올 때도 이 세상이 너무나 야속하여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심정이었다고 이인근 지회장은 회고한다. 지금도 이곳저곳 허공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심정 아니겠냐고 한다. 또한 고공에 오른 사람의 힘겨움도 크지만 땅에 남아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더욱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차마 말리지 못하고 그 높은 곳에 오르게 한 죄책감은 얼마나 클 것인가. 고개를 젖히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막막함에 무기력함은 얼마나 깊게 잦아들 것인가.

'함성'이나 '구호' 아닌 '비명'에 더 가까워진 고공농성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신에 대한 도전이고, 탐욕이라고 꾸짖던 때가 있었다. 바벨탑, 이카로스… 하늘로 치솟는 모든 것은 인간의 승리이고, 성장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높은 곳에 욕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성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오르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겨난다.

한때는 골리앗 전사라는 호칭과 함께 고공농성이 경영주의 탐욕에 맞선 영웅적인 저항을 상징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2008년 10월과 2014년 이 겨울의 고공농성 주체는 비정규직, 장기농성자, 중소사업장의 해고자들이며 지금의 고공농성은 '함성'이나 '구호'보다는 '비명'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이 끔직한 지옥을 제대로 보아달라는 허공에 매달린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오늘(12월 28일)로 콜트 콜텍 해고자들의 농성은 2888일차가 되었다. 그리고 허공에 오른 다른 사업장의 농성자들을 바라보며, "내가 다시 저 곳에 오를 수도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이인근 지회장의 모습은 공허한 듯 담담했다. 참으로 끔찍한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태그:#농성일기, #콜트콜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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