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위원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싫다. 어떤 방법으로 보여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김기덕 감독은 지난 5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좌담회 '아주담담'에서 차기작과 관련해, "한국에서는 심의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 관행과 기준에 반기를 든 발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마치 그가 국내 영화계에 쌓인 한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김기덕 감독

김기덕 감독 ⓒ 화인컷


김기덕 감독은 3대 국제영화제에 참가해 주요 상을 휩쓸었다. 그는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2011년 <아리랑>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김기덕이란 감독은 국내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가 돈이 되지 않는 감독이라 무시 받는다는 느낌까지 든다. 물론 수상이 영화의 작품성을 반드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허나 권위 있는 수상 경력을 마냥 무시하는 것도 이상하다.

이따금 김기덕 감독의 발언을 접하면, 그에게는 묵힌 분노 같은 것들이 보였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는 위대한 자산이라 여기면서, 한국 영화계의 보물 같은 그를 우리는 푸대접 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가 좋은 작품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후한 평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김기덕에게 박한 한국 영화 평론계, 대체 왜?

관객들이 영화 관람을 결정짓는 요소는 여럿이 있다. 권위 있는 평론을 통해 미리 그 정보를 접하고 관람 여부를 정하기도 한다. 평론에 대한 신뢰는 각각 다르지만, 평론가의 권위가 높을수록 평론에 대한 믿음도 강해진다. 어떤 사람에게 평론은 절대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별점'이라는 평가방식이 도입되며 그만큼 간단하고 빠르게 영화를 평가할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전문가 평론은 가볍게 볼 수 없다. 때에 따라서 절대적 기준이 되기도 하는 평론, 과연 평론가들은 타당한 기준은 만들어 놓고 평론하는 것일까. 그 평가에 일관성은 있는 것일까.

평론은 정보로서의 '신뢰재'에 속한다. 이를테면 의료서비스나 교육서비스 같은 것이다. 신뢰재는 그 특성상 상품을 구매·경험해도 그 품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결국 대상에 대한 신뢰와 소비자의 믿음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영화 정보 역시 이와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다. 관객들의 신뢰가 평론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 신뢰재에 대해 정보비대칭성이 발생하면 문제가 야기된다.

중고차 시장이라고 가정하자. 중고차 시장에서 차의 품질이 좋다고 하더라도 소비자는 투명하게 품질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때문에 같은 차종이라면 낮은 가격의 차를 선호하게 돼 상대적으로 품질이 좋은 차는 시장에서 퇴출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평론에 대한 품질 정보를 알 수 없다면, 같은 평론이라도 단순히 노출이 빈번한 정보를 더욱 선호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품질 좋은 평론이 미디어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단순히 미디어에 빈번하게 노출된다는 이유로 명확한 기준점 없는 중구난방식 평론이 관객에게 제공된다고 가정하자. 잘못된 정보에 속아 중고자동차를 구입한 소비자의 입장과 관객이 다를 바 없다. 영화를 본 뒤 잘못된 평론을 접했다면 관객은 어수룩한 카센터 기술공을 만난 차주인과 다를 바 없다. 이미 차는 구입했으나 무엇이 고장 났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는 싶은데 제대로 설명은 못하는 그런 기술자말이다.

유명 영화저널리스트인 A는 <늑대소년>과 <타짜-신의 손>에 평점 6.75점을, <반창꼬>, <토르>, <명량>에는 평점 7점을, <숨바꼭질>과 <피에타>에는 7.25점을 매겼다. 이 평론가에게 이 작품들은 모두 비슷한 수준이고, 특히 <숨바꼭질>과 <피에타>는 '같은 품질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술영화는 완전히 괄시하는 평론도 있었다. 평론가 B는 <늑대소년>에 평점 9점을, <어벤져스>는 8점을 줬다. 반면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는 나란히 5점을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필시 박쥐와 피에타는 상당히 좋지 못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피에타 스틸컷] "미안해, 널 버려서.."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황금사자상 수상에 빛나는 김기덕 감독을 한국 영화계가 버리려 하지는 않았는가?

극단의 평가가 엇갈린 <피에타>, 그러나 영화 속 대사처럼 한국 영화계는 김기덕 감독을 버리려는 것은 아닐까. ⓒ 김기덕필름


영화 별점을 줄 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다양하다고 반론할 수 있다. 스토리와 비주얼, 연출, 연기 부분에서 각기 다른 점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총점을 내리는 것은 평론가의 몫이다. 관객은 전체 별점과 함께 평론을 접한다. 반드시 항목별로 세분화하지 않는다.

물론 예술영화라 하여 반드시 좋은 작품으로 평가하는 것이 올바른 기준은 아니다. 반대로 오락영화가 즐거움을 준다하여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는 것 또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결국 작품의 별점을 정하는 기준이 장르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김기덕 영화의 작품은 대부분 별점이 바닥을 친다. 그도 사람이니 작품에 따라 상승과 하향곡선을 그릴 수 있겠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마저 든다.

외국 영화제 심사위원들에게 상영되는 영화와 우리나라의 평론가들이 관람하는 영화가 다른 영화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같은 영화를 놓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평이 갈라지는 경우라면 무언가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가. 평론 자체가 매우 주관적인 작업이라고는 하나, 훌륭한 감독을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야 할 감독의 고향에서 극단적 평가가 발생하는 게 현실이다.

 영사기

평론가의 평가가 신뢰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 픽사베이


한국 영화 평론계의 잘못, 관객과의 쌍방과실이다

상품은 수요에 의해서 공급이 발생하기도 하고 공급에 의해서 수요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별점이라는 시스템은 수요에 의해서 '활성화된' 경우로 분류해야 한다. 결국 관객들의 인스턴트식 해석 요구가 무리한 별점 탄생을 야기했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관람을 결정하고 싶거나, 혹은 영화를 관람한 뒤 그것을 해석하고픈 욕구는 있으나 복잡한 설명은 읽고 싶지 않고 간단한 해체만을 원하는 관객들은 인스턴트식 별점을 원한다. 이 현상을 바라보면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이 서구 민주주의의 성찰을 위해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서양의 자유 민주주의는 현재 '다이어트 콜라 민주주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다이어트 콜라가 무엇인가요, 콜라를 마시고 싶은데 살은 찌기 싫어하는 것이죠."

이런 성향이 영화 평점에도 드러난다. 영화에서 군더더기는 걷어내고 싶은데, 자세한 설명이 가미된 노력은 하기 싫다. 평점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별점을 평가항목별로 세분화했지만 이 역시 영화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여러가지 반찬을 젓가락 하나로 잡겠다는 무리한 시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관객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평론가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를 평론가가 평가 절하하는 순간, 관객은 스스로 바보가 된 느낌을 받는다. 본인의 영화를 바라보는 혜안이 문제 있을 거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평론가에게 욕을 쏟아내고 그의 평론을 절하한다. 그러면 평론가들은 점차 관객의 눈치를 보게 된다. 김기덕 감독의 대부분 작품은 가볍게 관람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수의 관객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작품이다. 일부 관객의 악평이 두려워, 평론가 사이에서도 평가가 절하되는 과정이 발생할 수 있다. 만일 평론이 균형을 잃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평론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과의 쌍방과실이다.

사실 필자는 평론을 참고할 때 별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편이다. 대신 한줄평에 집중하는 편이지만, 그 또한 너무 짧은 분량이다. 영화에 대한 모든 분석을 집어넣기에는 '냉장고에 코끼리 넣기' 식이다. 사실 영화의 정보를 접하고자 하는 수요자들은 별점을 좀 더 지양하며 주관식 설명이 가미된 영화평론을 선호한다. 영화의 정보를 공급하는 평론가들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이 가미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면 좋은 평론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별점과 한줄평은 평론에 이르게 된 '사고'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 수학문제에서 답안지만 작성해서 제출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성적향상을 위해서는 답에 이르게 된 '과정'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평론의 분별력을 높이긴 위해선 답에 이르게 된 과정을 살펴볼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중 사이에는 "<르몽드>가 칭찬한 영화만 쏙 빼고 보면 다 재밌다"는 말이 농담처럼 돈다고 한다. 영화평론의 위기는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한국 대중 사이에서는 "평론가들의 평을 참고하면 좋은 영화를 선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면 한다. 한국영화의 발전 그리고 이를 위한 영화평론의 발전도 기대한다. 그래야 우리가 김기덕 감독을 안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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