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2015 호주 아시안컵에 나설 축구대표팀 명단을 마침내 발표했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부분은 역시 공격진이었다. 대표팀에 뽑을 수 있는 경험 많은 공격수 자원들이 대거 부상과 슬럼프에 허덕이고 있는 가운데, 슈틸리케 감독이 과연 안정과 모험 중 어떤 선택을 내릴지 관심이 집중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결국 '모험'을 선택했다. 대한축구협회가 이번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의 슬로건으로 제시한 '타임 포 체인지(TIME for CHANGE)'라는 구호와도 어울리는 결정이다. 부상으로 어차피 합류가 불가능했던 이동국-김신욱은 그렇다 쳐도, 근 10년간 국내파 감독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앙'에 가까웠던 박주영이 부상 외의 이유로 대표팀에 탈락한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박주영이 비록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골을 넣지 못하고 있지만, 성적을 의식할 수 없는 대표팀 감독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국제 대회를 앞두고 경험 많은 공격수는 '보험용'으로 데려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한편으로 보다 장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변화를 추구하려는 슈틸리케 감독의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슈틸리케호 공격진, 다양성과 변화 선택

대신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아시안컵 대표팀 명단에 공격수로 이근호, 조영철, 이정협을 선택했다. 이 명단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각기 다른 스타일을 지닌 공격수들을 발탁함으로써 아시안컵에서 최대한 공격 루트의 다양성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안컵 이후까지 고려해 장기적인 세대 교체를 고려한 구상이라는 점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을 보여주며 대표팀에 대한 열정과 절박함이 있는 선수를 중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번 대표팀 명단에서 그 원칙을 지켰다.

세 선수는 각각 스타일과 장·단점이 다르다. 이근호와 조영철은 전형적인 원톱형 공격수는 아니지만, 활동폭이 넓고 동료와의 연계 플레이가 뛰어나다는 게 강점이다. 최근 소속 팀에서 득점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슈틸리케 호의 평가전에서는 공격수 후보 중 그나마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이었다.

특히 월드컵 멤버이기도 한 이근호는 A매치 70경기에서 19골을 기록하며 이번 아시안컵 공격진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하고, 많은 골을 기록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좀 더 제로톱에 최적화된 조영철에 비해 이근호는 포스트 플레이 등 일반적인 원톱 공격수의 역할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는 데다 선발과 조커 양쪽으로 모두 활용 가능하다. 아시안컵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중동팀들을 상대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실질적으로 이번 아시안컵에서 주전 공격수로 나설 확률이 가장 높은 선수다.

이번 대표팀의 신데렐라로 꼽히는 이정협의 경우, 흔히 박주영과 비교 대상이 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동국이나 김신욱의 대체 자원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박주영은 사실상 이근호-조영철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186cm, 76kg의 탄탄한 체격 조건을 자랑하는 이정협은 A매치 경험은 없지만 이번 대표팀에서 유일한 '타깃맨' 자원이라는 데 주목할 만하다.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에서 경기 종반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롱볼과 공중전에 대한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름값으로 골 넣는 것 아니다

불호령 14일 오후(한국시간) 요르단 암만 킹 압둘라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요르단의 축구 평가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지난 11월 14일 오후(한국시간) 요르단 암만 킹 압둘라 국제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요르단의 축구 평가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슈틸리케 감독이 확정한 공격진 명단이 발표되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역대 대표팀에 비해 선수들의 이름값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약체', '무리수'같은 평가까지 들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역대 아시안컵을 봐도 공격진 개개인의 이름값이 대표팀의 화력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핌 베어벡 감독이 이끌던 2007년 대표팀의 경우, 박주영이 부상으로 탈락하면서 이동국, 우성용, 조재진 등 스타일이 겹치는 3명의 타깃맨을 한꺼번에 발탁했지만 세 선수는 대회 내내 단 한 골도 합작하지 못했다. 베어벡 호는 3, 4위전까지 6경기에서 단 3골을 넣으며 극심한 빈공에 시달렸다.

조광래 감독이 이끌었던 2011년은 '전술'로 공격력을 만회한 대표적 사례다. 당시 최고의 공격수였던 이동국과 박주영이 모두 대표팀에서 탈락하면서, 조광래 감독은 최전방과 2선 공격수들의 유기적인 공간 활용을 바탕으로 한 스위칭 전술을 내세웠다. 조광래호의 아시안컵 공격진을 구성한 지동원, 유병수, 김신욱은 당시만 해도 A매치 경험이 거의 없는 신예들이었고, 2선 공격수로 분류된 손흥민도 아직 풋풋한 막내에 불과했다.

조광래 감독은 지동원을 원톱으로 기용하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하던 구자철을 처진 스트라이커로 깜짝 기용하는 '포지션 파괴'로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 조광래호는 아시안컵 6경기에서 13골을 기록하는 폭발력을 과시했다. 구자철은 5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으며, 김신욱과 손흥민은 조커로서 고비마다 공격에 힘을 보탰다.

당시의 조광래호에 비하면 오히려 현재 슈틸리케 호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이근호라는 경험 많은 공격수가 있고, 손흥민, 구자철, 이청용 등 4년 전에 비해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한 멤버들이 건재하다. 전술의 유연성이나 활용 가능한 자원의 숫자에 있어서는 4년 전보다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아무래도 최전방에 비해 2선 공격진의 역할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슈틸리케 호의 특징이다. 손흥민과 이청용의 주전 조합이 유력한 좌우 날개는 대표팀의 가장 확실한 공격 루트다. 올 시즌 11골을 터뜨리며 국내와 해외파를 통틀어 최고의 득점력을 자랑하는 손흥민의 활용법은 슈틸리케 호의 공격력을 가늠할 최대 변수다. 전력상 우위인 아시안컵에서 굳이 원톱 전술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유사시 스트라이커도 가능한 손흥민을 최전방으로 끌어 올려 공격을 강화하는 투톱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

4년 전 아시안컵의 최대 깜짝 히어로였던 구자철의 컨디션이 떨어진 건 아쉽지만, 이명주와 남태희라는 대안을 확보하면서 공격형 미드필더의 활용폭은 더욱 넓어졌다. 이근호나 이청용도 이 자리에서 활용 가능한 자원들이다.

평가전에서 자주 시도한 전술은 아니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단시간 내에 골을 요구하는 선 굵은 전술을 시도할 때 장신 미드필더 기성용을 전진 배치해 타깃맨이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게 활용하는 변칙도 하나의 대안으로 거론된다.

이번 슈틸리케 호가 빈공에 허덕였던 2007년이 재탕될지, 2011년이 재방송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007년이나 2011년이나 한국의 순위는 똑같았다. 골을 적게 넣고 이기건, 많이 넣고 지건 결국은 스타일의 차이에 불과하다. 적어도 분명한 사실은 골은 이름값으로 넣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현재 활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최상의 선택을 내렸다. 대표팀 최대 목표는 결국 5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이고, 이를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골을 넣느냐보다 '얼마나 필요할 때 골을 넣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제는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