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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경기도 수원에 사는 평범한 아줌마가 운 좋게 서울 강남에 있는 한 회사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가장 놀란 건, 저마다 명품을 걸치고 운전기사와 가정부를 대동하는 '사모님'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회사는 그런 사모님들께 문화나 스포츠 분야의 강의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 나는 서비스 매니저라는 직책을 맡아 고객서비스 관리자로 일했다. 인포메이션 직원이나 강사들처럼 직접적으로 고객과 부딪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큰 사건의 컴플레인은 직접 해결해야 했다. 즉, 블랙리스트 고객을 '전담마크' 하는 게 내 일이었다.

블랙리스트 고객에게 독촉전화, 사무실이 뒤집혔다

KBS2 TV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정여사>의 한 장면
 KBS2 TV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정여사>의 한 장면
ⓒ 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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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햇살이 아름답게 사무실 창가를 비추던 어느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였다. 월말이 되면 매달 미수납 수강료를 체크하고 해당 고객에게 문자나 전화를 한다. 대략 한 달 정도 미수납 고객은 그냥 넘어가고 두 달 후부터 수납 요청을 한다.

그런데 고객들 대부분이 강의를 1~2개 정도 듣다 보니, 장기 미수납 고객에게 강사팀과 경영팀에서 중복해 전화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사실 일반 고객들은 전화를 두 번 받더라도 본인의 잘못(미수납 부분)이 있으니 아까 받았다면서 빨리 수납처리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고객은 많이 달랐다.

그 날도 블랙리스트인 B 사모님에게 수납요청 전화가 두 번 갔다. 두 번째 전화를 마친 C강사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고 사무실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저기... 매니저님, B 사모님이 소리를 막지르고 욕을... 확 끊어 버렸어요. 당장 갈 테니 기다리라고. 어떡해요..."

아직 어린 C 강사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일단 괜찮다고 강사를 진정 시키고 B 사모님의 미수납 내역을 봤다. 3개월이나 미수납 상태였다. 수업 일수를 보니 아주 꼬박꼬박 출석했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명품을 걸치고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면서 수강료를 3개월씩이나 안 내는 행태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거기다 담당 강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예의 없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할까.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리게 욕했다. 그러자 나의 친절한 모습만 본 직원들이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내 의지는 확고했다. 난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 오늘 사고 친다. 사표 쓸 거야!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십여 분 후, 나처럼 씩씩대며 인포메이션으로 들어선 B 사모님. 난 일단 뒤에서 지켜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나가 한방에 망신을 줄 생각이었다.

"야! 니들이 뭔데 바빠 죽겠는 나한테 두 번이나 전화를 하고 지랄이야! 내가 언제 돈 안 낸다고 했냐!"

직원들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몸을 바들바들 떨며 서있기만 했다. '아, 진짜 착하기만 한 직원들. 내, 너를...' 나는 이때다 싶어 튀어나가며 "사모님, 저 손 매니접니다. 근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지..."하고 B 사모님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봤다.

우아한 강남 사모님 얼굴의 반창고... 나를 구했다?

그런데... "풉!" B 사모님의 얼굴엔 네모난 작은 반창고 수십 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꼭 포장공사 중인 도로처럼.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붙이고 힘을 줬다. 이제 보니 다른 직원들도 무서워서 떠는 게 아니고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고 있던 거였다.

나는 사고 치겠다는 마음은 어느새 잊고 본의 아니게 미소를 잃지 않으며 B 사모님을 달래기 시작했다. "죄송하다"는 말과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말을 수십 번하고 나서야 B 사모님은 진정했고 미수납 수강료를 결제했다.

결제 후 돌아서는 B 사모님에게 달려가 주차장까지 모시겠다고 하니 B 사모님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역시 매니저가 내 맘을 알아주네. 화난 고객에게도 친절함을 잃지 않고 죄송하다고 하니까 나도 화가 수그러들잖아. 안 그래요, 손 매니저?"

번쩍거리며 광이 나는 검은색 외제차가 멀어질 때가지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서 B 사모님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아, 사모님 얼굴이 오늘 저를 살렸네요. 허허허....'

덧붙이는 글 | <그래, 나도 장그래였다>응모글입니다.



태그:#블랙리스트, #고객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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