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에서 아버지 덕수 역의 배우 황정민이 19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아버지 덕수 역의 배우 황정민이 19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오마이스타 ■취재/이선필 기자·사진/이정민| 20년의 연기 경력에 여러 화제작에 참여했던 황정민에게도 <국제시장>은 여러모로 낯선 경험이었다. "100억 원 넘는 예산도, 첫날 관객 수가 18만 명 이상 나온 것도, 상영관 수가 900개 넘게 잡힌 것도 다 처음"이라고 그는 운을 뗐다.

그는 지난여름, 한국 전쟁 직후 가족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아버지 덕수로 살았다. 연출을 맡은 윤제균 감독이 자신의 부모님 이름을 그대로 영화 캐릭터로 쓸 만큼 헌사적 의미가 있었지만, 황정민은 그저 덕수로 살았고, 덕수로 울고 웃었다.

아버지에 대한 영화. 이 짧은 말로 그가 <국제시장>에 합류할 이유는 충분했다. 윤제균 감독이 시나리오를 전달하기 전이었지만, 황정민은 아버지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설명만 듣고 2013년 여름 일정을 모두 비워뒀다. 흥행을 생각하기 전에 "영화를 통해 잠깐이라도 관객들이 아버지, 부모님을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나의 아버지와 <국제시장>의 아버지..."난 그저 덕수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 <국제시장>의 스틸컷.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무대에서 호랑이처럼 배역을 삼키고 호령하던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이다. 슬하에 아들을 둔 그 역시 '아빠'라는 호칭이 익숙한 중년의 남자가 됐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할 때 다가온 작품이 <국제시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엄마가 주로 주목받았지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야기는 없었잖나"고 반문하던 그는 "엄마가 된 여자가 엄마를 여자로 이해하기 시작하듯 나 역시 아빠라는 소리를 들으며 아빠라는 남자를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 속 덕수는 주야장천 돈을 벌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독일 탄광에서 석탄을 캐던 그는 베트남 전쟁에 자의 반 타의 반 참전해 고초를 겪는다. 한국 전쟁통에 동생과 생이별을 하고 눈물을 훔치며 부산으로 피난 온 전사는 영화 내내 덕수의 가슴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으로 남아있다. 그런 이유로 덕수는 가족에 더욱 집착하고 부양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갖게 됐다.

영화 밖으로 나와 보자. 아버지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투영하진 않았단다.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는 보통의 중년 가장과 그들 부모의 관계와 닮아있다. 속마음을 터놓거나 살갑게 챙기는 관계가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하고 무던하게 대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에이 갑자기 관계가 살가워지면 그게 더 어색하지요!" 그렇다. 그의 말대로 관계가 나쁜 게 아니라 말수가 적은 것이다. "늘 당신 말씀만 하시고서 전화를 끊는 그런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국제시장> 속 덕수에겐 우리 아버지의 이미지가 전혀 담겨있지 않아요"라고 황정민은 설명했다.

부친에게 영화를 보여드렸건만 울었는지 웃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식 뒤에서 그 아버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식의 영화를 자랑했으리라. 황정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랬을 수도 있겠죠" 그게 바로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지 않을까.

"선물하고 싶은 책을 고르는 심정으로 작품 선택 고민"


훌륭히 배역을 소화한 황정민에게 아픈 표현일 수 있지만 덕수는 참 순진하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아오며 세상을 저주하거나 독재 정권 및 민주화 투쟁으로 수상했던 시국을 거쳤을 텐데 참 무던하다. 오로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홀로 방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회고하며 눈물을 훔친다.

<국제시장>에서 거세된 시대에 대한 시각에 대해 그는 "당연히 정치적, 역사적 사건은 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항변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이 과거를 역사로 생각하듯, 동시대를 살던 사람 입장에서는 분명 지나가는 사건들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황정민은 "만약 누군가 역사적, 정치적 사건을 더 넣으려 했다면 오히려 빼자고 의견을 냈을 것"이라며 "정치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덕수는 정치가 삶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덕수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거다. 황정민은 덕수를 두고 "그 인물의 정치적 입장은 분명하지 않지만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이 지점에 황정민의 연기관이 숨어 있다. 어떤 작품을 하든 그는 자신과 캐릭터를 철저히 분리하고 오롯이 그 캐릭터로 분한다. "그래서 연기가 지겹지 않다"는 그는 "만약 캐릭터가 아닌 나 자신을 보이려 했다면 이미 관객들이 알아채고 황정민이라는 배우를 지겨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을 택할 때 내가 좋아서 하기보단 관객들이 좋아해 줄지가 우선입니다. 이 작업은 혼자 좋다고 해서 취할 수 없지요. 그러다 보면 시선이 좁아지고 우물 안 개구리밖에 안 돼요. 대본을 받으면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봐요. 내가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어요. 이 책을 관객에게 선물할 수 있는지가 선택 기준입니다. 책 선물이 참 까다롭잖아요. 취향을 타니까. 근데 읽다 보면 좋아서 꼭 선물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그런 작품을 고르는 겁니다. 한두 사람에게 보이려고 작품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대중 예술가로서의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해 주세요.(웃음)"

"배우는 직업일 뿐...늘 다른 변화를 꿈꾼다"


직업의식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황정민에게 배우는 자신이 택한 하나의 길이다. 이 말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배우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길을 꿈꾸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다. 그는 "억지로라도 철저히 배우일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해야 한다"면서 "배우,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내 삶에 들어온 순간 숨통이 막혀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이게 뭐라고..."라고 말끝을 잠시 잡던 그는 "어쨌든 내 삶과 가족이 중요하다. 내 직업으로 날 의식하는 날이 오면 배우라는 직업은 안 하고 싶다"고 속내를 밝혔다. 

"배우는 늘 좋은 것을 취합니다. 옷도, 음식도 여러 물건도요. 그런데 그런 삶을 가만히 두면 썩게 돼요. 배우가 아닌 그냥 연예인이 되는 거죠. 후배들에게도 이 직업 때문에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지 않길, 자신을 좀 먹게 두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를 잠깐 언급했다. "영화는 쫄딱 망했지요!"라고 호탕하게 웃었지만 사실 그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작품 중 하나다. 흥행과는 별개로 배우가 아닌 사람 황정민을 돌아보게 했던 영화였다. 그는 "태풍 매미가 강원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때 전국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팔을 걷고 돕는 장면을 TV로 보던 내가 그렇게 창피했다"면서 "정작 한국을 사람답게 사는 나라로 만드는 존재들은 유명 인사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임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황정민이 관객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었다.  

여러 화두를 던졌지만 이쯤에서 황정민이라는 사람을 정의하려고 한다. 연기 귀신, 짐승 같은 연기 등 그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그렇다고 특출한 캐릭터를 맡았던 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가 연기했던 인물은 세상에서 한 번쯤 만났거나 스쳤을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매년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났고, 내년에 선보일 작품 역시 네 작품(<히말라야> <검사외전> <베테랑> <곡성>)이나 되는 다작 배우지만 여전히 그의 모습이 반갑고 신선한 이유는 그가 반동이 아닌 변화를 꿈꾸는 자연인이고자 해서가 아닐까. 또 하나 기억할 것은 그가 집에서는 누구보다 자상한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황정민 국제시장 윤제균 오달수 김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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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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