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고등학생이 공개 토크 콘서트장에 사제 폭발물을 던져 출연진과 관객이 황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폭발물을 던진 이유는 이렇다. 소위 '종북'이라 불리는 무리가 '더 이상 대한민국에 설치고 다니는 꼴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시국을 들먹이며 의사(義士)를 참칭해 본인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모습은 어쩌면 저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명분이나 당위도 없이 저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하나의 장면이 뇌리에 콱 박혀 잊히지 않았다. 현장 사진에 얼핏 잡힌 고등학생의 얼굴이었다. 분명 '확신범(어떤 결정적 확신을 동기로 삼고 행하는 범죄 또는 범인)'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무려 '백색 테러'라 불릴 만한 무시무시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그의 기색은 당당했다. 누군가에겐 어리석은 뻔뻔함으로 비칠지 몰라도 말이다. 문득,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하나가 떠올랐다.

고교생의 백색테러... 이 다큐가 생각났다

 <액트오브킬링>

<액트오브킬링> ⓒ ㈜엣나인필름


지난 11월 20일,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문제작 하나가 국내에 개봉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다. 주인공 안와르 콩고는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10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소위 '정치 깡패'다. 누구보다 잔학하게 공산주의자들을 척결했던 치적을 인정받아 인도네시아의 준군사조직인 '판카실라 청년단'이나 지역 관료들 사이에서 은퇴 후로도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 때 마침, 영국에서 온 한 외국인 감독이 콩고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콩고의 이 위대한 '학살'을 한 번 영화로 재현해 보자는 것.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건 바로 '연출, 각본, 출연'을 모두 콩고가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벽안의 감독이 던진 생뚱맞은 제안에 솔깃함을 느낀 콩고는, 그 즉시 학살에 가담했던 옛 동료들을 불러 모아 영화 제작에 착수한다.

<액트 오브 킬링>은 바로 이 영화 제작 과정을 빼곡히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인면수심 악인들의 서늘한 난장을 과장 없이 기록하고 포착한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 콩고는 학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이미 다 지난 일'이라며 담담한 표정으로 일관하기 바쁘다. 오히려 당시의 기억들을 전리품처럼 늘어 놓으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다 없애야 할 놈들'이었다고 일갈한다.

가해자가 승리한 세상에서 그들이 느낄 일말의 죄책감은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하지만 냉혈한 같던 콩고도 영화 촬영이 진행될수록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가해자는 가해자임과 동시에 살육의 현장을 가장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목격자다. 콩고는 그런 이유로 자신의 영화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실제'보다는 덜 잔악하지만 나름 고증을 거친 고문, 살해 장면을 찍으며 콩고는 희생자들의 입장을 몸소 체감한다. 영화의 말미, 콩고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을 살해할 때 가장 즐겨 썼던 '철사 목조르기'의 피해자를 연기하다 몸부림치듯 외친다. "두 번 다시는 못하겠어"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는 마치 어느 확신범의 처연한 '씻김굿'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피의 카니발이 펼쳐진 현장에서 콩고는 원인 모를 욕지기를 느끼며 무언가를 토해내려 노력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한다. 콩고가 마치 자신의 악행을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목해야 하는 건 여기 희생자를 위한 진정한 위무는 없다는 점이다. 도리어 욕지기 뒤에 콩고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맞서 닥쳐올 거대한 업보를 걱정한다. 어쩌면 마지막 반성의 기회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끝내 자신의 신상을 걱정하는 모습은 그의 비뚤어진 '확신'이 변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비뚤어진 확신, 반성하기 어렵다

 10일 오후 전북 익산시 신동성당에서 열린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 진행하는 토크 콘서트에서 3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인화성 물질이 든 냄비를 품 안에서 꺼내 불을 붙인 뒤 연단 쪽으로 향하다가 다른 관객에 의해 제지됐다. 이 사고로 관객 200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지난 10일 오후 전북 익산시 신동성당에서 열린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 진행하는 토크 콘서트에서 한 고교생이 인화성 물질이 든 냄비를 품 안에서 꺼내 불을 붙인 뒤 연단 쪽으로 향하다가 다른 관객에 의해 제지됐다. 이 사고로 관객 200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 연합뉴스


콩고는 뉘우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생각이 많아졌을 뿐. 여기서 그에게 감지할 수 있는 건 바로 '확신범'의 냄새다. 절대적 신념에 따라 행동한 이들에게 테러, 학살 따위의 끔찍한 단어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일말의 죄책감도 끌어낼 수 없다. 범국가적으로 합의된 어떠한 고결한 가치도 단호한 결의 앞에선 모조리 무용해지기 때문이다.

순환 논증에 빠진 확신범들은 행동에 있어 전혀 거침이 없다. 신념을 행할 수단과 방법을 택할 때는 반드시 최소한의 윤리적 사고가 작동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확신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 모든 행동을 재단한다. 신념을 지키는 데 발생한 모든 부수적 피해들의 당위를 기어코 그 신념 스스로에서 쥐어 짜내는 이들에게 타자들이 동의한 윤리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치 빌 게이츠 주머니 속의 1달러처럼 쓸모없고 초라한 사족인 셈이다.

그런데 그걸 한국의 뉴스에서 본 거다. '확신범'의 눈빛을. 그것도 고등학생에게서 말이다. <액트 오브 킬링>에 등장하는 1965년 학살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지역 갱스터들은 공식행사나 방송, 인터뷰에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말한다.

"'갱스터'라는 말은 프리맨(freeman), 바로 '자유인'에서 나왔다."

신문을 보니 그 고등학생은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니 수인의 신분에도 스스로 자유인이라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콩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어느 누가 그에게서 혐오와 증오가 아닌 자유를 볼 수 있는가. 언뜻 치기나 우발적인 실수처럼 보이는 이 고등학생의 '백색 테러'에 더 주목해야 할 이유다.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백색테러 고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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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를 꿈꾸는 대학생입니다. 미생입니다. 완생은 바라지도 않고, 중생이나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 21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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