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관련사진보기


기도회와 재판정에서 만난 사람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가족들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조직하여 당국의 사건조작을 폭로하고, 구속자석방운동과 민주회복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민청학련에 관련된 학생들은 법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은 수사기관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전남대 김정길은 수사기관에서 '김일성 만세'라고 자꾸 쓰게 하여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나중에 그것이 자기 조서에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김지하, 나병식 등 관련인사와 학생들은 수사과정에서 받았던 살인적인 고문행위를 폭로하여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1974년 9월 7일 오전, 비상고등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사건 주모자급 48명과 두 일본인을 포함한 50명에 대해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 선동 등의 죄로 선고공판을 열었다. 군법회의는 사형 8명, 무기징역 9명, 징역 12년 이상 20명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1974년 4·3 사건 발생일로부터 10개월 12일 만인 1975년 2월 15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180명 중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1명과 학원 관계자 4명을 제외한 148명이 출옥하였다.

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조작해낸 사건으로서 내·외의 여론에 밀려 이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까지 밀리게 된 것이다.

이소선은 이 무렵부터 목요기도회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목요기도회는 유신정권 시절에 재야민주인사들이 모여 '기도회'라는 형식을 빌어 인권문제를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를 다룬 강력한 반정부 집회의 하나였다.

유신 때는 반정부적인 집회를 합법적으로 개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가 되었든 구교가 되었든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성직자들이 앞장서서 기도회라는 형식으로 반정부 집회를 가졌다. 목요기도회는 매주 목요일마다 하는 정기적인 기도회였고, 그 밖에는 노동문제나 인권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당면한 사안에 따라 기도회를 열었다.

전태일 사건 이후 목요기도회에 나가게 된 이소선

이소선이 목요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기도회에 거의 빠짐없이 나가게 된 이유는 전태일 사건 이후에 학생들이나 종교인들, 지식인들이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싸워준 것이 고마워서였기도 하고,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갖가지 기도회나 특히 민주인사 재판정에 방청을 다니면서 배운 바는 엄청나게 많았다.

이소선은 기도회에 가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을 생생하게 들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도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투쟁이 결코 외로운 투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구속된 민주인사들의 재판정에 방청을 가서 그들이 당당하게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고, 묶이고 갇힌 자가 죄인이 아니라 그들을 짓밟고 올라선 자들이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한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지하가 재판을 받는 것을 들어보니까 말뚝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김지하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 조목조목 맞는지 그날 이소선은 양반집 하인인 말뚝이를 통해서 분배의 정의를 알게 되었다.

함석헌 선생이 불구속으로 재판 받을 때다. 함 선생은 스스로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삼베옷을 곱게 입으신 채로 재판장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씀하셨다.

"재판장, 내 말 들으시오. 지금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당신이 재판하지만, 역사는 당신들이 죄인 되는 날이 올 것인데 두렵지 않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올바로 말하는 사람들을 죄수라고 하지만, 역사가 말 할 것 같으면 당신네가 죄인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앉아서 재판을 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오."

그 서슬 퍼런 유신 정권을 향하여 함 선생은 준엄하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소선은 기도회나 재판에 가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가지고 밤에는 노동조합에 와서 조합원들한테 열심히 얘기를 해주었다. 그 귀중한 가르침들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청계노조 조합원들한테 전달해 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조합원들을 항상 그런 곳에 데리고 다니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들은 공장에 가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신이 들은 다음 그들에게 다시 전해주어야 했다.

목요기도회는 다니면서 많은 사례를 보고 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사례 중의 하나가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은 애당초 1964년 8월에 '북한괴뢰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소위 인민혁명당의 정체를 전 국민 앞에 밝히는 바'라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발표에 의해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검사 등의 공소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기도 하고 공소가 취하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고 몇몇 사람만 비교적 무겁지 않은 실형을 받았다.

그런데 10년 후인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때, 과거의 인혁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또다시 연루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은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고,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기도했다는 이유로 2·15 석방 때 제외되었다.

이소선은 인혁당 사건에 대한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가 일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와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분리해서 조치하고, 또 언론이나 사회여론도 이러한 정부의 의도에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석방운동도 따로따로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재야민주인사들마저도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별종으로 치부하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이런 가운데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호소문을 써들고 기도회에 나와서 읽겠다고 사정하면 사회를 보는 사람이 순서에 넣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예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혁당 사건 가족들 사연 들은 이소선, 그들을 돕겠다고 마음먹어

인혁당 사건 가족은 끈질기게 기도회나 집회에 나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물론 그것은 정식순서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폐회가 된 뒤 그들이 마이크를 잡고 호소하는 식이었다. 어떤 때는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나타나 호소하고자 하면 신부나 목사님들이 그들을 피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얘기 좀 합시다. 우리는 얼마나 억울하게 됐는데, 그런데도 말도 못하게 합니까?"

인혁당 사건 가족들은 외면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인혁당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남편들 재판정에서 어느 날 이름이 우리한테 붙었는데, 우리 남편들은 그냥 순수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별난 모의라고 해서 조작해낸 것입니다.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억울합니다. 여기서 끌려든 사람들은 학생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며, 사회에서 뚜렷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닙니다. 전부 다 누가 석방운동을 해주지도 않을 그런 사람들만 끌어모아다가 이렇게 덮어씌워 가둬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처절한 호소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소선 역시도 이러한 문제를 우리들이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소선은 그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들이 싸우는 곳에 가서 함께 싸워주는 것밖에는 달리 없었다.

훌륭하신 목사님과 신부님 몇 분 그리고 민주인사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인혁당 사건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호소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잘못된 시각을 바로 잡아주고, 고통당하는 가족들한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해주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족들의 억울한 사정을 구구절절이 적은 호소문은 눈물 없이는 읽어 내릴 수가 없었다. 그 호소문을 읽어나가면서 이소선은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웠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했다.

점차로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호소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고, 석방운동이 활발해지자 중앙정보부에서 그 가족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씨의 부인 임인영씨의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임인영씨에게 들은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 '정보부를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남편이 재판정에서 그렇게 억울하다고 얘기하는데, 그래도 이 사람이 뭔가에 묶여 있으니까 정보부에서 묶었지 않았겠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기징역을 살 정도면, 저들이 남편에 대해 뭔가 의심스러운 게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항상 나를 따라붙었다. 나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서 애 아빠를 취조한 수사관을 붙들고 남편에 대한 것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차차 굳혀갔다.

그러한 의도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호소문도 더욱더 과감하게 써서 배포하고, 고문에 대한 것도 폭로하였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잡으러 올 것이다'하고 집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청량리경찰서 담당직원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는 남편과 관계있던 사람들이 늘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형사들이 난처한 듯 머뭇거리다가 "저 아줌마, 중앙정보부에서 좀 모시고 오래요"라고 하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 데리고 오래요?"라고 했다. 형사들이 그렇다고 대답해서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고 가야지. 얘들아, 나 빨리 갔다 올 거다"하면서 형사들을 따라나섰다. 나의 그런 태도에 오히려 형사들이 놀라는 눈치였다. 중앙정보부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서 당황해 하거나 '왜 데려가려 드느냐'며 버티며 몸싸움이라도 한바탕 해야 하는데, 되레 반가워하면서 따라나서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갔다. 처음에는 혼자만 잡혀 들어온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같은 시간에 인혁당 사건 관련 가족 10여 명을 동시에 연행한 것이다. 대구에서도 잡아오고 서울에서도 잡아들이고 해서 여자 10여 명을 연행했다. 연행되어 와서는 각자 다른 방에 있었으니까 서로 그런 줄을 몰랐다.

어떤 방엔가 앉혀져 잠시 기다리니까 과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까맣게 생긴 사람이었다.

"흥, 생긴 건 빤빤하게 생겨 가지고 ……."

그 사람은 대뜸 반말지거리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조금 후에 점잖은 태도로 학교를 어디 나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몇 마디 대꾸를 해주자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취조관이 들어왔다. 취조관이 나를 취조하려고 들기에 나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내 남편 취조한 취조관을 데려오시오."
"아이고 아줌마, 아저씨 취조한 사람은 데려다 뭐하게요? 우리하고 얘기합시다."

나는 공책 3페이지 정도 되는 공소장을 달달 외우고 있던 터에 취조관에게 항의하듯 따지고 들었다.

"아니오, 나는 우리 아저씨가 재판정에서 한 얘기도 있고, 공소사실을 보면 3페이지밖에 안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무기징역이 뭐야! 그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자, 봐라. 무슨 책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시중에서 파는 책이다. 그리고 다방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했다고 하는데, 내가 그 다방 가봤다. 가보니까 의자가 요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거기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해? 정신이 빠진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서 국가를 변란하기 위한 모의를 할 수 있겠어? 거기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이 오면 차 마시고 식사 대접했다고 하더라. 그래 당신들은 그런 데서 국가변란 모의를 하냐?"

내가 얘기하는 동안 취조관은 내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전창일이 의심나는 것 있으면 말해봐라. 그러면 나는 석방운동 안 해. 너희들이 당장에 증거만 대고 전창일이 의심스러웠던 것만 대주면 석방운동 안 해. 그러니까 빨리 데려오라고."

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니까 밖으로 나갔던 과장이라는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과장은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떠들어? 저것 맛 좀 봐야겠네?"

과장이라는 사람이 눈을 부라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면 내가 이들의 협박에 굴할 아무런 까닭도 없다.

"왜 고문해서 조작했냐? 너희들에게 고문해서 빨갱이 만들라는 권한이 어디 있냐?"

과장은 더욱 싸늘한 눈매로 나를 노려보다가 고함을 질렀다.

"저것 진짜 한 번 혼 좀 내야겠네. 저년 당장 고문실로 데려가!"
"그래, 내 남편이 받았다는 고문, 나도 받아보는 게 소원이다. 가자 가."

과장이라는 사람하고 취조관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나의 태도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나를 그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고문실로 데려가지는 않고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비교적 공손한 태도로 취조를 했다.

"아주머니, 자꾸 남편이 억울하다고 하는데 남편 공판기록을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가져와 보세요. 한번 봅시다."

취조관이 캐비넷에서 공판기록을 꺼내 전창일 부분을 펴서 보여주었다. 그것을 보니까, 판사가 '국가변란을 모의했습니까?'라고 묻는 말에 '네, 했습니다.'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질문들도 재판정에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는데 전부 '네, 했습니다.'로 뒤집혀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수병씨를 맡은 조순갑 변호사가, 공판기록이 조작됐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전해들을 때는 설마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눈이 확 뒤집혔다.

"아니, 공판기록이 조작됐다고 변호사님이 말하더니 이것 좀 봐! 법정에서 '국가변란을 모의했습니까?'하니까 '우리는 국가변란 모의가 뭔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런 것 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이게 뭐야! 다 했다고 되어 있잖아. 당신들, 이런 짓까지 해도 되는 거야? 하늘이 무섭지도 않냐!"

내가 팔팔 뛰며 몰아붙이자 취조관은 얼른 공판기록을 덮어버리고, 그 얘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같은 정보부내에서도 공판기록을 조작한 부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 취조관은 조작사실을 모르고, 그 기록을 보여주면서 나를 설득해보려고 한 모양이었다.

3일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나는 그런 식으로 싸워나갔다. 내가 워낙에 강력하게 싸운 탓인지 조사기간 내내 비교적 예우를 받아가며 조사를 받았다.

임인영씨와는 달리 다른 가족의 경우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고 한다. 온갖 비인간적인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씨의 부인은 치 떨리는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정보부에 끌려가자마자 온갖 더러운 욕설을 들어야 했다. 특히 미국인 오글(한국명 오명걸) 목사가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한국의 인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두고 그들은 '그 미국 놈들 왜 쫓아 다니냐?" 며 입에 담기에도 더러운 욕을 했다.

○○○씨 부인은 그때 오바를 입은 채 연행되었는데, 멱살을 잡고 얼마나 세게 흔들었는지 나중에 석방되어서 나온 뒤에도 목 언저리에 멱살 잡힌 오바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런 폭행을 처음 당해보았기에 그녀는 너무도 놀라서 기절할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이 간접'이라고 진술한 그녀... 그 고통은 참혹하고 끔찍 

취조과정에서 너무도 숨이 차고 목이 타서 그녀는 물을 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하얀 색의 물을 가져다주더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저 물인 줄만 알고 반쯤 마셨는데, 물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성욕이 솟구치는데 못 견딜 정도였다고 했다. 물에다가 흥분제를 탄 것이다. 견딜 수가 없어서 바닥에서 막 데굴데굴 구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보부 요원들은 자기네끼리 짐승처럼 웃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자, 네 남편은 간첩이다. 그러니까 네가 직접 네 남편은 간첩이라고 써라'고 강요했고, 그녀는 강요에 못 이겨 남편이 간첩이라고 자신의 손으로 진술서를 쓰고 말았다 한다.

○○○씨 부인은 그런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거짓진술서를 쓴 것이 가책이 되어, 석방된 뒤 '나는 죽어야 돼. 죽어야 돼'하면서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자기가 남편을 간첩이라고 진술서를 써주었기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남편의 사진을 다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고통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했겠는가. 그녀의 진술을 마저 살펴보면 한 가정이 얼마나 잔인하게 부서졌는지를 알 수 있다.

"남편의 사진을 불태우고 나서 나는 애들과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쥐약을 사왔다. 쥐약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몰래 먹인 뒤 나도 먹고 죽으려고 했다. 방안에 애들 셋을 앉혀 놓고 약 뚜껑을 열었다. 쥐약을 먹이려고 하니까 애들이 눈치를 채버렸다. 내 태도가 이상했던 것이다. 큰아이가, "엄마, 그게 뭔데"하고 물었다. 그런 와중에서 쥐약이라는 걸 눈치 챈 애들이 뒤로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안 먹어, 안 먹어! 우리는 안 먹을 거야. 왜 쥐약을 먹이려고 해.'

나는 막 울면서 애들에게 얘기했다.

'먹어야 돼. 이리 와, 이것 먹고 우리는 다 같이 죽어야 돼.'

그러면서 나는 애들한테 강제로 약을 먹이려고 했다. 애들하고 서로 울면서 실랑이를 벌이는데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는 내게서 약병을 빼앗았다. 그리고 전부 다 끌어안고 하염없이 통곡했다."

○○○씨 부인은 그 뒤 임인영씨 등 인혁당 가족과 양심 있는 성직자, 그리고 재야인사들의 위로와 관심으로 용기를 얻어 자신이 당했던 사실들 폭로하기도 하고 목요기도회에도 나오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