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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띠동갑 12살 아래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샘! 우리가 만난 지 올해 벌써 20년이에요! 밥먹어야지요."

연락이 온 친구는 한때 전업서예작가로 활동하던 나의 30대 생활을 45분 다큐멘터리로 만든 구성작가이다. 다큐를 만들기 위해서 사전에 구성대본을 만들고 촬영하느라 2주 이상 나를 따라 다니며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30대 중반이었던 그 때의 나는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났었다. 식구들 밥해놓고 새벽에 먹을 갈고 작품 초안을 만들기 위해 서예연구실로 내려갔다. 이후 식구들을 차례로 학교로, 회사로 보내고 빨래하고 청소한 후 다시 연구실에 나와 종일 작업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문하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주말이면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서울의 정릉과 인사동으로 한학과 전각, 문인화, 한문서예 등의 공부를 다녔다.

그때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친해졌다. 내가 비영리인권단체를 설립할 때는 방송국 일을 줄이고 우리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아 내 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퇴임할 때 같이 퇴직을 한 후 이제는 방송국의 전업 베테랑 구성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오랜만에 만날 때마다 항상 물어보는 말이 있다.

"샘! 아직 그 곳에 있으신가요? 언제까지 계실건데요?"

그것은 왕년의 전업작가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뜻이다. 이곳은 청주시내 복지기관 중에서도 일이 많기로 지역사회에 소문이 났다고 하니, 내가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우려가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이나 여성장애인 후배들 또는 경력단절 여성들은 말한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 곳에 들어갈 수 있어요? 길을 알려주세요."
"선생님이 그렇게 일하시니 저희도 장애기관이 아닌 일반기관에 들어가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느껴요."

이전 경력의 기억 때문에 더 힘들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문화관광부 재단법인으로 학교, 병원, 복지시설, 복지기관 등에 다양한 서비스 사업을 제공한다. 나는 복지기관에 소속되어 문화예술과 접목한 교육프로그램을 설계한다. 이를 추진하기 위한 외부지원금을 공모로 확보하기도 하고, 확보가 어려우면 40여 년간의 작가 경력에 기반하여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같은 예술인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이 같은 직종을 '에듀케이터'라고 한다. 

계약직의 바닥에서 새출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내 안에 있는 소망을 이루어야 했고, 대학에 들어간 두 딸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에너지를 불살라야 했다. 어렵사리 3년간 인건비가 지원되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문화예술인력양성사업에 합격했다.

동시에 나를 받을 수 있는 문화예술기관을 물색하다가 다양한 계층을 위해 점점 서비스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재단의 담당분을 만나 재단산하기관이긴 하지만 운영지원은 청주시가 전담하는 이 곳에 들어왔다.

내 책상에 놓을 간단한 사무집기와 가족사진 한 장을 가지고 들어간 첫 날! 부푼 가슴으로 출근하였으나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잠시 당혹했다. 아! 계약직이란 이런 것인가 싶어 그냥 자원봉사자들이 돌아가면서 앉는 자리에 임시로 앉았다. 내 자리는 2달 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내게 일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었고 프로그램을 기획해도 실행할 교실이 없었다.

그래서 내 형편에 무리인 줄 알지만 서예실을 처분해서 100평 교회건물을 임대해 리모델링하여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문화의 집 설립준비를 하면서 기획하는 새 프로그램의 교육생들을 교육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내 인건비를 3년간 지원한다는 국비사업이 종료되었을 때 그동안 개발한 많은 교육사업의 성과와 실적 덕분에 4년째 되는 해에 나는 기관과 재계약 했다. 그러나 재계약할 때 시청에서 주는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이유로 인건비는 20% 삭감되었다. 또한 해마다 담당이 바뀌는 청주시청에서는 에듀케이터라는 직무에 대해 공무원들이 갸우뚱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민하다가 내가 상대하는 노인계층의 증가와 교정시설 안의 특수 계층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일단 사이버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사 공부에  들어갔고 동시에 심리상담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사회복지사 자격을 얻었고, 심리상담사 1급에 합격했다.

딸뻘 되는 중간관리자와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자꾸 오해가 생기고 참고 참다가 속병이 날 정도였을 때, 또는 어떤 일이 꼬일 때, 내가 잘 듣지 못한 탓에 놓쳤다는 식으로 내게 책임이 전가될 때 당장 그만 두고 싶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중간관리자가 먼지나는 허드렛일이나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일을 시킬때, 엄마뻘 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시켜도 되나 은근히 심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조직에서는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지금은 알아서 솔선수범한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조직의 일원이니깐.

'내빈'으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지역사회 안에서 활동하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다가, 한 기관의 말단이 되어 내가 인사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되려 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처신도 처음에는 쉽지 않아 멀뚱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자각이 들었다.

"아 난 이 상황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전에 내빈으로 대우받았던 기억들이 걸림돌이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사한 새내기이면서 이전의 경력에 대한 기억으로 이중으로 힘들었다.

그만두면 내 마음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

언젠가 어렵사리 사회복지사들의 재충전을 위한 사업계획안을 만들어서 서울의 중부재단 펀드사업 하나가 확보되었을 때,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반가워했다. 왜냐하면 한번 합격하면 자동적으로 해마다 사회복지사들이 혜택을 받게 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었다.

합격통보 후 서울의 재단본부에 여러 번 오간 후에 정식으로 협약체결을 하고 내려왔다. 만나는 신부님들마다 자랑을 했고 잘했다고 등을 두드려주셨다. 그런데 몇 달 후 사업시행기간 하루 전, 갑자기 충분한 설명 없이 사업을 접으라는 통고를 받았다.

너무 놀랐으며 마음안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몰려 들어와서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날 나는 충격과 놀람과 씁쓸한 마음으로 저녁을 넘기기 힘들었으며 밤사이 격한 감정의 파도를 만나 다시는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사업은 없던 것으로 그만 접으라는 상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수모스러워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만두면 내 마음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밤새 안녕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나는 아무런 일이 없다는 표정으로 출근해 명랑한 표정으로 상사들에게 "안녕하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하고 동료들과 절친들이 위로하고, 어떤 신부님은 "왜? 왜?"하고 반문하셨다. 나는 씁쓸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인지 잘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말기암 선고나 당장 나가라는 퇴사선고도 아닌데요 뭘!"

출근하고 싶지 않고 그만 둘 때 그만두더라도 이런 외부적인 원인에 의한 감정의 기복으로 그만두면 평생 내 마음의 거울에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괜찮으세요? 마음 아파요. 힘내세요!"하며 내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던 딸과 동생뻘 되는 동료들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 하며 관리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내 사업을 접게한 상급관리자와 대화를 청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때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나는 아무도 상세히 설명을 해주지 않아 아직도 궁금하다고 그 이유를 물었다. 상급관리자는 우리 기관의 운영규정에 우선한 재단안의 상위규정을 검토해 보았을 때 시행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상세히 답변을 해주었다.

계약직 6년 만에 정규직이 되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웬만한 일에는 감정기복이 없어졌으며, 어려워보였던 그 관리자와는 여러 가지 깊은 이야기도 나눌 만큼 사적으로도 친해지고 그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영전을 간 뒤에도 가끔은 만나 밥 먹는 사이가 되었다.

입사 6년 후, 나는 드디어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되었다. 몇 년간 함께 합숙연수를 했던 과원들은 모두 바뀌었다. 나도 하마터면 스스로 살아남지 못한 자가 될 뻔했다. 사시사철 대규모 행사도 많고 그에 비례하여 행정적인 절차와 문서 작성량도 만만치 않은 비장애 기관인 이 속에서, 관장보다 나이 많은 중증 청각장애인인 내가 정년까지 살아남은 자가 될 지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비영리 민간조직의 대표가 될지, 전업 작가로 연구실을 이전처럼 공개하고 불타는 창작열을 태우면서 지금보다 더 바쁘게 지낼지, 아니면 끝까지 이 조직 안에서 정년까지 살아남은 자로 있을지. 모든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조직은 항상 변한다. 사람 뿐 아니라 운영체계와 비전까지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은 때가 있고, 모든 일의 마지막 결과는 개개인이 좌지우지 할 수 없으며 바람 따라 나뭇가지에서 춤추는 노란 은행잎들도 결국은 모두 떨어져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이다. 유독 추운 오늘따라 하늘은 높고 청명하며 이 글을 쓰는 점심시간은 짧기만 하다.

나이가 좀 많기 했지만 나도 한때는 늙고 독특한 장그래였다.

덧붙이는 글 | 그래 나는 장그래 공모글



태그:#청각장애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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